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인 사회봉사를 통한 전도
무학교회 이상갑목사
세상에 희망을 주는 성경적 본질이 살아 숨 쉬는 청년 공동체를 만들라.
10년 전에 청년사역을 시작하면서 주목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이 서서히 증가해 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교회와 또 청년대학부가 제자훈련이나 전도와 선교에는 집중하고 중요시하였지만 유독 한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연약하고 소외된 세상을 향한 기독 청년들의 섬김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이다. 청년대학부나 선교 단체에서 성경적 지식을 열심히 배워서 머리는 커지는데 말씀을 배운 이후에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개인의 은혜 속에만 머물고 사회적 책임으로 나아가는 거룩한 산제물의 일상의 예배가 보이질 않았다.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영적으로 병들게 하는 것이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기에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대안으로서 성경적 섬김과 봉사를 주목하였다. 필자가 섬기는 청년대학부도 당시에는 정기적인 사호 봉사가 전무 하였다. 그래서 세상을 향한 정기적인 봉사와 섬김이 부족함을 인식하면서 구체적으로 결심한 것이 있었다. 너무 크게 시작하지는 않으나 1년에 1가지씩 복음으로 깨우고 말씀으로 양육 훈련한 청년들에게 세상의 소금으로 녹아 들어가고 세상의 빛으로 어두움이 있는 곳을 밝히는 거룩한 씨름을 하게하는 섬김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크고 거창하지는 않지만 작고 사소한 섬김에서부터 세상을 향한 섬김을 시작 하였다.
최근 몇 년간 기독교의 위상은 계속 추락하고 있다. 더구나 불신자들과 안티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모독하고 비판하는 현실을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 청년들이 움추리고 당당하게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청년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기를 꺼려한다면 한국교회와 청년대학부의 미래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연일 계속되는 기독교계의 기사 내용에는 긍정적인 내용보다는 부정적인 것이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많다. 계속해서 성문제, 돈 문제, 권력의 문제로 기독교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면서 마치 기독교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이 지성적인 사람처럼 여겨지는 기이한 일들이 이 땅에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사를 내보내면 숱한 안티기독교인들의 악플까지 달리는 현실이 참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 대해 한국교회와 청년대학부 지도자와 청년들이 세상을 향해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은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필자가 그러했듯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본질로 돌아가기에 좋은 때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미래는 지금 깨어서 성경적 본질이 살아 숨 쉬는 청년 공동체를 만들어 가느냐 못 만드느냐의 싸움이 아닐까 한다. 청년사역자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공동체를 만드는 이 씨름에서 승리하여야 한국교회의 미래가 있음을 꼭 기억 했으면 한다.
섬김과 봉사를 교회의 크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필자가 창조적인 사회봉사를 통한 전도에 대해 나누기 전에 먼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많은 경우에 봉사나 섬김을 교회가 크고 물질적으로 넉넉하니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섬김과 봉사는 교회의 크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크기가 결정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 했으면 한다.
필자의 경우에는 120명 모이는 교회에서 성장하였는데 그때 청년대학부에서 비록 소수가 모였지만 한 장애우 시설을 방문하여 도배를 하고 집 수리에 동참하고 하우스를 설치하기도 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장애우사역에 동참을 하고 또 사회 참여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용돈을 모아서 1년에 2-4회 학교에 있는 외국(아프리카와 아시아 들의 제3세계)에서 유학 온 외국인 학생들을 초대하여 섬긴 적이 있다. 크고 거창한 섬김은 아니다. 함께 밥 먹고 박물관이나 공원이나 인사동 찻집에 들려서 함께 차를 마시고 나누고 사진을 찍어서 격려의 엽서와 함께 그들에게 선물을 해주는 시간을 3년 동안 가지곤 했다. 15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각자의 날의 교회 지도자들로 살아간다. 그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힘들었던 시절이지만 용돈을 매월 모아서 섬겼던 식탁교제의 섬김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육원 사역도 마찬가지다. 대학교 1학년 때 시작한 보육원 섬김이 21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한 보육원을 계속 섬기고 있다. 그 사이에 원장님은 3번 바뀌었고 숱한 선생님들과 사회복지사들이 바뀌었다. 21년을 계속해서 섬기다 보니 아이들이 100일에 들어와서 기고 앉고 일어서고 걸음마를 시작하고 걷고 뛰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가는 것을 지켜보는 기쁨을 누린다. 1주 전에도 봉사자 후원자의 날이어서 청년들과 함께 17명이 다녀왔는데 100일도 되지 않은 갓난 아이 였을 때 들어 온 아이가 이젠 유치원을 다니는 것을 보면서 21년간 변함없이 함께 지나 온 삶의 흔적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보육원의 경우에는 이제까지 3번의 사역지를 옮길 때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동행을 해 왔다. 어린이 사역을 할 때는 어린이 부서 교사 중심으로 아이들을 서울랜드로 초대하여 섬겼다. 청소년 사역을 할 때는 설날 용돈을 보육원의 아이들을 위해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청년대학부를 하면서는 물질로, 몸으로, 기도로, 초대로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 동역을 하고 있다. 결국 봉사와 섬김이란 마음의 문제이지 교회의 크기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봉사에 동참하고자 하는 섬김의 마음만 있으면 문은 활짝 열려져 있다. 상황과 환경과 여건을 탓하지 말고 세상을 품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의 밭을 먼저 잘 기영한다면 누구나 창조적으로 봉사와 섬김을 감당하고 그 섬김을 통해 창의적인 전도의 길이 열려질 것이라 생각한다.
