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July
새벽묵상
새벽녘에 잠이 깨었다. 너무 추웠다. 선풍기나 에어콘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너무나 강한 에어콘 바람에 힘들었다. 모두들 자고 있는 시간이였지만 창 사이로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새벽 묵상을 하였다. 비 흐림 맑음이 반복되고 있다. 창가를 바라보면서 묵상하는 시간에 하나님은 나에게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영화를 보듯이 보여 주었다. 지나간 시간들의 기쁨, 슬픔, 즐거움, 아픔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하나님은 나를 미리 아시고 내 삶의 순간 순간마다 간섭하고 계셨다.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엮여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기차길 인생길
기차길을 따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남자들은 어디서든 볼 일을 본다. 그냥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거의 다 볼 일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철로변이나 철로 위에 걸터앉아서도 볼 일을 보고 잇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들이다. 나만 민망해하며 황급히 눈길을 돌리곤 했다. 기차역은 어디에서든지 세면하는 사람들과 목욕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어디에서든지 자리를 펴고 누워자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흙탕물에서는 소가 뒹굴고 개들이 뛰논다. 심지어 돼지가 음식물을 찾아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고 아이들도 곁에서 함께 뭔가를 찾고 있다. 흙탕물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고 한쪽에서는 여인들이 옷을 빨고 있다.
인도에서 느끼는 것은 기차길은 인생길이다. 길을 따라 정말 다양한 삶이 펼쳐지고 있다. 생노병사를 여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빈부귀천이 그대로 드러난다. 인생은 철로를 따라 이어진다. 타는 역이 있고 내리는 역이 있다. 제각각의 모습이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인도 철로변의 단상
인도에는 온갖 쓰레기가 철로변에 가득하다. 인도인들은 철로에다가 모든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듯하다. 그들은 쓰레기든 배설물이든 너무 자연스럽게 버린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그 더러운 곳에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철로변을 따라 걷는 소와 개들이 걷고 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그냥 웃고 말았다.
인도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야지대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땅이 정말 비옥하다. 한국의 평야지대는 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이 어디를 가나 보이고 산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보인다해도 언덕배기 정도이다. 그러고보면 상황이나 환경이 빈부귀천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도 땅을 바라보면서 문득 그들의 인생이 그들의 인생관에서 결정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을 믿는 사람들로 자신의 출생때부터 이미 자신의 인생항로가 정해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창조의 공간이 없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바탕에는 창조의 사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도의 각종 문제의 해답은 이 창조의 공간을 회복하는데 있다고 보여진다. 인도 사람들이 인생관에 있어 숙명론적 자세를 거부한다면 생의 놀라운 도약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수용성 자체는 좋다. 그러나 숙명론은 거부 되어야 한다. 수용성은 창조성을 덧붙일때 세상을 변화 시키는 힘을 지닌다.
바라나시
어제밤 8시 30분에 출발한 기차는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바라나시역에 도착하였다. 4시간 30분이 연착되었다. 인도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한다. 바라나시역은 엄청난 인파로 붐비고 있다. 곳곳에서 구걸하는 사람, 누워있는 사람, 구루, 앉아있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바깥으로 나오니 오토릭샤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오토릭샤를 타고 우리가 머물 숙소인 sandhya guest house로 왔다. 서모오는 달리 속도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덥고 텁텁한 공기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캘커타보다 차만 좀 작지 사람, 차, 오토릭샤, 사이클릭샤, 피이플 릭샤, 소, 개, 염소로 거리는 붐빈다. 한마디로 정신없는 세상에 온 느낌이다. 멍한 느낌에서 헤메다가 숙소에 도착하니 생각보다는 시설이 좋다. 몇마리의 벌레와 바퀴가 활보하는 것 외에는 그런데로 만족할 만하다. 이곳에 와서 도마뱀이나 벌레와 많이 친숙해졌나 보다.
브로드웨이
오후 4시 30분이 되어서야 점심겸 저녁을 겸한 식사를 브로드웨이 호텔에서 하였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멍하다못해 띵하다. 어질어질한 느낌이 있어 바깥으로 나와서 찬물에 몇번이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연신 물을 많이 마셔주었다. 더위먹기 일보직전이기에 긴급조취를 나름대로 한 것이다. 치킨과 염소고기와 밥을 먹고나니 한결 나아졌다.
