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식탁 현 재 인
우리는 피재땅에 대한 신청서를 제출했고 서류에는 우리 도장이 찍혀서 어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 솔직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가 실패한 다섯 사람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정부의 요구에 맞춰 목장으로 개간하는 일을 잘해 나간 것 같았습니다. 10에이커나 되는 땅의 나무를 베어냈고 8에이커의 땅에 과수원 풀과 토끼풀을 심었습니다. 축사가 둘씩이나 되어 80마리의 소를 키울 만큼 넓었고 두 곳의 샘으로부터 파놓은 펌프가 달린 작은 집도 한 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할당된 금액중 적은 액수만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증발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는 정부의 지원금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 속에서 의문들이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우리에게 그들을 대신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이라도 있는가? 몇 마리밖에 안되는 소들이 거기서 풀을 뜯어먹고 과연 정부가 인정하는 규모로 불어날 수 있을까? 예수원 식구만도 적은데 그 곳에 삵 사람일 따로 있는가? 임대료와 이미 개발에 들어간 값을 치를 돈, 그리고 필요한 수리를 할 돈과 좀 더 많은 땅을 개간하기 시작할 돈은 충분히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이 엄청난 사업을 수행해 나갈 돈이 충분히 생길 것인가?
1976년 9월 1일에 투표하기 위해 정회원들이 모였을 때 이런 문제들과 그 이상의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맴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보이는 이 도전을 우리는 책임있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이고 논리적으로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 큰 일이다" 고 말할 것인가? 놀랍게도 조목사님네와 김모세 할아버지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밀고 나가야 한다고 쉽게 동의했습니다. 저만 계속 보류상태 였습니다. 저는 "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제 정신으로 이처럼 어마어마한 책임을 떠맡을 수 있단 말인가? " 하고 생각했습니다.
조알버트는 "일 할 사람에 대해서는 걱정마십시요.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쳐는 "그건 말도 안돼. 4년동안 고생하여 갈전 분원에 교회도 세우고 큰 규모의 집회를 하고도 남을 많나 시설까지 갖추었는데 이제와서 가족을 이끌고 피재로 이사가서 그 거친 환경속에셔 수년간 씨름하겠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조목사님이 새 땅에 대해 그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생겼습니다. 강목사님은 원래 갈전 교회를 개척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그 땅을 임대료도 받지 않고 20년간 쓰도록 한다는 증서를 주셨습니다만, 법적인 인가는 없었습니다. 그 분은 오래 전에 이사가셨고 은퇴하셨습니다. 이제 법적인 상속자인 그의 아들이 적당한 값에 땅을 팔았던 것입니다. 교회 밑에 있는 땅과 분원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작은 정원 외에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조 목사님은 그 부분도 그렇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야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는 분원이 건물을 포함하여 전부 피재로 이사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음, 일이 그렇다면 우리가 피재 땅을 얻어야겠고 따라서 조목사님이 거기서 사시며 일을 하실 수 있겠어" 하고 생각했고 그래서 만장일치가 되었습니다.
