영적야성의 회복, 마가복음 14: 27-42
여러분은 혹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습니까? 3년간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남들보다 4년 늦깢이로 군 생활을 시작하면서, 졸업과 입학을 앞두고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할 때에, 새롭게 미래를 열어가야 할 때마다 불현듯 두려움이 밀물처럼 몰려오곤 했습니다. 현실의 문제들은 거인처럼 느껴지고 저는 난장이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도하면서 현실의 어려움 대신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기도했을 때 제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빌립보서 4:13입니다.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당시 순간 순간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분이 계셨기에 어둠의 시간들이 빛의 시간들로 바뀌었습니다. 그때의 고난의 시간이 길고 힘들었지만 고난을 힘들다는 이유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정면돌파할때마다 영적 근육은 강화되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이 오면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때론 그와 반대로 과신하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자신을 과신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자기 자신의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 확고부동하다고 생각한데 기인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충성됨이 다른 제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떤 일이 일어나도 배반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약속을 지킬 정도로 훌륭하지 못합니다. 연약할수록 어릴수록 쉽게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깨뜨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아직 자신의 연약함을 뛰어넘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위협과 죽음의 공포가 덮치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하고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것입니다. 죄책감입니다. 자기비하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그토록 맹세했지만 지키지 못한 스스로에게 실망하여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떻습니까? 베드로처럼 세상엔 내 힘과 의지로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를 반드시 만나고 그분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인생을 변화 시키는 힘인 영적야성의 회복의 시작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 견고히 서는 일입니다. "먼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머무십시오." 서로 인사하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머무십시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치유와 회복입니다. 도약과 비상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질문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3번이나 동일한 질문을 하셨을까요? 베드로를 심문한 것인가요? “ 베드로, 넌 나쁜 놈이야. 넌 배신자야. 넌 약속도 안 지키는 배은망덕한 놈이야.” 이렇게 고문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님은 베드로가 비록 배반하고 넘어져 있었지만 다시 일으켜 주고자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경험한 크기만큼 인간은 돌이키게 되어 있습니다. 배신해도 배반해도 다시 돌아가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해서 실수하고 넘어져도 뉘우치고 다시 일어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배반보다 큰 힘은 사랑입니다. 상처보다 큰 능력은 사랑입니다. 용서는 더 큰 사랑을 하는 이가 하는 것입니다. 용납은 더 큰 사랑을 하는 이가 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손을 내미는 것은 더 큰 사랑이 있을 때입니다. 베드로를 변화 시키고 회복시킨 것은 베드로가 의지력을 강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큰 사랑을 통해 연약함을 극복하고 회복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신 사람은 “쓰리 고”를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통, 고난, 고독"이 나오면 계속해서 “고”를 외쳐야 합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끝내지 말고 “고”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위험이 있어도 “고”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고”해야 합니다. 인내하면서 “고”를 외쳐야 합니다. 이때 잘 통과하면 영적 야성을 가진 인생이 됩니다.
렘브란트라는 빛의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빛 속의 그림자, 그림자 안의 빛을 오묘하게 변화시키면서 인간 내면의 심성을 끌어내는 화가입니다. 그의 그림이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그토록 참고 견뎌야 했던 삶의 시련과 고통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아내를, 그리고 네 명의 자식들 중에 세 명을 먼저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냈습니다. 렘브란트는 바로 그 고난의 길에서 보이는 세계 너머의 보이지 않는 영감과 빛을 보았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숱한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빛의 화가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민족은 짙은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빛의 화가를 필요로 하는 시기입니다. 현재 한국은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긴장 속의 번영'을 이룩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경제위기라는 태풍을 만났고, 한국은 가장 치명적 영향을 받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위기일수록 강렬한 희망과 위로의 빛을 발해야 할 것입니다. 이 암울한 시대에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하고, 크리스천들은 또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먼저 하나님이 이 민족에 경제적인 쓰나미를 허락 하신 이유는 교만한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 민족이 언제부터인가 교만하여 이 땅의 연약한 이들 소외된 이들을 멸시하였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노동을 착취하고 월급을 주지 않습니다. 어린 동남아 신부를 돈을 주고 데려와서는 돈을 주고 데려왔기에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처럼 마치 성노리개처럼 다루고 노예 취급을 하고 무시하고 구박하고 때리기 까지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초라한 민족을 들어서 열방 가운데 세우셨으나 도리어 이 민족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고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생각하며 황금송아지를 숭배하고 풍요의 신 바알과 음란의 신 아세라로 인해 이 민족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몰락의 징조입니다. 영적몰락은 민족의 몰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민족의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제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처럼 기도로 문제를 각개격파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을 넘어서서 우리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청년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른 말로는 '꿈' “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할 수만 있거든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다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깊어지고 격렬해지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인류 구원에 대한 꿈으로 변화되어지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바로 그것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기도의 결국에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했습니다.
