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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재발견―⑤러시아 우수리스크] ‘슬픈 역사’ 품고 힘겨운 삶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09. 1. 1. 12:07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재발견―⑤러시아 우수리스크] ‘슬픈 역사’ 품고 힘겨운 삶

[2008.12.30 17:50]      


러시아 시베리아 동해 연안 지방인 프리몰스키주(연해주) 우수리스크의 겨울은 혹독하다. 두터운 모자와 장갑을 꼈지만 두통이 생길 정도의 추위다. 노인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부쩍 잦아지는 것도 이맘 때라고 한다. 두 번밖에 내리지 않았다는 눈은 길바닥을 온통 빙판으로 만들어놨다. 평균기온 영하 20도에 찬바람까지 더해 사람들의 마음마저 꽁꽁 얼어붙게 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들의 생활상은 이 서글픈 날씨를 그대로 닮았다.

◇강제이주와 유랑의 연속,밑바닥을 사는 고려인들=연해주에 속해 있는 우스리스크는 인구 20만여명의 시골 도시다. 설탕 신발공장 등 주력이 굴뚝산업이다. 이곳엔 연해주 전체 고려인 3만명 중 절반이 넘는 1만6000여명이 살고 있다. 인구 10명당 1명이 고려인인 셈이다. 대부분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한인들의 자손으로 러시아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90년대부터 연해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스리스크는 부모들의 고향이었을 뿐, 이들은 이방인으로 떼밀린 채 밑바닥 삶을 살아가고 있다.

동북아평화재단의 직원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최까짜(59)씨는 98년 우즈베키스탄에서 건너왔다. 비행기 조종사였던 남편 덕에 최씨는 집을 몇 채씩 가졌을 정도로 잘살았다. 하지만 90년대 초 우즈베키스탄이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돈은 휴지조각이 됐다. 7세 된 딸과 함께 우수리스크로 돌아온 최씨는 돈도, 집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였다. 지난 10년간 최씨는 2차대전 당시 러시아군의 막사와 공사가 채 덜 끝난 교회 예배당, 그리고 동북아평화재단이 마련한 임시 거처에서 지냈다. 최씨는 집주인에게 매월 5000루블(약 25만원)씩 지불하고 있다.

우스리스크 북쪽 순얏센에 살고 있는 최씨를 찾았을 때 한 아주머니가 황급히 도로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아들이 시장통에서 경찰에 붙들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급하게 시내로 향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한달 전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살고 있었다. 최씨는 "지난 10년간 벌레처럼 살았다"며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산다"고 말했다.

◇"물,빵도 못 먹어 죽어 나간 사람이 부지기수"=30년대 연해주와 만주를 중심으로 고려인들이 일제에 항거하면서 세력화되자 러시아정부는 고려인들의 강제이주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강제이주는 37년 10월 우수리스크의 라즈돌로니에역을 시작으로 1년간에 걸쳐 진행됐다. 4년전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해온 최가브리엘(52)씨는 부모님으로부터 전해들은 말이라며 강제이주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는 집도 없고 그냥 들판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땅을 파고 갈대를 엮어서 덮고 겨울을 났습니다. 겨울 내내 옆 도시에서 물과 빵을 동냥해서 먹었는데, 그것도 못 먹어서 죽어 나간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러시아 사회주의 붕괴 이후 독립국가들이 민족주의 정책을 강화하면서 고려인들은 삶의 기반을 잃고 말았다. 이들이 우수리스크로 몰리는 이유는 이곳이 중국과 접경지역으로서 상업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현재 연해주에서 제일 큰 도소매시장이 이곳에 있다. 아직 자본주의에 익숙지 않았던 러시아인들에게 고려인들은 상업을 돌파구로 삼았던 것이다.

94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황꼬쓰짜(60)씨도 중국 시장에서 물건을 떼다가 차로 2시간 거리의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다 팔았다. 하루에 수천달러를 번 적도 있을 정도로 이곳에서의 장사는 곧 성공을 의미했다.