결정을 하고 나서 아쳐와 킹스베리와 김모세할아버지는 군청에 땅의 경계와 고도를 알아보았습니다. 두 마을에 걸쳐져 있는 땅은 65ha (160에이커, 18만평)에 이르렀습니다. 높이는 해발 850피이트에서 시작되어 3740피이트에 이르렀고 경관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날씨가 아주 좋은 날이면 산맥을 넘어 수평면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바다 위에 떠있는 어선으로부터 나오는 불빛이 밤의 안개 속에서 비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을 땅을 죽 걸어보면서 모양이 대강 삼각형이고 두 변이 도로에 연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샘을 찾아내고 계속 수풀을 헤치며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 발은 아팠어도 마음은 기뻤습니다. 윗 부분의 후미진 곳에 이르자 - 그 곳이 바로 남해로 흐르는 낙동강과 서해로 흐르는 한강 그리고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이 각각 세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인데 - 아쳐는 "여기야말로 기도의 삼각 전망대를 세워야 할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마치 물이 온 세상에 흘러 넘치듯 그 분의 축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남자들은 언덕을 걸어 내려오면서 계단식 형태로 된 부분을 발견했는데 앞으로 거기가 사람들이 모여 복음을 듣고 회의도 열 수 있는 장소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계속 걸으면서 7년안에 자립하고 예수원까지 지원할 정도로 땅을 최대한 활용시킨다면 돈과 인력이 얼마나 들며 소와 염소 그리고 양을 얼마나 키워야 할 지 헤아려보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해결해야 할 것은 인력이었습니다. 일이 되어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낙동인, 농부, 목동, 건축공, 기계공, 연관공, 그리고 요리사, 아기보는 사람, 정원사, 그 외 온갖 개척자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령의 힘으로 일하기를 원하는 자들이어야 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장37-38절)." 우리는 이미 자원했지만 단련되고 경험과 재능이 많은 가족 즉 조알버트목사님과 샤론사모님,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로 시작할 참이었습니다. 갈전의 강가서 방목할 때 어려움을 겪은 소들이 예수원으로 옮겨졌었는데 이제 목장으로 옮겨가서 건강에 좋은 풀을 뜯어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주일이 지나자. 갈전의 교회 아래쪽 땅과 분원은 팔리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조목사님은 전적으로 목회를 하였었고 분원은 (큰 천막을 덧붙여서 )100명 정도나 되는 회의 그룹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토록 활기찬 목회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면 이런 일들을 할 수 없는데 양심상 옮기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목장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만 되었을까요? 충성스런 예레미야와 그이 부인 에스더를 보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결혼한 지 겨우 두 서너달 밖에 안되었는데, 예수원에서 작은 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 후가 중이었을 때 예레미야는 그리스도 신학교 부설 목장에서 6개월간 낙농기술을 배웠었습니다. 그리고 나소 그는 예수원의 소를 돌보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한 동안 독신으로 지내야 할 지 아니면 결혼해서 주님을 섬겨야 할 지에 대해 씨름했습니다. 한 번은 그가 맞 선을 보러 나갔는데 친구는 상대가 결혼배우자로 좋을 듯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 아니 "라고 말하고 돌아왔는데 왜냐하면 그 여자가 예수원에서 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죠. 그로써 마음에 결정을 보았던 것입니다.
김에스더는 부드럽고 매력적인 젊은 여성으로 문곡교회 교인이었으며 우리 마을을 오가는 버스의 안내양이었습니다. 수차례 그녀는 아쳐가 버스를 탔을 때 한사코 차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직업을 포기하고 너무나도 기쁘게 예수원에 와서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도착하고 곧 얼마 안되어 루이스 할머니와 예레미야는 모두 하나님께서 그녀를 예레미아의 아내로 보내셨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할머니께서 이런 얘기를 꺼내시자 그녀의 반응은 " 어머, 그 분을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두 사람을 소기도실로 오게 하시어 이 일에 대해 의논하도록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제단 앞에 무뤂을 꿇었을 때 예레미야가 에스더에게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고 결혼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첫 째는 가족이나 그 외 어떤 것 보다도 예수님을 생애에서 첫째로 모시고 살 것인지? 두 번째는 예수원에 살게 되든지 아니면 남편이 광부가 되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회에서 일하도록 부르시든지 아니면 그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든지 함께 감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지? 세 번째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 줄 것인지 였습니다.