초대교회에서 배우라.
초대교회는 지금보다 더욱 배타적인 상황 속에서 탄생 하였다. 황제의 논리가 지배하였고 힘의 논리 앞에서 숱한 사람들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순응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거슬리는 진정한 힘을 지녔었다. 그들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사랑의 논리와 섬김의 논리로 시대적 상황에 대항 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그들도 십자가를 통과하여 종의 도를 실천함으로 침묵 가운데서도 행동하는 믿음으로 그들의 시대에 읽혀지고 들려졌다. 동성애가 만연하고 혼음이 가득하고 도덕적 기준이 무너진 시대에 시대 양심으로 척도가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 이었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초월성이 그 안에 있었고 동시에 세상과의 친밀함이 있었다.
성령의 공동체였던 초대교회는 누가 봐도 거룩한 구별됨이 있었다. 거룩한 구별됨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과 타협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빛과 소금이 되었으며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생활양식으로 그 시대의 지독한 이기주의적이고 정욕적인 생활 방식들에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고 섬겼다. 이것은 세상과의 혼합도 아니고 단절도 아니고 구별됨으로 세상을 품고 섬기는 생활 방식이었던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거룩한 충격을 주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공동체가 아닌 세상과 분리되거나 동화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최근 한국교회는 다음 세대를 세우는 교회를 모토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모토나 슬로건으로 해결되어지지 않는다. 치열한 자기 반성을 통해 다음 세대가 구별된 아름다움을 지닌 세대로 성장하고 성숙해 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과제는 신앙의 유산을 계승하고 상속함으로 이 시대의 세속화의 물결에 무너진 영적인 성벽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보기에 칭찬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필자는 교회의 최우선 순위는 복음전도에 있다고 본다. 동시에 진정한 복음전도는 복음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품고 세상을 섬기며 세상을 변화 시키는 하나님의 동역자들로 살아가도록 양육하고 훈련해야한다고 믿는다. 수직적인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는 예배자들을 세상 속에로 파송하는 힘이 있어 그들로 수평적인 예배를 드리게 한다. 참된 예배는 교회 속에만 머무는 예배자가 아니라 그들의 삶터에서 일상의 예배자요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가도록 한다. 그것이 초대교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 창의적인 사회 봉사를 통한 전도의 팁: 봉사와 섬김이 전도와 무슨 상관성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직접적인 전도는 아니지만 봉사와 섬김은 간접적인 전도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현대인에게 이미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어떠한가 하는 것이 교회를 다닐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추락한 교회의 신뢰성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봉사와 섬김은 중요한 토양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을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
세상을 품고 세상을 섬기며 세상을 변화 시키는 작은 예수로 살라. (무학교회의 예)
무학교회 청년 대학부는 7년 전부터 매년 동일한 주제와 표어를 가지고 있다. "세상을 품고 세상을 섬기며 세상을 변화 시키는 작은 예수들" 이것이 무학교회 청년대학부의 정체성이고 자화상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보여주고 우리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7년간 더딜지라도 변함없이 진행한 것이 있다면 교회와의 유기체적인 연결을 통한 섬김과 세상과의 유기체적인 연결을 통한 섬김의 두 축일 것이다.
무학교회 청년사역부는 교회와의 유기체적인 연결을 위해 교사, 성가대, 주차봉사를 비롯하여 곳곳에 헌신하고 있다. 특히 주일에는 1000-2000명이 식사하는 설걷이를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섬기고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주방의 귀퉁이에서 소리 없이 열심을 다해서 섬기는 무명의 숱한 청년 헌신자들을 볼 때마다 고맙고 이러한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변함없이 섬기는 청년들을 볼 때마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세상과의 유기체적인 연결을 위해서는 보육원(구 고아원)사역, 장애우 시설 섬김, 노인 요양원 섬김, 외국인 근로자 섬김을 매월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은 자비량 사역으로 자원 봉사자들이 스스로 회비를 내고 시간을 내어 봉사에 참여하고 있다. 교회의 재정적 지원이 없이도 봉사는 가능하고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 몸과 물질적 헌신이 함께 가기도 하지만 꼭 직접 가서 섬기지는 못해도 간접적인 방법이 있다. 무학 교회 청년들의 경우는 상당수가 국제기아대책, 굿피이플, 행동하는 양심, 월드비전, 컴패션과 같은 국제적인 구호 단체나 국내 자선 단체를 통해 정기적인 비정기적인 섬김에 동참하고 있다.