기도는 단순한 주술을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씨름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내 뜻과 아버지의 뜻이 씨름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나의 문제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나의 문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정면 돌파의 시간입니다. 크리스천은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소욕이 지배하여 아버지의 뜻을 분별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어 가는 힘과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소원을 응답하십니다. 아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고 공급하십니다. 그러나 기도의 깊은 차원은 아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만이 생존을 넘어서서 비전을 따라 항해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깊은 기도의 바다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갈수록 출렁이는 육신의 소욕은 사라지고 잔잔한 성령의 소욕으로 채워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오니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는 깊은 기도를 하는 청년들에게는 꿈을 주십니다. 꿈을 상실한 개인과 민족의 미래는 절망이고 비극입니다. 그러나 꿈이 있되 그것이 허황된 것일 때 더 큰 비극을 낳습니다. 즉, 꿈도 바른 꿈이 있고, 반대로 잘못된 꿈이 있습니다. 바른 가치관과 윤리 위에 세워진 꿈이어야 합니다. 히틀러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숱한 유대인을 주였고 유럽을 전쟁터로 몰아넣었지만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최후를 마쳤습니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추도하거나 애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허황된 꿈, 잘못된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는 청년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지의 한계를 깨닫고 겸허히 미래를 바라볼 때입니다. 위기의 시간 일수록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그리고 비전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43:1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두려워 말고 전진 하십시오. 상대의 공격에 눈을 감는 권투선수는 허공으로 손을 휘두르다가 결국엔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날라오는 야구공을 바라보면서 공을 두려워 하는 타자는 두려움때문에 방망이를 마구 휘두르다가 삼진아웃되고 맙니다. 탁월한 축구 선수는 날라 오는 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공이 날라 오는 것을 보면서 각도를 계산합니다. 어떤 각도로 머리를 대고 발을 대면 골문을 가를 것인가를 계산하고 감각적으로 머리를 갖다 댑니다. 발을 살짝 댑니다. 뛰어난 선수일수록 빠른 속도로 날라 오는 공을 받고 드리볼을 하면서 수비수를 제치고 결정적인 순간 골문을 향해 공을 차 넣습니다. 그들은 스피드가 빠른 공일수록 골을 넣기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회피 대신에 문제를 직시하면서 비전의 눈으로 보아야 우리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육신의 온갖 연약함에 갇히면 패하고 맙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 위기의 상황, 두려움의 상황에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문제를 똑바로 보고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기도는 영감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시간입니다. 철저히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이사야 43:18-19 은 말씀 합니다. "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
고난의 때는 새로운 길이 열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현실에 두면 절망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보입니다. 지금의 위기는 곧 대각성의 기회입니다. 우리 민족이 다시 더 기도하고 더 말씀의 기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요셉으로 인해 애굽은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열방의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요셉으로 인해 기아에 허덕이며 죽음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들인 이스라엘의 11명의 아들들이 기근을 견디어 냅니다. 요셉은 민족의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팔았지만 요셉은 도리어 형제들을 품어주고 또 기근에서 살리는 가문의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을 요셉처럼 신앙적 관점으로 보면 해답이 분명히 보입니다.