그녀는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을 끝났고 에스더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하나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답 을 편지로 쓰기로 결정했는데 아뿔싸,그 편지가 잘못되어 예레미야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읽어버렸습니다! 말이 퍼졌습니다. 버니가 소문을 듣게 되었는데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 만우절날 장난으로 제 헬젠(우리를 방문중이던 미국인)에게 "예레미야하고 에스더가 결혼한다는 것 아셨어요? " 하고 말했습니다. "응, 멋지지 않니? 내가 소를 돌볼거야. 그래야 그가 결혼 전에 피정을 가고 후에 신혼여행도 갈 수 있지! " 버니의 농담에 젠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원에서는 항상 그렇지만 부활절은 엄숙하고도 아주 바쁜 절기입니다. 발을 씻어주는 성목요일 세족례가 있고, 성금요일에는 9시간이나 걸리는 예식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하신 일곱가지 말씀에 대해 금식하며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토요일에 세례식과 아울러 새 불을 켜는 부활절 망일 예식이 있고 마지막으로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즐거운 성찬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지막 예식이 부활절 다음 날인 월요일, 1976년 4월19일에 있었는데 바로 주예레미야와 에스더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에레미야는 보통 헛간 일을 하는 옷차림이었는데 새 양복을 입어 눈부시게 보였고, 부엌의 재주꾼이었던 에스더는 넘실거리는 흰색 드레스와 베일에 싸여 화사하고도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예수원 식구들은 많은 친척분들과 친구들과 함께 엄숙한 선서를 지켜보았고 맛있는 피로연 음식을 먹고 신랑과 신부 (에스더는 핑크빛 실크정장으로 갈아입었습니다.)가 버스를 타려고 내려갈 떼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를 부르면서 산 아래 중턱까지 떠라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가족을 사용하시기를 몹시 열망하셨는데 그 시작이 이렇게 감동적이었습니다. 먼저 소들을 목장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예수원 식구들은 집결하였고 예수원에서도 이미 바쁘지만 형제들이 오고 가면서 소를 돌보도록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권솔로몬, 남요한, 그리고 박진호(바나바)가 그들이였습니다. 바울 킹스베리와 형제들은 바윗돌로 외양간을 짓기 시작했는데 양우리로 만들로 싶었습니다. 가을철 몆개월간 킹스베리 가족은 예수원 옆에 새로 지은 집인 '석성'을 자주 떠나 경치좋은 분수령목장으로 캠핑하러 갔습니다.
목장에 한 가족이 살아야 할 때가 오자, 예레미야와 애스더는 " 이게 우리가 원하던 것입니까?" 라는 반문도 없이 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하였습니다. 그 분은 그들의 결혼에서 세 번째로 계신 분이셨고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안전했습니다. 그들은 그 분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 분께서 돌보아주실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이미 그들을 함께 묶으심으로서 사랑을 나타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분을 그들의 생애에서 필요한 것과 결혼식 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심으로 그 능력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결혼식을 치루려면 별도로 돈이 필요한데 그 당시 예수원은 간신히 꾸려가는 형편이었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결혼식에 드는 특별비용을 기도로 구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누군가가 미국에 있는 우리 구좌로 1,500불을 보냈습니다. 결혼식에 돈일 필요한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마는, 한편 송금자의 이름도 알 수 없다니 이 또한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몇 달이 지난 후 은행으로부터 통보가 왔는데 실수가 생겼으니 1,500불을 되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마음이 상하지 않고 돌려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예레미야와 에스더는 외양간 옆이면서 국도에 아주 가까이 있는 작은 집으로, 그것도 한 겨울에 이사를 했고 어는 신랑과 신부도 감당해내지 못했을 정도로 빠른 시간에 성숙되도록 훈련받기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소젖을 짜고 수도관을 묻을 땅을 파고, 나무를 베고, 울타리를 세우며 풀도 심고 송아지를 받고, 관공서를 방문하기도 하면서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밥하고 살을 에이는 듯한 날씨에 시냇물에 가서 빨래하고 들일을 함께 하기도 하며 송아지가 죽으면 슬퍼하면서 일꾼들로 꽉 찬 작은집을 그야말로 한 눈 팔 새도 없이 꾸려가면서 몸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은 정말 개척자였습니다. 이들은 결혼이라는 "새 땅"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피재목장이라는 새 땅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진정한 개척자는 어려움 앞에서 움츠러 드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더욱 희망을 갖습니다. 또한 희망과 어려움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귀중한 것은 쉽게 손 안에 쥐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분투와 인내 그리고 믿음이란 값을 치러야 새 땅의 풍요로움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아쳐나 바울 그리고 모세할아버지가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떼 짐작한대로 7년안에 새 땅의 풍요로움에 이르게 될까요? 그토록 빨리 땅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자급자족하고 예수원과 또 다른 사업들도 지원하게 될까요, 아니면 더 오래 걸릴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들(낙동인, 목동, 농부등)을 보내주시기만 한다면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 분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더 오래 걸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여러번 순종하지 않고 심지어는 반항했어도 계속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40년을 참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과연 얼마나 참으실까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시려고 해고 순종하지 않아 일손이 부족하게 될 때에 이 충성스러운 두 개척자는 얼마나 오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요?