비정기적으로는 사회의 고통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든지 보내든지 하는 섬김이다. 스촨성 지진때는 일일 찻집을 해서 섬김 헌금을 보내고, 일본 쓰나미와 지진 때에도 성금을 모아서 일본인 교회로 전달해서 직접 섬기도록 후원을 하고, 서해안 태안반도기름 유출 사건 때는 직접 3회에 걸쳐서 현장으로 달려가서 기름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였고, 강원도 홍수때에도 현장으로 달려가서 비정기적이지만 최선의 섬김을 감당 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랑의 집짓기 운동인 헤비타드 운동에 동참하여 강원도와 충청도 지역으로 달려가서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에게 집을 지어주는 일에 헌신을 하고 사랑의 연탄 배달에 동참하여 추운 겨울을 따듯하게 보내도록 하는데 보탬이 되기도 하였다. 헌혈을 하는데 동참하여 100여명이 넘게 동참하여 피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동족인 북한을 품고 섬기면서 북한의 수해가 난 지역에 내복과 겨울옷과 각 종 옷을 500만원어치 가량 사서 보내고 또 집안의 좋은 옷들 가운데 아낌없이 주는 마음으로 잘 빨도 다림질을 해서 북한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청년들의 아름다운 헌신들이 모이고 모여 사도행전의 한 페이지를 읽는 느낌이었다. 어떤 청년은 자신의 월급을 내어 놓았고, 어떤 청년은 자신의 병원비를 환급 받은 것을 주께 드렸고, 어떤 청년은 자신의 셀에서 재정을 모아서 내복을 사 왔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 여러 지체들이 싸고 품질이 좋은 옷을 구입하기 위해서 바자회로 동대문 시장으로 이마트로 두루 돌아다니면서 다리품을 팔아서 결국은 아주 풍성한 섬김을 감당 할 수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컴패션썬데이를 진행 하였다. 컴패션데이에는 750여명이 참여하였고 100여명이 결연과 후원을 신청하였다. 정기적인 후원이 어려운 경우에는 컴패션 밴드 앨범을 사주거나 중보기도로 섬김에 동참을 하였다. 감사하게도 청년들은 감격하고 감동을 하면서 사랑과 섬김에 동참한 것을 행복해 하였다. 결연을 하게 되면 매월 45000원씩 15년간을 후원해야 하는데도 1명으로는 부족해서 2명까지도 결연을 신청하기도 했다. 청년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라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게 된 좋은 시간이었다. 특히 컴패션데이를 진행하고 난 이후에 청년들의 격려와 감사가 참으로 많았다. 청년들의 마음속에는 교회가 소금과 빛으로서 어떠해야 한다는 나침반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청년들의 소리를 경청하면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영적으로 건강한 자화상이 회복되는 것을 경험 하게 되었던 의미 있고 좋은 시간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것이기에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편지로 읽히고 향기로 퍼지는 것이라 생각 된다.
* 창의적인 봉사를 통한 전도의 팁: 전도를 플랭카드를 걸고 대규묘로 물량공세를 하고 EH 구호를 외치면서 하지 않아도 청년대학부 공동체가 의미 있고 건강한 사역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진다면 청년들은 자신들이 출석하는 청년 대학부에 대한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되고 자연스럽게 주위에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구도자들인 친구나 선후배들을 교회 공동체로 초대하게 된다. 세상이 기독교를 아무리 비판해도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는 한 건강한 교회는 성장하고 성숙한다고 생각 된다. 교회는 세상과 다투고 싸우고 세상에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순간 맛을 잃은 하얀 돌덩어리로 전락한다. 소금이 맛을 내려고 녹아서 세상 속에 스며들어가고 있다면 세상은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빛이 자신을 빛이라고 외치지 않아도 빛이 비추이는 곳에는 어두움이 밀려나는 것이다. 문제는 빛의 밝기이다. 오늘날 청년대학부는 영적소비자로서 놀고 먹는 배짱이인가 아니면 세상 가운데 파고 들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소금과 빛인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2011년 있었던 학복협 청년대학부 세미나에서 나눈 강의안의 일부(1/3)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자료를 올려 둡니다.
'사역과 삶 > 메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목회, 문화의 옷을 입다. 미래가 숨쉬는 이곳으로 초대합니다. 6월 27-28일 무학교회 (0) | 2011.06.06 |
---|---|
[스크랩] 청년목회로 미래를 열라! ( 64년 전통이 흐르는 무학교회 속의 청년목회 이야기 ) 서울장신 청년목회 강의안 (0) | 2011.05.31 |
[스크랩] 민족과 캠퍼스 그리고 청년의 영적 각성과 회복을 위한 Wake Up에 초대합니다. 이찬수목사님, 고형원선교사님, 부흥한국 (0) | 2011.03.08 |
무학교회 청년대학부 여름 사역 2010 (0) | 2010.08.03 |
2010 러빙유, 청년 전도 축제 (0) | 2010.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