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땅에서 여행할 때이다. 캘커타에서 바라나시까지 14시간걸리는 기차가 19시간이 걸렸다. 그때 나는 인도의 생생한 현장을 많이 보았다.
새벽에 하나님이 나를 깨우셨다. 묵상을 하고 바깥 세상을 바라보면서 여러 기차역을 지나왔다. 모든 역에는 누워 자는 사람, 목욕하는 사람, 볼일보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기차길을 따라 소가 다니고 개가 다니고 쓰레기가 가득하다.
한 역에서 바로 앞에서 벌거벗은 채 볼 일 보는 청년과 마주쳤다.
헉-----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몹시 민앙하였다.
그런데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볼일을 보고 있다.
그런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하여 경험하였다.
인도여행을 하면서 느낀 인도는 무질서가 주 특징을 이룬다. 그러나 질서가 동시에 있다. 거리는 온통 난장판이다. 길거리에 그대로 쓰러져서 자는 사람이 도처에 있다. 거적데기를 깔고 온가족이 누워있다. 길거리 곳곳에서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앉아있는 사람이 있다. 걷는 사람이 있다. 도로에는 피이플릭샤가 있다. 싸이클릭샤가 있다. 오토릭샤가 있다. 텍시가 있다. 서모가 있다. 자가용이 있다.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게 서로 어우러져 돌아가고 뒤섞여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청년들은 놀이동산에서 펌퍼카를 타는 기분이다. 곡예를 하는 느낌이다라고 말한다.
가정집도 천차만별이다, 에어콘까지 있고 대리석으로 만들고 방마다 화장실이 있는 집이 있는가하면 한 지붕아래에 5집이 있다. 한 방에 1가정이 산다. 방에는 거적데기가 살림살이의 전부인 집도 있다. 거리나 역마다 가는 곳곳마다 소가 활보한다. 개가 활보한다. 사람이 활보한다. 함께 누워있고 함께 움직인다. 거리에는 소똥이 질펀하다 개똥이 나뒹굴고 있다. 사람들의 오줌과 똥 냄새가 진동을 한다. 사람과 파리가 한 몸을 이루는 양 파리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도 쫓지도 않는다. 그냥 함께 있다. 길거리의 음식점의 음식을 사람도 먹고 그 전에 파리떼가 먼저 시식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
인도여행을 하면서 인도사회를 생각해 보았다. 인도는 소수를 위해 다수가 고통 당하는 사회라고 보여진다. 힌두교의 논리에 의해 카스트제도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트제도의 핵심은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자신의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것에 저항해서는 안된다. 결혼도 같은 계층과 거의 이루어진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삶은 태어날때 이미 결정되어진다. 그들에게는 사슬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체념이 습관화되어있다. 고통의 인이 베여 있다. 그들은 말한다. 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안되는 것도 없다. 잘난 사람은 영원히 자손대대로 잘난대로 산다. 못난 사람은 영원히 자손대대로 고통과 수모 가운데 살아간다.
무엇이 이들에게 이런 모습를 만들고 있는가? 나는 그것이 질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질서는 파괴적 질서라고 느껴진다. 소수권력층이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종교논리를 통해 인간 정신을 병들게 하는 보이지 않는 감옥을 인간의 내면세계에 집어넣은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목에 메인 사슬을 당연시 한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신의 법칙에 저항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순환논리에 의해 다음에 태어날 세상에서 더 좋은 계층으로 태어나기를 소망하며 그냥 참고 견디며 산다. 이 모든 것에 저항이 없다. 굴레를 가지고 살면서도 그 굴레가 너무나 익숙해진 삶의 모습들이 나를 슬퍼게 한다.
나는 생각해 본다. 진정한 종교에는 자유함이 있다. 올무가 사라지고 사슬이 끊긴다. 불평등이 사라지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 거짓이 판치는 곳은 어디에나 있다. 거짓의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자신의 탐욕을 채운다. 그들은 종교라는 이름을 빙자한 사기꾼이며 불의의 자식들이요 어둠의 사람들이다. 나는 최근 우리 주변에 점점 정직이 사라지고 거짓의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활개를 치는 것이 염려가 된다.
