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에게 들리는 설교, 변화를 추구하는 설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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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면서
성장하는 교회의 공통점은 강단이 힘이 있다는 것이다. 강단에 힘이 있다는 것은 곧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변화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설교’이다. 교인 수평이동과 쏠림현상은 설교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설교에 대해 사람들이 이렇게 비중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설교자는 잘 안다. 때문에 설교는 목회자의 상시적인 고민 그 자체이다. 사람을 만나거나, 책이나 신문을 대하거나, 걸어가거나 심지어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도 설교자는 설교를 생각한다. 한 편의 설교를 끝내고 강단에서 내려오는 순간부터 다음 설교에 대한 부담이 어느새 꽈리를 틀고 앉아 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옆에 사람이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나만의 세계에 몰입해 버릴 때도 있다. 설교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II. 설교의 현 주소 설교는 목회자에게 부여된 가장 큰 의무이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교육, 상담, 심방, 행정, 전도, 봉사, 목양 등 그야말로 전 방위적이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다. 하지만 어떤 부분들은 평신도들에게 그 역할을 분담시킬 수 있다. 하지만 설교는 어떠한가. 아무에게나 이 일을 맡길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설교는 목회자의 가장 본질적인 사역이기에 십자가이긴 하지만 동시에 영광스런 특권이기도 하다. 1.입을 여는 설교자, 귀를 닫는 회중 C. Reid의 「설교학 위기」에서 오늘날 설교자를 현대성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로 앵무새처럼 지껄이는 ‘혼자 기분좋은 농부’라고 꼬집으며, ‘강단은 텅 비어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오늘의 교회에 설교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 설교의 시대는 끝났고 그래서 이제 강단은 과거는 가졌으나, 미래는 없다는 비관적인 말까지 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나의 설교만은 아직 살아 생명력이 있다’는 교만의 핵우산 밑에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강단아래 회중들은 들을 귀를 막아 버리는 심각한 현실이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제 설교자는 냉철하게 왜 나의 설교가 새로운 현실과 맞부딪히게 하는 데 무력하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하는데 부정적이며, 결단과 변화를 가져오는 데 깊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지에 대한 자기성찰이 있어야만 한다. 습관적으로 또는 겁 없이 강단에 올라가 입을 열기에 앞서 무엇 때문에 이러한 설교의 위기적 현상이 도래하고 있는지를 찾아보는 진지한 자세가 먼저 필요하다. 2.설교의 영광은 진정 사라지는 것일까 교회는 설교와 함께 서고 설교와 함께 쓰러진다는 말이 있다. 교회의 생명이 설교와 직결되어 있음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이처럼 ‘설교’는 교회의 영적활력, 그리고 부흥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인바 이는 기독교역사가 증명한다. 에드윈 다간(Edwin C. Dargan)은 그의 명저, 「설교의 역사」(A History of Preaching)에서 설교는 기독교의 중요한 본질적인(essential) 부분이며, 가장 두드러진(distinguished) 특징이고, 가장 독특한 제도라고 했다. 그는 또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교회의 위대한 부흥은 언제나 힘 있는 ‘말씀의 강단’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반대로 교회가 암흑기를 경험한 것도 역시 생명력 없고, 형식적이며 ‘열매 없는 설교’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역사를 생명력있는 설교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며, 주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있게 인도했던 ‘설교영광의 시대'와 강단은 무기력하고, 청중들은 설교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 별다른 기대도 갖지 않게 되었으며 그저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설교로 만연해 있었던 '설교흑암의 시대'로 구분한다. 그렇다. 설교영광의 시대가 있었다. 이때에는 위대한 설교의 거성들이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교회들은 말씀의 풍요를 누렸었다. 말씀의 선포를 위해 생명을 걸었던 그 시대, 말씀은 능력이 있었으며, 교회는 영적 활기가 충천했었다. 그 시대의 모퉁이 모퉁이에는 설교를 위해 몸부림쳤던 위대한 설교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슴속에 불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설교 때문에 살고 죽은 자들’이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가히 생명이라도 내놓을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설교와 깊은 로맨스에 빠져 있었다. 