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과 삶/설교

[스크랩] 갈보리 - 존 라일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09. 1. 16. 16:53

갈보리

- J. C. 라일 -


갈보리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장소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입니다. 사실 갈보리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저는 이 설교의 제목을 "갈보리"라고 정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분이 십자가에 처형되신 일에 관한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주제에 비교적 무지한 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고난의 기록 속에서 아무런 영광도, 아름다움도 발견해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그저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웠던 일이었다고 간단하게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그냥 듣기 껄거러운 이야기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잘못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온전히 동의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께서 배신당해하시어 악한 자들의 손에 넘겨지신 것부터 시작해서, 부당한 재판에 의해 죄인으로 몰리시고, 사람들에게 침뱉음과 채찍질 그리고 구타를 당하시며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 같이 저항도 불평도 않으시면서 그들의 손에 끌려 언덕을 올라가시고, 결국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히시며 두 강도와 함께 갈보리에 세워지신 것, 그리고 그분의 옆구리가 창에 뚫리고 무지한 인간들의 조롱을 당하시며 죽음에 이를 때까지 벌거벗겨진 채로 피를 흘리신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을 두구두고 상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복음서에서 네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것은 어쩌다 그렇게 된 일이 아닙니다. 사복음서에 어떤 한 사건이 네번 모두 언급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거기다 모든 과정이 상세하게 반복되는 경우는 이 십자가 사건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은 그 정도로 중요한 사건인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갈보리에서 겪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이 모두 사전에 예전되어 있던 일들이었음을 깜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전에 이미 충분히 논의되고 계획되어 있던 일입니다.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비하셨고 또 미리 내다보시고 계시던 일이었습니다. 십가가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 아래 그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예수께서 느끼셨던 모든 고통과 그분이 흘리신 보배로운 피 한 방울 한방울은 모두 이미 오래전에 계획해 두신 일인 것입니다. 그분은 무한하신 지혜로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들을 구속시키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미리하심을 통하여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받으신 고난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었음을 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셔야 하셨습니다. 그분에게 내려진 채찍질은 우리를 치유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유일한 상환책은 그분의 고난밖에 없었습니다. 이 갈보리의 사건은 우리의 영원을 위한 희생제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지도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지도 않으셨다면, 또 그분의 의로 우리의 불의를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희망의 빛이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그 틈은 여전히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또, 그리스도의 고난들은, 그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란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합니다. 그분에게 어떤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분은 스스로의 선택을 따라 자신의 삶을 경영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발적인 선택으로 갈보리에 올라가셔서 자신이 계획하신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 한 마디로 천사들의 군대를 불러올 수도 있었고, 빌라도와 헤롯의 작당을 와해시키실 수도 있었으며, 그분의 모든 원수들을 돌풍에 흩날리는 지푸라기처럼 순식간에 흩어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기꺼이 고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엔 오로지 죄인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를 흘려서 죄인들과 깨끗치 못한 자들을 위한 생명샘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 모든 일들은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주제가 조금이라도 언짢거나 마음에 담기 껄끄러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저는 그 속에서 지혜와 능력, 평안과 희망, 그리고 기쁨과 즐거움, 또 위안과 위로을 발견합니다. 십자가에 눈을 고정시키면 시킬 수록, 그 모든 것들은 점점 더 확연하게 인식되어옵니다. 제 사고의 뜨락에 십자가를 오래 세워 두고 있으면 있을 수록, 저는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만족을 얻게 됩니다.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폭과 깊이를 확인하고 싶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 그 사랑을 가늠해야 할까요? 감사할 줄 모르는 악인들의 머리 위에도 매일 같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저 찬란한 태양을 보면서 그분의 자비로우심을 느낍니까? 아니면, 해마다 뿌린 만큼의 풍성한 열애를 맺게 하시는 것을 보고서 그 자비를 느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분의 가장 강력한 사랑의 증거는 그러한 것들을 훨씬 능가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 사랑을 확인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자비나 사랑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많은 인간들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분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분께서 자신의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을 믿고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확신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가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너무도 높이 계시고 또 그만큼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 같이 가련하고 추악한 피조물들에겐 영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닐까 하는 공상에 잠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에서 고통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나서는, 저는 제 속의 그 헛된 망상을 말끔히 걷어내 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죄라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추악한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무슨 이야기를 가져와서 설명을 해야 할까요? 대홍수가 나와 있는 장면을 펴서 죄가 어떻게 온 세상을 물 속에 잠기게 했던가를 보여드릴까요? 아니면, 사해 바다로 가서 어떤 죄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멸망을 가져왔는지 살펴보아야 할까요? 혹은 유대인들을 온 지면에 흩어지게한 그 죄를 확인해 볼까요? 아닙니다. 죄의 진면목이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 곳은 바로 갈보리입니다. 그곳에 드러난 죄의 모습이란, 그것이 너무도 가증스럽고 추악한 것이어서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아니면 도저히 씻어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갈보리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놓여진, 하늘의 천사들도 좁힐 수 없는 큰 간극을 만든 죄의 진면목을 목도합니다. 그 어느 것도 우리와 그분을 화해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이룰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가끔씩 거만해져서 자신의 죄가 그리 크지 않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갈보리를 볼 때면, 그 죄의 진면목에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