갠지스 강
오후 5시 30분이 넘어서 갠지스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에 도착해보니 물에 소들이 데거리로 들어가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그 곁에는 아이들이 수영을 하고 나이드신 할아버지께서 목욕을 하는 중이다. 배를 타고 강 물결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였다. 강변은 가트로 가득하다. 강을 따라 왕의 무덤격인 궁전형식의 다양한 모양의 가트가 이어진다. 왕들이 죽기전에 이곳에 머물면서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고 한다. 이집트의 나일강과 왕의 계곡이 떠올랐다. 아무튼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의 영원한 군림을 원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일치하는듯 하다. 그들의 영원이나 더 좋은 환생을 향한 욕망을 흐르는 강물에 흘러 보낼수는 없었을까. 그들이 믿는 것이 진리라면 그 욕심마저도 버려야 하지 않았을가. 살아서도 가장 높은 카스트로 군림하고 죽어서도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야말겠다는 그 무서운 집착이야말로 그들 자신의 욕망의 투영이 아닌가.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황토빛 물결이 무심하게 갠지스 강을따라 흘러내리고 있다. 다양한 모습의 가트와 궁의 모습이 끝없이 이어진다. 기울어진 궁전의 모습이 보인다. 물에 거의 잠긴 궁전의 모습도 보인다. 쇠퇴한 궁전의 외관은 세월의 흔적만 남긴채 인걸은 간 곳이 없다. 여기저기서 수영하는 사람들과 목욕하는 사람들이 손을 들어 흔들며 웃어준다. 배위의 우리는 모두 심각한 표정들이다. 이들의 모습에 함께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지 못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다. 문득 경직된 모습보다는 차라리 이들에게 자유로운 모습으로 다가가는게 좋치 않을거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강물은 말이 없이 시간의 흐름에 제 몸을 맡기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수많은 무리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늙고 병들어 죽어서 이곳에 뿌려졌다. 세대와 세대를 따라 바톤터치를 계속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과 사의 진실하고도 소박한 진리를 터득하며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어 간다.
저녁 노을처럼
갠지스 강변에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붉은 햇살이 강을 적시고 있다. 배가 시체를 태우고 있는 가트를 지나 간다. 사람을 태우는 냄새가 난다. 3-4구의 시신에는 불길이 마지막 가는 육신의 잔상마저 다 없애려고 맹렬하게 수고중이다. 장작더미 위에서 마지막 길을 장식하고 있는 인도인. 과연 그들 인도인들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후회가 없을까? 시신은 말이 없다. 조용히 장작더미 위에서 그 흔적마저도 남김없이 사그라들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까운 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기억마저 불태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이 흐른다. 불이 타고 있다. 삶과 죽음을 가까이 느끼는 이곳에서 한동안 말이 없이 침묵이 흐른다. 불타는 시신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해준다. "네 인생이 무엇이냐?"
새로운 물결
갠지스 강변에는 특히 목욕하고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그들에게 종교적인 모습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현대성이 옅보였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인도 특유의 많은 관습들이 머지않아서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느낌으로는 매스컴이 떠들어대는 그런 꽉 짜인 인습에서 벗어나 느슨해져 가고 있는 인도의 힌두 신앙을 대면하는 인상이 짙었다. 나는 50-100년 안으로 상당수의 인도인들이 카스트 제도에서 해방되리라고 추측한다.
한국땅이 그러했다. 양반, 상놈, 평민, 천민이라는 카스트 제도가 이 땅을 뒤덮고 불교는 그 제도권에 편승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추구하기에 골몰할 때 이 땅에 비취는 빛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그것이다. 복음은 100년의 시간 동안에 이 땅의 많은 부분을 변화 시켰다. 한국의 오늘은 복음의 광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현실은 우상숭배와 음란과 사치와 방종으로 얼룩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되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다. 사망의 문화가 한국땅을 뒤덮고 있는데도 잠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인도땅이 영적 무지로 죽어가고 있다면 한민족은 영적 타락으로 죽어가고 있다.
기독교는 민족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정작 오늘의 현실은 민족 스피릿을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조롱받고 손가락질 당하고 있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무기력한 모습의 기독교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는 것은 민족의 국운이 걸린 문제일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의 현실이 미래의 조국의 현실임을 자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낮선 땅 낮선 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하나님은 다음 세대를 책임질 누군가를 찾고 계신다.