반면 설교 암흑기에는 무기력한 설교자들과 형식화되고 열정을 잃어버린 강단이 을씨년스럽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허공을 치는 설교는 성도들의 삶에 특별한 의미가 되지 못하였으며, 설교가 가지는 예언적, 치유적, 교육적인 기능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서 점점 그 감화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 시대에, 교회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복음 아닌 것이 교회를 지배했었고, 혹 교회가 많은 재산과 함께 물질적, 외적으로 비대하고 부요했을지 모르지만 말씀의 능력은 상실한 영적 빈털터리 시대였다. 3. 설교위기의 두 요인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는 어떻게 진단할 수 있을까. 설교영광시대를 뒤로하고, 설교암흑기에 접어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최근 한국개신교의 숫자가 줄어들고, 그 성장세가 가톨릭은 물론 불교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설교’ 때문이요, 설교를 감당하고 있는 ‘목사’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만약 설교 암흑기에 진입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두 부분 즉, 그것은 강단아래의 요인과 강단위의 요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먼저, 강단 아래 즉 회중이 설교위기의 한 축이 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 물결이 일어났던 6~70년대 이후 , 8~90년대를 거치면서 관심사와 취향, 즐거움(entertainment)을 따라 행동하는 세대로 바뀌었다. 이런 회중들은 무조건적으로 강요하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권위적인 스타일, 직선적이고 신학적인 메시지보다는 자신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해 주는 메시지를 원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을 깊게 고뇌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쪽 보다는 표피적인 그 무엇을 더 선호하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여기에 영상매체들을 발달로 얼마든지 설교를 접할 수 있는 그야말로 ‘설교홍수’를 경험하고 있다. 때문에 설교 특히 자기교회 목사의 설교에 목을 매달지 않는다. 그저 예배순서의 한 부분, ‘또 지루한 시간이 시작되구나’하면서, 설교를 대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바로 이런 회중이 설교위기의 한 축이 되고 있는 것이다. (2)그럴지라도, 설교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강단위에서 찾아야 한다. 지난 날, 소위 설교영광의 시대에 교회는 설교를 통하여 교회의 부흥을 이루었고, 국가적인 위기의 때에 민족정신을 계도하고 교화했으며, 위로와 각성을 함께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설교자에게 귀를 기울였으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부복하는 말씀의 종교로서 그 자리를 잡아갔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높이 예우되었으며, 설교의 소리(voice of preaching)는 능히 잠자던 심령들을 깨우기에 넉넉했다. 그래서 스펄젼(C.H. Spurgeon)의 언급대로, 설교자에게 거룩한 기름 부으심(the sacred anointing)과 신적인 권능(the divine power)이 있었다. 오늘날도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 a.바쁘고 분주한 목사들 이런 저런 일들이 목사를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그야말로 전 방위적으로 뛰어야만 하는 게 목사다. 여기에 목사 스스로도 자신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우후죽순처럼 개최되는 이런 저런 세미나, 훈련, 집회 등에 쉴 새 없이 얼굴을 내민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목회패러다임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두려움이요 몸부림이다. 특히 미디어시대에 다들 너무 나서기를 좋아한다. 이름, 얼굴, 역량을 알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듯 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무릎사이에 머리는 넣는 기도는 언제한단 말인가.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본질인 설교를 놓치고 곁가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설교자가 설교의 목적(why)과 형태(how), 그리고 설교의 내용(what)에 대한 분명한 관점을 정립하지 못한 채 강단에 서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다. b. 목사의 ‘신뢰성’ 개신교 NGO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지난달 일반인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가장 신뢰하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개신교'라고 답한 사람이 18%로 천주교(35.2%), 불교(31.1%)보다 훨씬 적었다. 종교가 없는 사람 가운데 개신교를 가장 신뢰한다는 비율은 7.6%에 불과했다. 