신명기15장4절-5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우리는 피재땅에 대한 신청서를 제출했고 서류에는 우리 도장이 찍혀서 어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 솔직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가 실패한 다섯 사람보다 더 잘 해낼 수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정부의 요구에 맞춰 목장으로 개간하는 일을 잘해 나간 것 같았습니다. 10에이커나 되는 땅의 나무를 베어냈고 8에이커의 땅에 과수원 풀과 토끼풀을 심었습니다. 축사가 둘씩이나 되어 80마리의 소를 키울 만큼 넓었고 두 곳의 샘으로부터 파놓은 펌프가 달린 작은 집도 한 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할당된 금액중 적은 액수만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증발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에게는 정부의 지원금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 속에서 의문들이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우리에게 그들을 대신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이라도 있는가? 몇 마리밖에 안되는 소들이 거기서 풀을 뜯어먹고 과연 정부가 인정하는 규모로 불어날 수 있을까? 예수원 식구만도 적은데 그 곳에 삵 사람일 따로 있는가? 임대료와 이미 개발에 들어간 값을 치를 돈, 그리고 필요한 수리를 할 돈과 좀 더 많은 땅을 개간하기 시작할 돈은 충분히 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이 엄청난 사업을 수행해 나갈 돈이 충분히 생길 것인가?
1976년 9월 1일에 투표하기 위해 정회원들이 모였을 때 이런 문제들과 그 이상의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맴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보이는 이 도전을 우리는 책임있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이고 논리적으로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 큰 일이다" 고 말할 것인가? 놀랍게도 조목사님네와 김모세 할아버지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밀고 나가야 한다고 쉽게 동의했습니다. 저만 계속 보류상태 였습니다. 저는 "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제 정신으로 이처럼 어마어마한 책임을 떠맡을 수 있단 말인가? " 하고 생각했습니다.
조알버트는 "일 할 사람에 대해서는 걱정마십시요.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쳐는 "그건 말도 안돼. 4년동안 고생하여 갈전 분원에 교회도 세우고 큰 규모의 집회를 하고도 남을 많나 시설까지 갖추었는데 이제와서 가족을 이끌고 피재로 이사가서 그 거친 환경속에셔 수년간 씨름하겠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조목사님이 새 땅에 대해 그토록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생겼습니다. 강목사님은 원래 갈전 교회를 개척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그 땅을 임대료도 받지 않고 20년간 쓰도록 한다는 증서를 주셨습니다만, 법적인 인가는 없었습니다. 그 분은 오래 전에 이사가셨고 은퇴하셨습니다. 이제 법적인 상속자인 그의 아들이 적당한 값에 땅을 팔았던 것입니다. 교회 밑에 있는 땅과 분원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작은 정원 외에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조 목사님은 그 부분도 그렇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야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 는 분원이 건물을 포함하여 전부 피재로 이사갈 것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음, 일이 그렇다면 우리가 피재 땅을 얻어야겠고 따라서 조목사님이 거기서 사시며 일을 하실 수 있겠어" 하고 생각했고 그래서 만장일치가 되었습니다.
결정을 하고 나서 아쳐와 킹스베리와 김모세할아버지는 군청에 땅의 경계와 고도를 알아보았습니다. 두 마을에 걸쳐져 있는 땅은 65ha (160에이커, 18만평)에 이르렀습니다. 높이는 해발 850피이트에서 시작되어 3740피이트에 이르렀고 경관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날씨가 아주 좋은 날이면 산맥을 넘어 수평면을 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바다 위에 떠있는 어선으로부터 나오는 불빛이 밤의 안개 속에서 비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을 땅을 죽 걸어보면서 모양이 대강 삼각형이고 두 변이 도로에 연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샘을 찾아내고 계속 수풀을 헤치며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 발은 아팠어도 마음은 기뻤습니다. 윗 부분의 후미진 곳에 이르자 - 그 곳이 바로 남해로 흐르는 낙동강과 서해로 흐르는 한강 그리고 동해로 흐르는 오십천이 각각 세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인데 - 아쳐는 "여기야말로 기도의 삼각 전망대를 세워야 할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마치 물이 온 세상에 흘러 넘치듯 그 분의 축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다! "고 생각했습니다.