우리가 어디에 가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완성하신 구원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에 가야 가장 확연하게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보편적인 자비를 선언해 놓은 구절을 찾아가야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일반적 진리를 찾아야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저는 갈보리의 십자가 아래로 갑니다. 십자가보다 더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 나무 위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볼때 느끼게 되는 마음과 양심의 고통을 진정시킬 수 있는 향유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우리의 막대한 빚을 갚으신 것입니다. 바로 나와 당신을 대신하여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당신을 대신하여 율법 아래에서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의 요구는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단 한푼의 잔금도 없도 모든 빚을 갚으신 것입니다. 이제 저에게 빚을 독촉한 존재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가끔 제 자신이 구원을 받기에는 너무 사악한 것이 아닌가, 용서를 받기에는 너무 추악한 죄를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라보면 이 바보 같은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는 갈보리를 볼 때마다 죄인 중의 죄인이 하늘 나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확인하게 되는 셈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할 가장 강력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십계명에 귀를 귀를 기울이면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까요? 아니면 성경에 기록된 온총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를 공부하면서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하겠습니까? 혹은 하늘나라와 지옥의 형벌을 바교하며 묵상을 해 보아야 이유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바로 갈보리의 십자가 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말고 그분을 위하야 살라는 사랑의 권고를 듣습니다. 저는 제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고귀한 값으로 팔린 존재입니다. 제 몸과 영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엄숙한 의무에 묶여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저는 갈보리에서 발견합니다. 저의 몸과 영은 저의 것이 아닌 그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으며,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깨끗하게 정화 시키셨고, 나를 선한 일에 진력하는 독특한 백성들 속에 끼워주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지고 나무 위에 자신을 매다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죄에는 죽었고 의에는 살아난 것입니다. 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강력한 성화의 동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세상은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같고, 또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인 것입니다. 혹자가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가 어떻게 흔쾌히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의 제자들보다, 자신이 거룩해져야 할 필요성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삶의 근심과 걱정에 시달릴 때, 어디로 가서 마음의 평안과 만족을 얻어야 하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아야 그 마음의 형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공부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지혜나 그분의 섭리, 혹은 그분의 사랑에 관하여 공부해야 할까요? 물론 그런 것들도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거기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놓아 저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분이라면 제게 진정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작은 일들도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나를 집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런 분이 제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평안이 부족하면 갈보리로 가십시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 아래까지 걸어가 보십시요.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란 확신은 또 어디에서 얻어야 할까요? 만일 저에게 그런 의심이 닥쳐온다면, 저는 어디로 가서 그 의심을 물리칠 증거들을 찾아와야 할까요? 제가 입은 은총들과 은사들을 주시해야 할까요? 아니면, 제 자신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저의 인내와 열심, 혹은 무수한 기도를 생각하면서 마음에 평안을 불러와야 할까요? 또는 제 마음에다 대고, "괜찮아, 그런 마음이 있어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늘 침착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하며 대강 얼버무려야 할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갈보리로 가서 십자가를 바라볼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가장 큰 증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의지하는 유일한 기둥입니다. 저는 저의 혼을 구속하기 위해 그 혹독한 고난을 감수하신 분께서, 자신에게로 돌이킨 저를 멸망에 던져버리시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결코 그럴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것들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들입니다. 그분은 참으로 값비싼 댓가를 치루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제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저를 위해 죽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한 번 자신을 믿은 사람은 영원히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만일 마귀가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널 영원히 소유하시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하는 말을 속삭이거든, 즉시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요. 십자가를 보고서도 절망을 느낄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조금 아시겠습니까? 제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한다고 했을 때의 그 깊은 속뜻을 말입니다. 혹시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도 냉담한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까?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수천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보고서도 아무른 마음이 없다는 사실보다 인간의 심성이 타락했음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하여 듣고서도 여전히 냉담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의 마음을 두고 굳어졌다고 하는 것이고, 마음의 눈이 감기고 양심은 병들었으며,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상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그분께서 그러한 고난을 받으신 적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갑니다!

여러분, 만일 지금껏 갈보리와 그분의 집자가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면, 오늘의 설교를 통하여 무언가를 깨달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