개신교만 놓고 "신뢰하느냐"고 물었더니 '신뢰한다' 18.4%, '신뢰하지 않는다'가 48.3%였다. 종교별 호감도도 불교(31.5%) 천주교(29.8%)가 개신교(20.6%)보다 높았다. 설교는 기법이 좋아야 하고, 대중적이며, 또한 흥미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다. 요리된 말씀을 ‘인격’이라는 그릇에 담아 떠 먹여 주는 것이 설교이다. 그런데 설교자의 인격에 이미 금이 가 있다면 천사의 말을 한다할지라도 그 설교가 감화력을 줄 수 없다. 때문에 회중과의 신뢰관계는 아무리 강조하여도 모자람이 없다. 설교의 특성상 설교자는 높은 강단에서 설득하는 자, 메시지를 보내는 자(sender)인 반면에 회중은 설득당하는 자, 메시지를 받는 사람(receiver)이기에 수동적이다. 이렇게 볼 때 설교의 위기는 강단아래에서보다, 강단위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 대안은 없는 것인가? 목사가 본연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길 밖에 없다. 대외적인 활동, 과감히 줄여야 한다. 아니, 주님처럼 자신을 오히려 숨기려는 절제로 ‘말씀’과 ‘기도’에 올 인해야 한다(막3;12).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 후,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약5;17) 베드로와 바울로부터 시작된 이 영광스러운 사역, ‘능력, 힘, 기적’ 그 자체였던 설교사역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시대 최고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가 그의 책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에서 “설교는 교회의 기본적인 임무이며, 특히 목사의 기본적인 직무이다. 그리고 설교는 교회의 고유한 직무이다”라고 한 충고를 기억해야 한다. 목회자는 설교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모든 목회자들이 주님처럼 사역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설교의 영광을 회복해야만 한다. 4. 세 가지 질문 첫째, 지난 주 설교제목을 성도들이 기억하던가? 둘째,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셋째, 나는 말씀대로 살았던가? 설교의 3요소는 설교자, 청중, 성경이다. 그런데 설교의 특성상 설교의 주체는 설교자다. 설교자가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가? 그 설교자가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 설교자가 청중을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설교의 승패를 결정짓는다. 결국 ‘들리는 설교’의 키는 설교자가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교의 한 축은 성경이다. 들리는 설교를 위해서는 텍스트에 충실해야 한다. 성경연구에 깊은 내공을 쌓아야 한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하루 14시간씩 성경연구를 했으며, 요한 웨슬레는 하루 적어도 5시간 성경연구에 시간을 바치라고 조언한다. 위대한 설교자 브로두스(J.A. Broadus)는 그의 마지막 강연에서 ‘성경에 능한자가 되라’는 충고를 남겼다. 설교자는 철저한 말씀연구를 통해 신학적체계를 세우며, 올바르게 성경을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성경암송이다. 모슬렘교육의 중심지인 알 아자르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코란 전체(114장, 8만4천개의 단어)를 암송해야만 한다. 그런데 설교자에게 있어서 설교가 우선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고 있다. 한국교회 설교갱신은 철저한 성경연구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청중도 변하고 있다. 다양한 메스메디어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기에 일방적인 언어 전달은 효용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런 자들을 1시간 이상 앉혀 놓는다는 것은 고문에 가깝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단에서 내려와 회중석에 자주 앉을 필요가 있다. 명지휘자 구스타브 뮐러는 단원들에게 1년에 적어도 두 번은 방청석에 앉아 연주를 들어보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청중이 누구냐에 따라 주제설교, 강해설교, 귀납적설교,이야기 설교, 이미지 설교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 청중의 귀에 들리는 설교 (1) 훌륭한 설교자의 설교를 모방하라. “저는 제 아내보다 더 따뜻한 여인의 가슴을 경험했다” 설교요약, 테이프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 (2) 당면한 주요 관심사에 대해 터치하라. 제이 아담스(Jay Adams)“설교란 성경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회중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때문에 현실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어떤 조류가 들어오는지, 성도들의 삶의 정황은 어떠한지 감지해야 한다. 설교자가 세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통로는 독서다. 찰스 스펄젼(C. Spurgeon)은 배우기를 중지하는 자는 가르치기를 중지하는 자다. 서재에서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강단에서 아무것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영국의 신학자 존 스토트(J. Ssott)는 설교를 교회와 불신자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때문에 그는 연극, 영화 관람, 독서클럽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전문가의 자문을 받기도 했다. (3) 논리가 정연한 설교이어야 한다. 