남자들은 언덕을 걸어 내려오면서 계단식 형태로 된 부분을 발견했는데 앞으로 거기가 사람들이 모여 복음을 듣고 회의도 열 수 있는 장소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계속 걸으면서 7년안에 자립하고 예수원까지 지원할 정도로 땅을 최대한 활용시킨다면 돈과 인력이 얼마나 들며 소와 염소 그리고 양을 얼마나 키워야 할 지 헤아려보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로 해결해야 할 것은 인력이었습니다. 일이 되어 나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낙동인, 농부, 목동, 건축공, 기계공, 연관공, 그리고 요리사, 아기보는 사람, 정원사, 그 외 온갖 개척자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령의 힘으로 일하기를 원하는 자들이어야 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태복음 9장37-38절)." 우리는 이미 자원했지만 단련되고 경험과 재능이 많은 가족 즉 조알버트목사님과 샤론사모님,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로 시작할 참이었습니다. 갈전의 강가서 방목할 때 어려움을 겪은 소들이 예수원으로 옮겨졌었는데 이제 목장으로 옮겨가서 건강에 좋은 풀을 뜯어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주일이 지나자. 갈전의 교회 아래쪽 땅과 분원은 팔리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조목사님은 전적으로 목회를 하였었고 분원은 (큰 천막을 덧붙여서 )100명 정도나 되는 회의 그룹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토록 활기찬 목회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면 이런 일들을 할 수 없는데 양심상 옮기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면 목장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만 되었을까요? 충성스런 예레미야와 그이 부인 에스더를 보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이제 결혼한 지 겨우 두 서너달 밖에 안되었는데, 예수원에서 작은 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번 후가 중이었을 때 예레미야는 그리스도 신학교 부설 목장에서 6개월간 낙농기술을 배웠었습니다. 그리고 나소 그는 예수원의 소를 돌보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한 동안 독신으로 지내야 할 지 아니면 결혼해서 주님을 섬겨야 할 지에 대해 씨름했습니다. 한 번은 그가 맞 선을 보러 나갔는데 친구는 상대가 결혼배우자로 좋을 듯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 아니 "라고 말하고 돌아왔는데 왜냐하면 그 여자가 예수원에서 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죠. 그로써 마음에 결정을 보았던 것입니다.
김에스더는 부드럽고 매력적인 젊은 여성으로 문곡교회 교인이었으며 우리 마을을 오가는 버스의 안내양이었습니다. 수차례 그녀는 아쳐가 버스를 탔을 때 한사코 차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직업을 포기하고 너무나도 기쁘게 예수원에 와서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도착하고 곧 얼마 안되어 루이스 할머니와 예레미야는 모두 하나님께서 그녀를 예레미아의 아내로 보내셨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할머니께서 이런 얘기를 꺼내시자 그녀의 반응은 " 어머, 그 분을 제게 너무 과분합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두 사람을 소기도실로 오게 하시어 이 일에 대해 의논하도록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제단 앞에 무뤂을 꿇었을 때 예레미야가 에스더에게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고 결혼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첫 째는 가족이나 그 외 어떤 것 보다도 예수님을 생애에서 첫째로 모시고 살 것인지? 두 번째는 예수원에 살게 되든지 아니면 남편이 광부가 되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회에서 일하도록 부르시든지 아니면 그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든지 함께 감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지? 세 번째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 줄 것인지 였습니다.