분명 새로운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나는 인도 땅에서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망해 본다. 기독교가 단순히 생존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미래의 희망이 없다. 기독교가 문화 변혁의 힘을 가지고 이 세대를 정화해 나가지 않는 한 민족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재만을 본다. 그러나 미래는 보이지 않는 현재를 볼 때 자세히 보인다. 그 보이지 않는 현재는 민족의 스피릿이다. 다가오는 세대는 이 세대의 각종 쓰레기 문화에 병들지 않아야 한다. 성경의 그말씀이 전하는 스피릿이 살아 역동하는 공동체나 민족은 역사의 무대에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땅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갠지스 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나는 희망한다. 이 땅이 변하리라.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한민족 스피릿이 복음의 역사로 인해 새롭게 되리라.
가트
가트를 따라서 이동하면서 시바신에게 절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본다. 현란한 음악 가운데 사제들이 그들이 믿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오렌지 색상의 수도승들이 의식을 거행하고 숱한 인파가 구경을 하거나 의식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의 축제가 진정 천상의 축제로 바뀔날이 올 것인가?
21세기는 가치전쟁의 시대이다. 서구인들은 우상문화일지라도 그들의 정신적 공허함과 절망을 메꾸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아시안인들 가운데 이곳을 가장 많이 찾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 그들의 마음의 공백을 메구기 위해 이곳 갠지스를 찾고 캘커타 죽음의 집에서 오랜 봉사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결국 깊이 들어가보면 가치전쟁이 인생전반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고자 몸부림을 친다. 그들은 이국땅에서 구루가 되고 험난한 여행길을 마다하지 않고 객이 되어 순례의 길을 걷는다. 가치를 찾아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인생은 가치 전쟁터이다. 내가 가지고 사는 그 가치가 나의 미래를 형성한다. 내가 헌신하는 가치에 따라 내 인생이 건축 되어진다. 결국 가치야말로 인생의 청사진인 셈이다. 무가치한 시간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조정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진정한 가치를 향한 순례를 멈추지 않는다.
새벽묵상
새벽녘에 잠이 깨었다. 너무 추웠다. 선풍기나 에어콘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너무나 강한 에어콘 바람에 힘들었다. 모두들 자고 있는 시간이였지만 창 사이로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면서 새벽 묵상을 하였다. 비 흐림 맑음이 반복되고 있다. 창가를 바라보면서 묵상하는 시간에 하나님은 나에게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영화를 보듯이 보여 주었다. 지나간 시간들의 기쁨, 슬픔, 즐거움, 아픔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하나님은 나를 미리 아시고 내 삶의 순간 순간마다 간섭하고 계셨다.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엮여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기차길 인생길
기차길을 따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남자들은 어디서든 볼 일을 본다. 그냥 자리에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거의 다 볼 일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철로변이나 철로 위에 걸터앉아서도 볼 일을 보고 잇다. 나와 눈이 마주쳐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들이다. 나만 민망해하며 황급히 눈길을 돌리곤 했다. 기차역은 어디에서든지 세면하는 사람들과 목욕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어디에서든지 자리를 펴고 누워자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흙탕물에서는 소가 뒹굴고 개들이 뛰논다. 심지어 돼지가 음식물을 찾아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고 아이들도 곁에서 함께 뭔가를 찾고 있다. 흙탕물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고 한쪽에서는 여인들이 옷을 빨고 있다.
인도에서 느끼는 것은 기차길은 인생길이다. 길을 따라 정말 다양한 삶이 펼쳐지고 있다. 생노병사를 여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빈부귀천이 그대로 드러난다. 인생은 철로를 따라 이어진다. 타는 역이 있고 내리는 역이 있다. 제각각의 모습이지만 그것이 인생이다.
인도 철로변의 단상
인도에는 온갖 쓰레기가 철로변에 가득하다. 인도인들은 철로에다가 모든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듯하다. 그들은 쓰레기든 배설물이든 너무 자연스럽게 버린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그 더러운 곳에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철로변을 따라 걷는 소와 개들이 걷고 있다. 그 광경을 보면서 그냥 웃고 말았다.