내가 믿는 기독교는 창조의 질서를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질서에는 자유함이 있다. 창조성이 있다. 모든 인간을 회복 시키는 능력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빙자한 거짓 교사와 거짓 예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 곳곳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상식을 벗어나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곤 한다. 이런 거싯선지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들은 돈을 위하여 종교 행위를 하지만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맹신으로 몰고가며 자신의 친위 세력을 만들어 자신 자신만을 섬기게 만든다. 나는 사람들을 예수 그이름과 복음외에 묶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기를 원한다. 성경은 말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나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이 진리는 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했다. 내 삶의 목적과 목표를 안내하고 이끌어 주었다. 복음의 빛이 나에게 비취었을때 내 안에 새로운 질서가 형성 되기 시작했다. 그 질서는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겸허하게 했으며 나로 하여금 믿음의 사람, 소망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했다. 나는 믿는다. 삶의 질서가 잡힌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방황이 없다. 삶의 질서가 잡힌 사람은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안에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생수의 강은 처음에는 샘에서 시작된다. 작은 샘들은 개천을 이룬다. 다시 개천과 개천이 모여서 강을 이룬다. 이 강은 마침내 큰 물결을 이루고 마침내 큰 파도를 이룬다. 그 영적 파도가 치는 곳마다 정화가 일어난다. 찌꺼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파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내안에는 강력한 정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이 점점 바뀌고 있다. 새로운 트렌드의 미래는 창조적 질서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할 것이다. 컴퓨터를 가지고 작업을 하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예술의 감성이 그 마음에 흐르고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인터넷쇼핑을 하면서도 깊은 묵상이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즉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자신의 밥벌이를 하되 밥벌레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국땅에는 돈벌레인생, 밥벌레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중에 상당수가 정치계, 경제계, 교육계, 문화계, 공무원계에 있어 민족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들은 파괴적 질서를 만들어 간다. 혈연, 지연, 학연이면 통하는 사회는 무너져야 한다. 빽쓰고 돈쓰는 사회는 무너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부정한 사회를 만든다. 부패한 사고를 형성한다. 거짓의 사람을 만든다. 권력의 기생충을 만든다. 돈의 기생충을 만든다. 한국 사회가 지금 위기이자 기회에 봉착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민족을 위한 창조적 질서를 꿈꾼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에겐 특징이 있다. 그것은 삶의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도여행의 작은 결론이다. 나는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민족과 열방의 미래를 위해 창조적 질서를 꿈꾸는 인생을 살고 싶다.
새벽에 하나님이 나를 깨우셨다. 묵상을 하고 바깥 세상을 바라보면서 여러 기차역을 지나왔다. 모든 역에는 누워 자는 사람, 목욕하는 사람, 볼일보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기차길을 따라 소가 다니고 개가 다니고 쓰레기가 가득하다.
한 역에서 바로 앞에서 벌거벗은 채 볼 일 보는 청년과 마주쳤다.
헉-----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몹시 민앙하였다.
그런데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볼일을 보고 있다.
그런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하여 경험하였다.
인도여행을 하면서 느낀 인도는 무질서가 주 특징을 이룬다. 그러나 질서가 동시에 있다. 거리는 온통 난장판이다. 길거리에 그대로 쓰러져서 자는 사람이 도처에 있다. 거적데기를 깔고 온가족이 누워있다. 길거리 곳곳에서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앉아있는 사람이 있다. 걷는 사람이 있다. 도로에는 피이플릭샤가 있다. 싸이클릭샤가 있다. 오토릭샤가 있다. 텍시가 있다. 서모가 있다. 자가용이 있다.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게 서로 어우러져 돌아가고 뒤섞여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청년들은 놀이동산에서 펌퍼카를 타는 기분이다. 곡예를 하는 느낌이다라고 말한다.
가정집도 천차만별이다, 에어콘까지 있고 대리석으로 만들고 방마다 화장실이 있는 집이 있는가하면 한 지붕아래에 5집이 있다. 한 방에 1가정이 산다. 방에는 거적데기가 살림살이의 전부인 집도 있다. 거리나 역마다 가는 곳곳마다 소가 활보한다. 개가 활보한다. 사람이 활보한다. 함께 누워있고 함께 움직인다. 거리에는 소똥이 질펀하다 개똥이 나뒹굴고 있다. 사람들의 오줌과 똥 냄새가 진동을 한다. 사람과 파리가 한 몸을 이루는 양 파리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도 쫓지도 않는다. 그냥 함께 있다. 길거리의 음식점의 음식을 사람도 먹고 그 전에 파리떼가 먼저 시식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
인도여행을 하면서 인도사회를 생각해 보았다. 인도는 소수를 위해 다수가 고통 당하는 사회라고 보여진다. 힌두교의 논리에 의해 카스트제도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카스트제도의 핵심은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자신의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것에 저항해서는 안된다. 결혼도 같은 계층과 거의 이루어진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삶은 태어날때 이미 결정되어진다. 그들에게는 사슬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체념이 습관화되어있다. 고통의 인이 베여 있다. 그들은 말한다. 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안되는 것도 없다. 잘난 사람은 영원히 자손대대로 잘난대로 산다. 못난 사람은 영원히 자손대대로 고통과 수모 가운데 살아간다.