그녀는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을 끝났고 에스더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하나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답 을 편지로 쓰기로 결정했는데 아뿔싸,그 편지가 잘못되어 예레미야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읽어버렸습니다! 말이 퍼졌습니다. 버니가 소문을 듣게 되었는데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 만우절날 장난으로 제 헬젠(우리를 방문중이던 미국인)에게 "예레미야하고 에스더가 결혼한다는 것 아셨어요? " 하고 말했습니다. "응, 멋지지 않니? 내가 소를 돌볼거야. 그래야 그가 결혼 전에 피정을 가고 후에 신혼여행도 갈 수 있지! " 버니의 농담에 젠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원에서는 항상 그렇지만 부활절은 엄숙하고도 아주 바쁜 절기입니다. 발을 씻어주는 성목요일 세족례가 있고, 성금요일에는 9시간이나 걸리는 예식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하신 일곱가지 말씀에 대해 금식하며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토요일에 세례식과 아울러 새 불을 켜는 부활절 망일 예식이 있고 마지막으로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즐거운 성찬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지막 예식이 부활절 다음 날인 월요일, 1976년 4월19일에 있었는데 바로 주예레미야와 에스더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에레미야는 보통 헛간 일을 하는 옷차림이었는데 새 양복을 입어 눈부시게 보였고, 부엌의 재주꾼이었던 에스더는 넘실거리는 흰색 드레스와 베일에 싸여 화사하고도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예수원 식구들은 많은 친척분들과 친구들과 함께 엄숙한 선서를 지켜보았고 맛있는 피로연 음식을 먹고 신랑과 신부 (에스더는 핑크빛 실크정장으로 갈아입었습니다.)가 버스를 타려고 내려갈 떼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를 부르면서 산 아래 중턱까지 떠라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가족을 사용하시기를 몹시 열망하셨는데 그 시작이 이렇게 감동적이었습니다. 먼저 소들을 목장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예수원 식구들은 집결하였고 예수원에서도 이미 바쁘지만 형제들이 오고 가면서 소를 돌보도록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권솔로몬, 남요한, 그리고 박진호(바나바)가 그들이였습니다. 바울 킹스베리와 형제들은 바윗돌로 외양간을 짓기 시작했는데 양우리로 만들로 싶었습니다. 가을철 몆개월간 킹스베리 가족은 예수원 옆에 새로 지은 집인 '석성'을 자주 떠나 경치좋은 분수령목장으로 캠핑하러 갔습니다.
목장에 한 가족이 살아야 할 때가 오자, 예레미야와 애스더는 " 이게 우리가 원하던 것입니까?" 라는 반문도 없이 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하였습니다. 그 분은 그들의 결혼에서 세 번째로 계신 분이셨고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안전했습니다. 그들은 그 분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 분께서 돌보아주실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이미 그들을 함께 묶으심으로서 사랑을 나타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분을 그들의 생애에서 필요한 것과 결혼식 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심으로 그 능력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결혼식을 치루려면 별도로 돈이 필요한데 그 당시 예수원은 간신히 꾸려가는 형편이었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결혼식에 드는 특별비용을 기도로 구했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누군가가 미국에 있는 우리 구좌로 1,500불을 보냈습니다. 결혼식에 돈일 필요한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마는, 한편 송금자의 이름도 알 수 없다니 이 또한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몇 달이 지난 후 은행으로부터 통보가 왔는데 실수가 생겼으니 1,500불을 되돌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마음이 상하지 않고 돌려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예레미야와 에스더는 외양간 옆이면서 국도에 아주 가까이 있는 작은 집으로, 그것도 한 겨울에 이사를 했고 어는 신랑과 신부도 감당해내지 못했을 정도로 빠른 시간에 성숙되도록 훈련받기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소젖을 짜고 수도관을 묻을 땅을 파고, 나무를 베고, 울타리를 세우며 풀도 심고 송아지를 받고, 관공서를 방문하기도 하면서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밥하고 살을 에이는 듯한 날씨에 시냇물에 가서 빨래하고 들일을 함께 하기도 하며 송아지가 죽으면 슬퍼하면서 일꾼들로 꽉 찬 작은집을 그야말로 한 눈 팔 새도 없이 꾸려가면서 몸으로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은 정말 개척자였습니다. 이들은 결혼이라는 "새 땅"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피재목장이라는 새 땅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진정한 개척자는 어려움 앞에서 움츠러 드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더욱 희망을 갖습니다. 또한 희망과 어려움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귀중한 것은 쉽게 손 안에 쥐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분투와 인내 그리고 믿음이란 값을 치러야 새 땅의 풍요로움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아쳐나 바울 그리고 모세할아버지가 계획을 세우기 시작할 떼 짐작한대로 7년안에 새 땅의 풍요로움에 이르게 될까요? 그토록 빨리 땅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자급자족하고 예수원과 또 다른 사업들도 지원하게 될까요, 아니면 더 오래 걸릴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들(낙동인, 목동, 농부등)을 보내주시기만 한다면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 분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더 오래 걸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여러번 순종하지 않고 심지어는 반항했어도 계속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40년을 참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과연 얼마나 참으실까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시려고 해고 순종하지 않아 일손이 부족하게 될 때에 이 충성스러운 두 개척자는 얼마나 오래 견디어 낼 수 있을까요?
신명기15장4절-5절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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