인도가 가난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야지대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땅이 정말 비옥하다. 한국의 평야지대는 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이 어디를 가나 보이고 산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보인다해도 언덕배기 정도이다. 그러고보면 상황이나 환경이 빈부귀천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도 땅을 바라보면서 문득 그들의 인생이 그들의 인생관에서 결정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을 믿는 사람들로 자신의 출생때부터 이미 자신의 인생항로가 정해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창조의 공간이 없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바탕에는 창조의 사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도의 각종 문제의 해답은 이 창조의 공간을 회복하는데 있다고 보여진다. 인도 사람들이 인생관에 있어 숙명론적 자세를 거부한다면 생의 놀라운 도약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가진 수용성 자체는 좋다. 그러나 숙명론은 거부 되어야 한다. 수용성은 창조성을 덧붙일때 세상을 변화 시키는 힘을 지닌다.
바라나시
어제밤 8시 30분에 출발한 기차는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바라나시역에 도착하였다. 4시간 30분이 연착되었다. 인도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한다. 바라나시역은 엄청난 인파로 붐비고 있다. 곳곳에서 구걸하는 사람, 누워있는 사람, 구루, 앉아있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바깥으로 나오니 오토릭샤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오토릭샤를 타고 우리가 머물 숙소인 sandhya guest house로 왔다. 서모오는 달리 속도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덥고 텁텁한 공기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캘커타보다 차만 좀 작지 사람, 차, 오토릭샤, 사이클릭샤, 피이플 릭샤, 소, 개, 염소로 거리는 붐빈다. 한마디로 정신없는 세상에 온 느낌이다. 멍한 느낌에서 헤메다가 숙소에 도착하니 생각보다는 시설이 좋다. 몇마리의 벌레와 바퀴가 활보하는 것 외에는 그런데로 만족할 만하다. 이곳에 와서 도마뱀이나 벌레와 많이 친숙해졌나 보다.
브로드웨이
오후 4시 30분이 되어서야 점심겸 저녁을 겸한 식사를 브로드웨이 호텔에서 하였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멍하다못해 띵하다. 어질어질한 느낌이 있어 바깥으로 나와서 찬물에 몇번이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연신 물을 많이 마셔주었다. 더위먹기 일보직전이기에 긴급조취를 나름대로 한 것이다. 치킨과 염소고기와 밥을 먹고나니 한결 나아졌다.
갠지스 강
오후 5시 30분이 넘어서 갠지스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에 도착해보니 물에 소들이 데거리로 들어가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그 곁에는 아이들이 수영을 하고 나이드신 할아버지께서 목욕을 하는 중이다. 배를 타고 강 물결의 흐름을 따라 이동하였다. 강변은 가트로 가득하다. 강을 따라 왕의 무덤격인 궁전형식의 다양한 모양의 가트가 이어진다. 왕들이 죽기전에 이곳에 머물면서 자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고 한다. 이집트의 나일강과 왕의 계곡이 떠올랐다. 아무튼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의 영원한 군림을 원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일치하는듯 하다. 그들의 영원이나 더 좋은 환생을 향한 욕망을 흐르는 강물에 흘러 보낼수는 없었을까. 그들이 믿는 것이 진리라면 그 욕심마저도 버려야 하지 않았을가. 살아서도 가장 높은 카스트로 군림하고 죽어서도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야말겠다는 그 무서운 집착이야말로 그들 자신의 욕망의 투영이 아닌가.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황토빛 물결이 무심하게 갠지스 강을따라 흘러내리고 있다. 다양한 모습의 가트와 궁의 모습이 끝없이 이어진다. 기울어진 궁전의 모습이 보인다. 물에 거의 잠긴 궁전의 모습도 보인다. 쇠퇴한 궁전의 외관은 세월의 흔적만 남긴채 인걸은 간 곳이 없다. 여기저기서 수영하는 사람들과 목욕하는 사람들이 손을 들어 흔들며 웃어준다. 배위의 우리는 모두 심각한 표정들이다. 이들의 모습에 함께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지 못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다. 문득 경직된 모습보다는 차라리 이들에게 자유로운 모습으로 다가가는게 좋치 않을거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강물은 말이 없이 시간의 흐름에 제 몸을 맡기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수많은 무리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늙고 병들어 죽어서 이곳에 뿌려졌다. 세대와 세대를 따라 바톤터치를 계속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과 사의 진실하고도 소박한 진리를 터득하며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어 간다.