무엇이 이들에게 이런 모습를 만들고 있는가? 나는 그것이 질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질서는 파괴적 질서라고 느껴진다. 소수권력층이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종교논리를 통해 인간 정신을 병들게 하는 보이지 않는 감옥을 인간의 내면세계에 집어넣은 것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목에 메인 사슬을 당연시 한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은 신의 법칙에 저항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순환논리에 의해 다음에 태어날 세상에서 더 좋은 계층으로 태어나기를 소망하며 그냥 참고 견디며 산다. 이 모든 것에 저항이 없다. 굴레를 가지고 살면서도 그 굴레가 너무나 익숙해진 삶의 모습들이 나를 슬퍼게 한다.
나는 생각해 본다. 진정한 종교에는 자유함이 있다. 올무가 사라지고 사슬이 끊긴다. 불평등이 사라지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 거짓이 판치는 곳은 어디에나 있다. 거짓의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자신의 탐욕을 채운다. 그들은 종교라는 이름을 빙자한 사기꾼이며 불의의 자식들이요 어둠의 사람들이다. 나는 최근 우리 주변에 점점 정직이 사라지고 거짓의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활개를 치는 것이 염려가 된다.
내가 믿는 기독교는 창조의 질서를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질서에는 자유함이 있다. 창조성이 있다. 모든 인간을 회복 시키는 능력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빙자한 거짓 교사와 거짓 예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 곳곳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상식을 벗어나 몰상식하고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곤 한다. 이런 거싯선지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들은 돈을 위하여 종교 행위를 하지만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빛 가운데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맹신으로 몰고가며 자신의 친위 세력을 만들어 자신 자신만을 섬기게 만든다. 나는 사람들을 예수 그이름과 복음외에 묶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기를 원한다. 성경은 말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나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이 진리는 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했다. 내 삶의 목적과 목표를 안내하고 이끌어 주었다. 복음의 빛이 나에게 비취었을때 내 안에 새로운 질서가 형성 되기 시작했다. 그 질서는 나를 겸손하게 했고 겸허하게 했으며 나로 하여금 믿음의 사람, 소망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했다. 나는 믿는다. 삶의 질서가 잡힌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방황이 없다. 삶의 질서가 잡힌 사람은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안에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생수의 강은 처음에는 샘에서 시작된다. 작은 샘들은 개천을 이룬다. 다시 개천과 개천이 모여서 강을 이룬다. 이 강은 마침내 큰 물결을 이루고 마침내 큰 파도를 이룬다. 그 영적 파도가 치는 곳마다 정화가 일어난다. 찌꺼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파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내안에는 강력한 정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이 점점 바뀌고 있다. 새로운 트렌드의 미래는 창조적 질서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할 것이다. 컴퓨터를 가지고 작업을 하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예술의 감성이 그 마음에 흐르고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인터넷쇼핑을 하면서도 깊은 묵상이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즉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자신의 밥벌이를 하되 밥벌레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아름다움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국땅에는 돈벌레인생, 밥벌레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중에 상당수가 정치계, 경제계, 교육계, 문화계, 공무원계에 있어 민족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들은 파괴적 질서를 만들어 간다. 혈연, 지연, 학연이면 통하는 사회는 무너져야 한다. 빽쓰고 돈쓰는 사회는 무너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부정한 사회를 만든다. 부패한 사고를 형성한다. 거짓의 사람을 만든다. 권력의 기생충을 만든다. 돈의 기생충을 만든다. 한국 사회가 지금 위기이자 기회에 봉착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민족을 위한 창조적 질서를 꿈꾼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에겐 특징이 있다. 그것은 삶의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도여행의 작은 결론이다. 나는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민족과 열방의 미래를 위해 창조적 질서를 꿈꾸는 인생을 살고 싶다.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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