우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어야 미래를 여는 길이 보입니다. 우리는 '잘 사는 법'은 알았으나, '나누고 섬기는 법'은 소홀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물질을 좀 잃더라도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이때야말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점검할 때입니다. 도덕적이지 못한 민족이 세계를 섬기지 못합니다. 부정과 부패가 있는 민족은 세계를 섬길 힘을 상실합니다. 항상 기초가 문제입니다. 기초가 약하면 작은 충격에도 무너집니다. 기본부터 추슬러야 합니다. 우선 내 방식대로만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한국의 청년세대는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청년대학생들이 세상을 품고, 세상을 섬기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포효하는 영적 야성을 가진 젊은 사자가 아니라 사자굴에 갇혀 두려움에 떠는 포로가 된 느낌입니다. 청년 실업이 너무 심각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은 결혼까지도 늦추게 합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갈 길미 막막하다고 느껴서 여대생들은 취결이라고 취업 대신에 결혼을 선택하는 경우가 늘어가는 현상을 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적 야성의 회복이 대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 야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1. 내 힘과 능력과 지혜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스가랴 4:6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2. 고통과 고난과 고독을 회피하지 말고 말씀과 기도에 버무리면서 정면돌파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깨어서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깨어서 마피아 게임 하라면 12명은 게임하기에 딱 좋은 수이기에 밤을 세워서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3명은 마피아고 나머지는 시민이라면 아마도 베드로는 나의 결백을 믿어줘.라고 다혈질을 드러내며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마피아라면 얼굴이 붉어졌을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게임으로라면 밤을 지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로 밤을 세우는 것은 영적전쟁입니다. 치열한 전투입니다. 너무 힘들기에 깨어 있기가 힘이 듭니다. 특히 육체의 소욕을 꺼꾸러뜨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너무 어렵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합니다. 깨어있어야 시험에 들지 않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깨어있어야 분별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3.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붙들어야 영혼이 살고 미래가 열립니다.
누가복음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십자가는 헌신입니다. 희생입니다. 손해보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은혜입니다. 회복입니다. 변화입니다.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상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신 이후에, 다시 새로운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절망의 밤에도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고난을 능히 이겨낼 용기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새벽을 깨우는 기도의 청년들이 있는 한 미래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과거 한국 기독교는 앞길이 잘 보이지 않던 혼란의 시기에 새로운 길을 열고, 제시하고, 앞서가는 역할을 했습니다. 근대문명의 전달 매개자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인 자유와 평등의 전파자였습니다. 우리문화의 가치와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메신저였습니다. 억압과 굴종의 역사를 신앙으로 이겨내며 민족의 소망을 잃지 않도록 한 유일한 세력이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고난의 세월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나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민족의 고난의 때에 억압에 대한 항거와 변화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3·1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목사와 장로였습니다. 독립을 위해 자신을 바쳤던 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승훈,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윤치호, 김구 같은 믿음의 선배들을 특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십자가'란 시에서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 처럼 十字架(십자가)가 許諾(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 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고 했고 그는 일제말기 감옥에서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삶을 마쳤습니다. 기독교인, 그들은 청년의 때 깨어서 기도했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붙들었고 하나님이 주신 꿈인 대한민국의 미래를 세우는 일, 성경의 기준을 이땅에 세우는 일에 헌신하는 청년의 때를 보냈습니다.
이번에 김수환추기경에 대한 조문이 줄을 이었지만 기독교계에도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 잇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입니다. 매스컴에서 한경직목사님의 소천때 대서특필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아무도 받지 못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을 우일하게 받을 만큼 훌륭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해방 후 6·25를 거치면서 대규모 구국기도회를 열고 나라의 통일을 위해 기원하며 매일 오후에는 가두로 나서 대중전도와 개인전도를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한평생 청빈하게 살았고 고아원을 세우고 구제 시설을 세우고 한평생을 눈물을 흘리면서 살았습니다. 자기의 허물과 함께 민족의 비극을 가슴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끌어안을 줄 아는 목회자였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고 그 마음을 품고 세상을 섬겼습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우리는 변화산에서 초막을 치고 머물자고 말하는 대신 겟세마네로 가야 합니다. 고난을 기도하는 가운데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꿈꾸고 헌신한다면 하나님의 꿈이 나를 통해 이 땅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겟세마네 기도를 멈추지 마십시오. 겟세마네의 기도만이 고난을 이기게 하고 영적 야성을 회복시키고 여러분의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의해 빚어지게 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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