저녁 노을처럼
갠지스 강변에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붉은 햇살이 강을 적시고 있다. 배가 시체를 태우고 있는 가트를 지나 간다. 사람을 태우는 냄새가 난다. 3-4구의 시신에는 불길이 마지막 가는 육신의 잔상마저 다 없애려고 맹렬하게 수고중이다. 장작더미 위에서 마지막 길을 장식하고 있는 인도인. 과연 그들 인도인들은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후회가 없을까? 시신은 말이 없다. 조용히 장작더미 위에서 그 흔적마저도 남김없이 사그라들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까운 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기억마저 불태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이 흐른다. 불이 타고 있다. 삶과 죽음을 가까이 느끼는 이곳에서 한동안 말이 없이 침묵이 흐른다. 불타는 시신은 우리에게 조용히 말해준다. "네 인생이 무엇이냐?"
새로운 물결
갠지스 강변에는 특히 목욕하고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그들에게 종교적인 모습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현대성이 옅보였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나 인도 특유의 많은 관습들이 머지않아서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느낌으로는 매스컴이 떠들어대는 그런 꽉 짜인 인습에서 벗어나 느슨해져 가고 있는 인도의 힌두 신앙을 대면하는 인상이 짙었다. 나는 50-100년 안으로 상당수의 인도인들이 카스트 제도에서 해방되리라고 추측한다.
한국땅이 그러했다. 양반, 상놈, 평민, 천민이라는 카스트 제도가 이 땅을 뒤덮고 불교는 그 제도권에 편승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추구하기에 골몰할 때 이 땅에 비취는 빛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그것이다. 복음은 100년의 시간 동안에 이 땅의 많은 부분을 변화 시켰다. 한국의 오늘은 복음의 광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현실은 우상숭배와 음란과 사치와 방종으로 얼룩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되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다. 사망의 문화가 한국땅을 뒤덮고 있는데도 잠든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인도땅이 영적 무지로 죽어가고 있다면 한민족은 영적 타락으로 죽어가고 있다.
기독교는 민족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정작 오늘의 현실은 민족 스피릿을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조롱받고 손가락질 당하고 있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무기력한 모습의 기독교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는 것은 민족의 국운이 걸린 문제일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의 현실이 미래의 조국의 현실임을 자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낮선 땅 낮선 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져 온다. 하나님은 다음 세대를 책임질 누군가를 찾고 계신다.
분명 새로운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나는 인도 땅에서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망해 본다. 기독교가 단순히 생존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미래의 희망이 없다. 기독교가 문화 변혁의 힘을 가지고 이 세대를 정화해 나가지 않는 한 민족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현재만을 본다. 그러나 미래는 보이지 않는 현재를 볼 때 자세히 보인다. 그 보이지 않는 현재는 민족의 스피릿이다. 다가오는 세대는 이 세대의 각종 쓰레기 문화에 병들지 않아야 한다. 성경의 그말씀이 전하는 스피릿이 살아 역동하는 공동체나 민족은 역사의 무대에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땅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갠지스 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나는 희망한다. 이 땅이 변하리라.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한민족 스피릿이 복음의 역사로 인해 새롭게 되리라.
가트
가트를 따라서 이동하면서 시바신에게 절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본다. 현란한 음악 가운데 사제들이 그들이 믿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오렌지 색상의 수도승들이 의식을 거행하고 숱한 인파가 구경을 하거나 의식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의 축제가 진정 천상의 축제로 바뀔날이 올 것인가?
21세기는 가치전쟁의 시대이다. 서구인들은 우상문화일지라도 그들의 정신적 공허함과 절망을 메꾸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아시안인들 가운데 이곳을 가장 많이 찾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 그들의 마음의 공백을 메구기 위해 이곳 갠지스를 찾고 캘커타 죽음의 집에서 오랜 봉사를 하기도 한다고 한다. 결국 깊이 들어가보면 가치전쟁이 인생전반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고자 몸부림을 친다. 그들은 이국땅에서 구루가 되고 험난한 여행길을 마다하지 않고 객이 되어 순례의 길을 걷는다. 가치를 찾아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인생은 가치 전쟁터이다. 내가 가지고 사는 그 가치가 나의 미래를 형성한다. 내가 헌신하는 가치에 따라 내 인생이 건축 되어진다. 결국 가치야말로 인생의 청사진인 셈이다. 무가치한 시간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조정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진정한 가치를 향한 순례를 멈추지 않는다.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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