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라이프]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는 고 옥한흠 목사의 제자다. 90년대 후반부터 10년간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했던 이 목사는 8년 전 경기도 성남의 송림고등학교에서 분당우리교회를 개척, 장년 성도 1만2000명의 교회로 성장시켰다. 고 옥 목사는 분당우리교회 개척 초기부터 이 목사에게 자주 연락을 하며 목회에 대한 조언을 해 준 것으로 알려졌다.
옥 목사가 소천하기 하루 전인 지난 1일 분당우리교회에서 이 목사를 만나 꽤 긴시간동안 옥 목사가 남긴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개인적으로는 고 옥 목사가 평소 이 목사의 목회를 흐뭇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석에서 몇 차례 옥 목사로부터 이 목사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느낄만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옥 목사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동안 이 목사를 만나 옥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이 목사와 만난 하루 후에 옥 목사는 이 땅을 떠났다. 서울대 장례식장의 빈소에서 잠깐 마주친 이 목사는 내게 “무언가 뜻이 있었던 인터뷰였다”고 말했다.
이 목사에게 고 옥목사는 누구였는가. 이 목사에게 옥 목사는 ‘억제력’이었다. 옥 목사가 자신에는 늘 억제력으로 작동했던 사람이었다고 이 목사는 말했다. 더 영향력을 미치고 싶고, 더 커지고 싶은 인간적인 욕망이 존재하는 자신에게 옥 목사는 언제나 그 욕망을 억제하도록 만든 분이었다는 것이다.
]“제게 옥한흠 목사님은 ‘억제력’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할 수 있다고 다 해서는 안 된다는, 휘두를 힘이 있다고 마음껏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그 억제력을 그 분은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것 억제하면서 오직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광인(狂人)처럼 사셨던 분이 바로 옥 목사님이셨습니다..”
고 옥 목사가 이 목사에게 강조했던 메시지는 언제나 동일했다고 한다. 한 사람에게 집중하라. 그 한 사람을 위해서 미친 듯이 사역하라. 마치 내일은 없는 것처럼 오늘 최선을 다하라. 오늘 사역 마치고 쓰러질 정도로 최선을 다하라. 바로 그 메시지였다는 것이다.
“그분은 항상 말씀하셨어요. ‘한국교회를 염려하기 이전에 먼저 네가 섬기는 분당우리교회를 전심으로 섬겨라. 비록 당위성이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절제해야 한다. 사람 많이 모이는데 취하면 망하는 거다’라고요. 외부집회 자주 나간다고 꾸지람을 받기도 했습니다.”
옥 목사는 평소 이 목사에게 또한 두 가지를 강조했다고 한다. 먼저 건강을, 그리고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스스로가 치열한 목회 과정에서 건강과 자녀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일종의 자책에서 나온 권면이었을 것이라고 이 목사는 말했다.
“어느 날 옥 목사님의 그 말씀을 생각하다 눈물이 핑 돈 적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되돌려 옥 목사님이 다시 목회를 시작하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건강과 자녀를 챙겨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옥 목사님이 다시 목회를 하셨다면 과연 그 두 가지를 챙기면서 사역하셨을까요. 알아도 그러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분이 자신을 위한 길을 억제하지 않으셨다면 이미 ‘옥한흠 목사’가 아니지요. 그랬다면 오늘의 사랑의교회도 없었을 것이고 저와도 별 관계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목사는 옥 목사가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광인론(狂人論)이라고 말했다. 목회건, 제자훈련이건, 일상의 삶이건 상관없이 고 옥 목사의 인생을 꿰뚫는 정신은 바로 광인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은 그 직업, 혹은 직분과 관계없이 어느 곳에서든 사명 완수를 위해 미친 듯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광인론의 요체입니다. 옥 목사님은 수만명의 성도를 목회하기 위해서 사역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한 명, 한 명을 대상으로 마치 그것 하다 죽을 것처럼 미친 듯이 목회하셨습니다.”
이 목사는 옥 목사가 분명 행복한 목회자였지만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제한, 억제했기에 인간적으로는 고독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옥 목사님을 따랐지만 사실 그 분에게는 넥타이 풀고 교제할 분들도 많지 않았습니다. 목회자 사이의 친구들도 적었습니다. 모든 것을 억제했기 때문이지요. 목요일 부터 금요일과 토요일은 말씀 준비하는데 진력했습니다. 마치 말씀준비 전쟁을 선포하신 분처럼 열심히, 진액을 쏟아가며 준비하셨습니다. 주일 말씀 전하면 월요일에는 힘들어서 누워계시기 일쑤였지요. 저 조차도 감히 다가서기가 늘 조심스럽고 어려웠습니다. 목회하며 은퇴까지, 그리고 은퇴 이후에 하늘로 부름 받을 때까지 깨끗한 영적 아비, 스승, 선비로서 고고함을 놓지 않았습니다. 행복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적으로 치러야 할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것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목사에 따르면 옥 목사는 교역자회의를 하다가 병으로 고통받는 한 성도를 거론하면서 기도하고 통곡을 한 적도 있다. “이 무능한 종이 사랑하는 성도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라면서 꺼이꺼이 오는 모습에 모든 교역자들이 숙연해 졌었다는 것이다.
사랑의교회에 무수한 사람들이 몰리면서 언제나 “내가 한 사람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구나”라면서 괴로워 한 분이 바로 옥 목사였더고 이 목사는 회고했다.
이 목사는 목회 환경이 다르고 목회자 개인적 차이도 존재하는 현 시점에서 현상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옥한흠 목사처럼 될 수는 없고, 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상너머에 있는 고 옥 목사의 본질 중심의 목회는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분은 목회자는 샐러리맨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목회나, 설교가 삶을 유지하는 방편이 아니라, 생활비를 벌게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숨 걸어야 하는 엄숙한 사명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정신입니다.”
이태형 국민일보 아이미션라이프부 부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