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삶/북한 한민족

“고향이 그립지만 조선에서 탈출할 때를 생각하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09. 2. 15. 09:38

“고향이 그립지만 조선에서 탈출할 때를 생각하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지난달 말 중국 동북지방에서 만난 탈북여성 ㅇ씨(30·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ㅇ씨는 고향생각이 날 때마다 두만강을 건너 북·중 국경도시 투먼으로 탈북한 2005년 여름을 자주 떠올린다. 별도 없는 캄캄한 밤에 허벅지까지 차 오른 강물을 건너는 동안 국경수비대에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던 기억은 지금도 악몽 그대로다. 폭이 좁은 쪽을 골라 걷고 헤엄치던 몇 시간이 한없이 길었다.

중국생활 3년째. ㅇ씨는 술집 접대부로 일하고 있다. 이곳에는 ㅇ씨 외에 탈북여성 6명이 함께 일한다. 중국 공안당국 간부와 친한 사장과 마담의 ‘특별 배려’로 몇달째 별 탈없이 지낸다.

ㅇ씨는 술을 따르고 마시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한국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안줏감으로 해바라기 씨앗을 까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주 수입원은 팁. 통상 100~200위안씩 받는다. 많을 때는 하루 서너명까지 접대하기도 한다.

그는 “처음 탈북할 때는 이런 일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짧은 치마, 몸에 달라붙는 상의에 화장을 한 ㅇ씨. 그는 6년간 인민군 휘장이 달린 단정한 제복을 입은 인민군 ‘여전사’였다. 신의주 인근의 부대에서 통신병으로 일했다.

만기제대 후 아버지의 권유로 탈북을 결심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너라도 빛을 보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브로커를 주선했다. 군대에서는 최소한 굶는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조나 강냉이를 섞은 밥을 먹었다. 그러나 제대하니 날마다 끼니를 굶지 않으려는 ‘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제대로 먹고 살고 싶다는 것 말고 또 무슨 이유가 있겠나. 힘들지만 중국 온 이후 굶지 않고 밥 먹고 살고 있으니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와 동생 앞에서 눈물만 흘렸다는 ㅇ씨. 지난해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아버지 임종을 못했다는 자책감에 한동안 중국에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ㅇ씨가 중국에서 한 일은 중국동포가 운영하는 식당 종업원. 일찍 일어나 밤 늦게까지 쉴 틈없이 일했지만 손에 돈을 쥐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따지지도 못했다. 중국 당국이 탈북자를 난민이 아닌 ‘불법 월경자’로 간주하는 탓에 적발되면 북송되는 불안한 신분이 족쇄였다. 중국어가 어눌해 다른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는 브로커를 만났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따라간 곳은 지린(吉林)성의 구석진 농촌. 자신보다 열살쯤 많은 한족 남성에게 팔려간 것이었다.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은 당연히 행복하지 않았다. 시골생활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희망이 없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한 달도 안돼 ‘도망’을 쳤다. 남편은 그를 뒤쫓지 않았다. 넓디넓은 중국 땅이니 쉽게 포기할 만했다. 짧았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으려 했다.

접대부 일을 시작하면서 ㅇ씨는 북의 가족에게 매달 1000~1500위안을 부칠 수 있게 됐다. 식당 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일단 발을 들여놓은 뒤 돈을 만지게 되니 다른 일은 절대 못할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는 “어떻게든 땀 흘려서 돈을 벌려고 했지만 앞길이 막막했다. 누군가가 ‘여기서 먹고 살려면 너무 깨끗하게 살 순 없다. 나쁜 일도 아니고 필요한 일이다’라고도 충고했다”고 했다. “이미 버려질대로 버려진 몸이니 더 버릴 것도 없고, 이 돈으로 동생을 도와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생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ㅇ씨는 “꼭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에 가게 되면 아무리 궂은일을 하더라도 두려움 없이 떳떳하게 일하겠다”고 덧붙였다. 탈북 후 함께 지낸 친구가 최근 내몽골을 거쳐 한국에 갔다며 “가까운 친구가 갔다고 하니 신기하면서도 언젠가 나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고도 했다. “한국에 가면 고향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실 중국에서는 탈북자들끼리 더 견제하고 조심하는 것이 있는데 정말 좋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또다른 탈북 접대부여성 ㄱ씨(26)가 입을 열었다. “한국에 가면 가장 좋지만, 만약 그것이 힘들다면 중국이라도 좋으니 안전하게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북에 있는 가족들하고 계속 연락할 수 있잖아요.”

〈김유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