메시지를 명료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난해한 논증이나 복잡한 문장은 금물이다. 간결하고 쉬운 요점과 타당한 예화가 사용되어야 한다. 여러 가지 주제를 나열하기 보다는 하나의 주제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한국에 왔을 때 사람들은 멀리서 왔으니 오랫동안 설교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 15분 설교하고 강단에서 내려왔다. 그는 단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짧게 설교했던 것이다. (4) 청중들을 향하여 질문을 던져라 설교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다. 일방적인 강연이 아니라 설교자와 회중사이에 일어나는 의사소통이다. 그러므로 성경속으로 함께 들어가서 함께 고민하고, 풀고, 찾고, 감탄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질문’이다. 효과적인 질문은 산 정상에서 돌멩이를 굴리는 것과 같다. 나중에는 우레소리가 날 것이다. (5) 청중들과의 눈 맞춤이 대단히 중요하다. 단순한 눈맞춤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비언어적 요소도 포함된다. 몸짓, 음성, 억양, 동작, 얼굴표정 등이 다 눈맞춤, 즉 커뮤니케이선이다. 알버트 메라비언(A. Mehrabian)은 ‘말없는 메시지’란 책에서 말보다는 언어적 수단이 더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통로라고 역설하고 있다. 감정을 전달할 경우 말은 7%, 억양은 38%, 얼굴표정은 55%를 전달해 준다고 한다. (6) 내가 경험한 생활 속의 예화를 사용하라. 바울의 예를 보라.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이야기를 가는 곳 마다 전한다. 지식적이며, 철학적인 어떤 예들도 들지 않는다. 자신이 친히 경험했던 내용들이 가장 호소력이 크다. 지방사투리도 활용하는 것이 좋다. 유머들도 눈맞춤에 중요한 요소다. (7) 청중들이 자신의 삶속에 적용을 할 수 있도록 하라 들리는 설교는 컨텍스트(context)를 해석해 준다. 회중들의 삶의 자리와 시대적 상황을 설교를 통해 해석해 준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적 문제를 주제로 하는 것을 기피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8) 설교자가 먼저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한다. (9) 음향시스템도 대단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10)성령세례를 받은 설교자가 되라 베드로(행4:8), 스데반(행6:3,5,8,10,7:55), 바울(행22:22-23) 6. 목회자와 성령세례 (1) 당신은 성령세례를 받았는가? 행19:1-7절의 말씀은 목회자인 우리에게 대단히 도전적인 말씀이다. 어떤 내용인가? 여기 ‘너희’는 누구인가? ‘믿는 사람’(2), ‘제자들’(1)이다. 당시 제자란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제자란 용어가 신약에 약 250회 정도 나온다. 물론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이 단어를 똑같은 의미로 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에게나 ‘제자’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들은 지도자급들이었다. 그래서 숫자가 적다(행19:7). 이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 성령이 있음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기 ‘성령’은 도대체 어떤 성령인가? 이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는 말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중생’케 하시는 성령을 받지 못했느냐는 질문은 아니다(고전12:3, 롬8:9) 때문에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세례’란 용어가 계속 반복하여 나타난다. 즉 ‘성령세례’를 받았느냐는 질문이다. 성령으로 중생함을 받은 자들이 받아야 할 성령이 있으니 곧 성령세례다. 이것을 저들은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확인한다. 첫째, 믿기는 하지만 성령세례를 받지 못할 수 있다. 둘째,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믿음의 공동체가 있을 수 있다.\ 셋째, 특히 목회자이면서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사역할 수도 있다(행18:24-28, 고전3:4-6) (2)주님의 간절한 소원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너희’는 누구인가? 이미 예수믿고 있는 자들이다. 아니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저들이 예수 믿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다(고전12:3). 그렇다면 성령은 이미 저들 가운데 계신다. 그런데 주님은 저들에게 ‘성령으로의 세례’를 기다려서 꼭 받아야 한다고 당부하신다. 성령세례가 있다는 말씀이다. 결국 성도들의 귀에 들리는 설교는 성령세례받은자가 외치는 메시지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이다. 이를 위해 ‘성령세례’에 사역자들이 집중해야 한다.(행2:37-38,7:54-55, 22:23-24, 2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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