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제 선덕여왕
그 자리에 있기까지 리더십에 대해 깊이 고민할 대목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 자리가 또한 만만치 않은 자리였기에
16년의 재임후에 무덤에 묻히고 말았다.
권력
그 무엇이기에 긴장과 갈등 속에
인생을 ........
경주서 7번 국도로 불국사 쪽으로 가면 왼쪽에 사천왕사지를 만난다. 그 앞의 좁은 길을 감아 올라가면 왼편에 낭산이 있는데, 선덕여왕릉은 그 산 정상에 있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거든 도리천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서 물으니 낭산 남쪽이라고 대답하였다. 신하들은 유언대로 그곳에 장사지냈다. 그 후 능 아래에 사천왕사를 지었는데,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으니 그때서야 신하들은 그녀가 도리천에 묻힌 것을 알았다. 그곳은 궁궐에서 바라다본, 야트막한 산 위의 파란 곳이었다.
선덕여왕은 공주 적에, 언니 천명공주가 오매불망하던 용춘이란 청년을 사모했다. 장차 왕위를 이을 사람으로 그녀가 거론되자, 그녀는 대뜸 왕에게 용춘을 달라고 했다. 당돌했다. 언니에게 갈 용춘과 왕위를 미리 빼앗아두려는 계책이었으리라. 용춘이 공주를 모셨지만 그녀에게 후사가 없자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을 보면, 그는 공주의 연인이 아니라 철저한 신하였던 것 같다.
그녀가 왕위에 오르자 남편과 신하로 찾은 사람은 다시 그 용춘이었다. 이처럼 여왕의 사랑은 절절했지만 용춘의 감정은 한 치도 흔들림이 없었다. 얼마 후 용춘이 기어이 다시 물러나매 여왕의 섭섭함이 얼마나 컸겠는가. 또 그 용춘이 찾아 간 곳이 왜 하필 천명공주의 품이란 말인가.
그 도리천의 솔바람 소리는 이승 인연에 한 맺힌, 한 아녀자의 슬픈 노래처럼 애절하게만 들렸다.
신라26대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자 왕위계승 문제로 화백회의가 열렸다.라이벌 김용춘을 누르고 진평왕의 장녀
덕만(德曼)이 만장일치로 추대되었으니 그녀가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이다.
여왕은 라이벌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를 과감히 등용하고 외교전반에 관한 권한을 부여하여 김춘추는 여왕의
재위기간 동안 일심으로 충성을 바쳤다. 정적(政敵)을 곁에 두면서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하여 자신에게 이롭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선덕여왕의 탁월한 카리스마요, 용병술이었던 것이다.
또한, 금관가야 몰락왕족 김유신을 등용하여 군사권(軍士權)을 주어 지휘케 하여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졌다.
그녀의 여장부다움은 처녀의 몸인 김유신의 누이가 김춘추의 아이를 잉태하자 국법에 따라 처형하지 않고
그들을 맺게하는 지략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탁월한 인재등용,뛰어난 외교능력, 첨성대와 황룡사9층목탑을 세운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하던 여왕에게 스토커
(stoker)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지귀(志鬼)였다.
선덕여왕은 나라 일을 보면서 아침 저녁으로 황룡사에 가서 예불을 했다.왕을 아침 저녁 먼 눈길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여왕으로서의 권위에 경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가운데 지귀(志鬼)라는 사람은 여왕을 짝사랑해 끝내는 상사병이 났다. 영묘사에 불공을 드리러 간 여왕은
지귀에게 알현을 허락하였다. 여왕이 불공을 마치고 나와보니 기다림에 지쳤던 지귀는 그만 잠이 들어 있었다.
선덕여왕은 지귀를 깨우지 않고 그의 가슴에 팔찌를 풀어주고 돌아갔다. 뒤늦게 잠에서 깬 지귀는 잠이 든 자신
을 원망하며 타오르는 사랑을 진정치 못해 애가 타서 죽었다.
지귀는 그로부터 나쁜 불귀신이 되어 행패를 부렸다. 지귀의 행패는 주로 방화였다. 그의 심화가 남의 집과 재산
을 태우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불귀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선덕 여왕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呪文)을
지어 백성들에게 내놓았다.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志鬼心中火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燒身變火神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流移滄海外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不見不相親
백성들은 선덕 여왕이 지어 준 주문을 써서 대문에 붙였다. 그랬더니 비로소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불귀신을 물리치는 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는 불귀신이 된 지귀(志鬼)가 선덕여왕의
뜻만 좇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원래 고려 초의 설화집인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殊異傳)에 심화요탑(心火繞塔)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었는데,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전재되어 전한다.
<대동운부군옥>은 은나라 음시부의 <운부군옥>을 본따서 단군 이래 선조 때까지 수천 년 간의 사실을 지리(地理)·
국호(國號)·인명(人名)·효자(孝子)·열녀(烈女)·수령(守令)·선명(仙名)·목명(木名)·화명(花名)·금수(禽獸) 11개 항목
으로 나누고, 이를 운별(韻別)로 분류해 놓은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삼국유사에는 지귀(志鬼)의 이야기가 너무 허황되다고 느꼇음인지 한 마디로만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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