하지만 최근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 지난 90년대 후반에 이어 다시 한번 러시아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고려인들의 삶이 더 고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가브리엘씨는 "경제위기를 맞아 다른 나라는 씀씀이를 줄이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언제든 화폐개혁이 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돈을 모아두기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는 97년 1000대 1의 비율로 화폐개혁을 단행한 바 있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이듬해 모라토리엄(지급유예)을 선언해야 했다.

◇경제위기로 또다시 유랑의 길=러시아에서 직장 구하기가 어려워진 사람들은 한국 등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 사정도 어렵다 보니 이마저도 쉽지 않다. 틈틈이 관광객 운송이나 짐차 운전으로 돈을 벌고 있는 황씨는 최근 몇 년간 한국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다. 막노동이라도 해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비자가 3개월밖에 안 되는 데다 일감도 없어 결국 한국 정착을 포기했다. 대신 같이 간 황씨의 딸은 현재 안성의 한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황씨는 "요즘엔 고려인들에게 3년짜리 비자가 나온다고 들었다"며 "하지만 일자리도 없는데 가봤자 소용없지 않냐"고 말했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는 내년부터 고려인 대상 장학사업과 방과후 공부방을 운영할 예정이다. 기아대책기구 파송 선교사로 우수리스크 소망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송해용(37) 선교사는 "고려인 중에서는 의료나 복지혜택을 전혀 못 받고 사는 경우가 많다"며 "그들의 고통을 누군가는 보듬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수리스크=글·사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재발견―⑤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 수난 산증인 현 바실리씨

[2008.12.30 17:50]      


"중앙아시아로 짐승처럼 끌려가면서 숱한 사람들이 죽었어. 처음엔 시금치나 산에서 나는 풀을 먹고 살다가 그래도 고려인들이 워낙 근면하니까 벼농사를 하면서 나중엔 먹고 살기 괜찮았어. 그러다 소련이 바사(무너)지면서 살기 바쁘게(힘들게) 됐지."

현바실리(73)씨는 지난 94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우수리스크로 이주해 왔다. 아파트와 단독 주택을 한 채씩 가졌을 만큼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부자의 대열에 속한다. 하지만 구소련의 붕괴는 직장 해고라는 직격탄이 돼서 현씨를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로 내몰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정규대학까지 나온 현씨는 고려인으로서는 드물게 중앙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의 군수공장에서 어뢰 만드는 기술자로 근무했다. 우즈베키스탄의 민족주의마저 대두되면서 온 가족이 연해주로 가자는 데 뜻을 모았던 것이다.

현씨는 우즈베키스탄의 악랄한 민족주의에 대해 "구소련 붕괴 직전 우즈벡인들 사이에서는 '이제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면 고려인들 것은 다 우리 것이 된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고 증언했다. 결국 소문대로 우즈베키스탄 당국은 구소련 붕괴와 함께 러시아어 사용 금지, 화폐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고려인들의 삶의 기반을 하루아침에 뺏어버린 것이다. 현씨는 2년만 더 있으면 연금을 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58세에 그의 조국 우즈베키스탄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우수리스크로 이주해 온 현씨 역시 다른 고려인들과 상황이 나을 바 없었다. 오두막 같은 집에서 장사로 연명했던 것이다. 현씨는 "TV에서나 나올 법한 다 쓰러진 오두막에서 살아야 했다"며 "장사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함경북도 길주가 고향인 그의 부모는 1975년과 83년에 우즈베키스탄에 각각 묻혔다. 현씨는 요즘 국경을 드나드는 중국 상인들의 짐을 나르는 일을 틈틈이 하고 있다. 한번 짐을 날라다주면 500루블(2만5000원), 1박2일 동안 국경지역에서 열심히 해봤자 1500루블(7만5000원) 받는 게 고작이다.

"우수리스크 오고나서 부모님 산소를 한번도 못가봤어요. 내년 한식 때는 꼭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6000㎞에 달하는 우즈베키스탄까지의 왕복 기차비는 4만여 루블(약 200만원). 원래 올 봄에 가려다가 돈이 부족해 미뤘던 것이다. "내년 한식 때는 꼭 갈 수 있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현씨는 길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우수리스크=김성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