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삶/영성

[스크랩] 영신수련: 관 - 대 - 함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09. 1. 16. 16:58

관 - 대 - 함  


관대함

“주님, 창조 안에는 엄청난 낭비가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열매들은 씨앗이 잃어버린 그런 양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샘들은 넘치도록 물을 솟아냅니다. 태양은 빛을 범람하며 발산합니다.
당신의 관용으로 관대함이 무엇인지를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의 너그러움으로 제가 인색하게 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관대하고 좋으시듯이 얼마나 당신의 손을 열어젖히고 계시는지
제가 깨달을 때에 저 또한 임금님의 아드님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처럼 이재(理財)를 따짐없이 제 편에서 주기 위함입니다.”

브라질의 카마라 주교의 이 기도문은 이냐시오의 영신수련 5번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영신수련을 하는 이는 자신의 창조주에 대하여
너그러운 정신과 솔직함을 지니고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 유익하다”(EB 5).

영신수련의 주석가들은 항상 관대한 마음을 영신수련이나
영적 훈련을 위한 근본 조건으로 해석하였다.
좁은 소견과 편협한 마음은 영신수련과 인생길을 위해서는 좋지 않은 전제들이다.
사람들의 만남을 관찰하노라면 이것은 더욱 쉽게 입증된다.
전제가 많고, ‘만약’이나 ‘그러나’가 대화 가운데 자주 등장할수록,
상대방마다 안전장치를 염두에 두면 둘수록,
그리고 손해볼 것을 걱정하면 할수록 만남이 이루어지고
관계가 성숙되기란 더욱 어렵게 된다.

여기에서 상대방들은 이런 전제를 없애는 작업을 천천히 해야만 한다.
정치에서 이것은 “신뢰 형성 수립”(vertrauensbildenden Ma nahmen)의 시간이다.
삶에서 ‘더욱더’를 가능하게 하는 이런 관대함은 어떤 것인가?

영신수련의 원래 텍스트에로 돌아가는 것이 이에 대한 답을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냐시오는 “con grande animo” 즉 고매한 정신과
넓은 마음으로 영신수련에 들어가라고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관대함을
“위대한 것을 향한 영혼의 확장 상태”(extensio animi ad magna)라고 정의한다.
관대하다고 하는 것은 우선 위대한 것에 대한 지각을 갖는 것이다.
커다란 희망, 원대한 갈망과 환상과 꿈들, 그리고 거대하게 계획된 전망들을 갖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원한다!”라고 소화 데레사는 말했다;
대 데레사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메리 워드(Mary Ward, 역주. 동정성모회의 창설자)는
이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에도 만족하지 말라.”

─ 이 말씀들은 사람들이 작은 것, 인간적인 것, 유한한 것,
현세의 것에 마음을 두고 있음은 이미 거의 절박하게 느낄 만큼 그렇게 대단하며,
누군가의 숨을 막히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 훌륭한 성인들의 경우에 이것은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그분보다 더 위대한 것은 결코 생각할 수 없는”(켄더베리의 안셀무스)
하느님 계시를 자그마한 이슬 방울 안에서,
자연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 안에서 보십시오.
다름아닌 “풍요롭고 가득히 쌓아 넘치도록” 주시는(루가 6,38)
위대하신 하느님을 관상함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그 자체로
넓고 위대하게 되도록 열어제친다.

웅장한 산맥, 광활한 풍경이나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호흡을 크게 하고,
가슴을 넓게 만드는 것처럼, 인간이 모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위대하시며,
우리가 ‘결정하고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보다
‘무한정으로 훨씬 더 많이’ 주시는(에페 3,20) 하느님을 바라본다면
인간은 그만큼 폭이 넓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편협한 마음과 하느님의 관대함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묘사하신다:
종이 천문학적 숫자인 고액의 빚을 탕감받는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터무니없는 소액 때문에 동료 종을 박해한다(마태 18, 23-35).
영신수련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명상(Ruf-Christi-Betrachtung)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온전히’ 투신하는 그분과 함께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직하도록’(EB 93) 초대를 하는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이냐시오에게는 이렇게 ‘관대하고 어지신 임금님’의 ‘당부어린 부르심’(EB 94)에 대해
오로지 한 가지 대답만 있다.

이 대답은 ‘기사’ 이냐시오에게 바쳐진 한 기도문에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영원한 말씀이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여, 저에게 참다운 관대함을 가르쳐주소서.
님께서 그것을 얻으신 것처럼 님께 봉사하도록 가르쳐주소서:
셈없이 주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상처를 고려하지 않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소서;
휴식을 찾지 않고 일하도록 가르쳐주소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식 외에
그 어떠한 보상도 기대함없이 자신을 투신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소서.”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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