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경색으로 2년째 투병 중인 방실이
출처: 레이디경향 | 입력 2009.05.12 10:19 |
뇌경색으로 쓰러진 지 2년 만에 방실이를 다시 만났다. 한때는 사망선고까지 받았을 정도로 위중했지만, 지금은 강한 재활 의지로 빠르게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죽음 직전에 손을 잡아준 가족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회복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비록 인터뷰 장소는 병원이지만, 삶의 의욕만큼은 충만한 방실이가 말하는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
쓰러진 후 처음 내뱉은 말 '엄마'
가수 방실이는 한창 바쁘게 활동하던 지난 2007년 6월,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그 후 180도 달라진 인생을 살게 됐다.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걸을 수도 없었으며, 손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전신마비의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무대 위를 뛰어다니며, 세상을 향해 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방실이는 그때를 회상하며 "정말 죽고 싶었다"라고 표현했다.
방실이가 다친 부위는 뇌의 '연수'라는 부분이다. 이곳은 숨쉬는 기능을 관장하는 곳. 때문에 한동안 방실이는 숨쉬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생(生)과 사(死)를 오가던 그녀에게 한 줄기 빛처럼 희망이 되었던 이는 바로 그녀의 남동생 방화섭씨다.
"그때 동생이 없었다면 전 죽었을지도 몰라요. 24시간 집에도 못 들어가고 옆에 붙어서 짜증내고, 울고, 화내는 저를 다 받아줬어요. 지금까지도 한결같아요. 어떤 사람도 제 동생처럼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아요. 빨리 나아서 정말 잘해주고 싶어요."
처음 컴퓨터로 의사소통을 시도한 것도 동생 덕분이다.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가 눈을 깜빡이면, 남동생 방화섭씨가 눈 깜빡임을 보면서 컴퓨터 자판에 글씨를 쳐주었고 그렇게 의사소통을 시작했다. 그때는 상대방에게 단어 하나를 전달하는 데 5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동생은 한 번도 싫다는 소리 없이 옆에서 끈기 있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폈다.
3개월이 지난 후, 목에 있던 2개의 성대 중 하나가 마비가 풀리면서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녀가 처음 내뱉은 단어는 바로 '엄마'였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속으로 부모님 걱정을 가장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제가 쓰러졌을 때 우리 형제들이 차마 엄마에게 알리지 못했대요. 그런데 엄마가 뉴스를 통해 제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기절을 하셨어요. 그때 엄마도 심장에 물이 차서 수술을 한 상태였어요. 절 보러 오고는 싶은데, 본인도 몸이 약해서 못 오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제가 쓰러진 후 3개월 만에 엄마를 처음 볼 수 있었어요."
어머니는 항상 그녀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돼서 고맙고,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고맙고,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라고 한다.
최진실 자살 소식에 '죽고 싶다'는 생각했다
한동안은 재활치료를 잘 받았는데 갑자기 우울증에 시달리며 '죽고 싶다'는 유혹을 많이 느꼈을 때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주는 남동생과, 딸의 소식에 쓰러지신 부모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곤 했다. 재활치료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덕분에 요즘에는 제법 팔과 다리에 힘이 생겼고 서 있는 것은 물론, 걷는 연습까지 하고 있다. 많은 발전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한결같이 '기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제가 생각해도 기적 같아요. 처음에 서울대병원에서 지금의 러스크 재활치료 병원으로 왔을 때만 해도 상태가 심각했나 봐요. 제 모습을 본 후, 병원 스태프들이 모여서 심각하게 회의를 했대요. 이곳에서 사망할 가능성도 높다고. 왜냐하면 숨통이 막혀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좋아졌으니 기적이지요. 주위의 많은 분들이 간절히 기도해분 덕문이 아닐까 싶어요."
여전히 방실이의 많은 팬들은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하고, 심지어는 몸에 좋다는 약까지 손수 달여서 가져오는 사람들도 있다. 또 연예인 동료들은 그녀를 위해 모금 운동을 펼치기도 했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동료들도 꾸준히 병원을 방문해 쾌차를 빌어주고 있다.
"팬들이 좋은 약이라고 지어서 보내주시는데, 병원 약 이외에는 못 먹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서 너무 죄송해요. 그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열심히 해서 제 힘으로 완쾌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방실이는 재활에 대한 강한 의지로 힘든 재활치료 과정을 잘 이겨내고 있다. 매일 하루 6시간 동안 언어치료(말하는 연습), 작업치료(젓가락질, 칫솔질, 세수, 그림, 글씨), 통증치료(아픈 곳을 기계로 치료하는 것), 물리치료(걷는 연습), 뇌치료(자기장치료), 한방치료(뜸, 침)를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재활치료를 하는 방실이도 가끔 연예계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릴 때는 슬럼프에 빠진다. 지난해 잇따라 터진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에 이어 올해는 친하게 지내던 트로트 가수 이창용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방실이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안)재환이랑, (최)진실이가 죽고 나서 일주일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충격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나도 죽고 싶더라고요. 진실이는 무명 시절 데뷔할 때부터 알았어요. 예쁘고 작은 여자애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그로부터 20년 동안 잘 알고 지냈거든요. 먼 산 바라보며 눈물만 흘렸죠."
안재환도 코미디·오락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면서 친하게 지낸 사이고, 트로트 가수 이창용 역시 방실이의 병원을 자주 찾았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연예계 친한 후배가 한꺼번에 세 명이나 자살했다는 사실에 방실이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나는 이렇게 아파도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살아서 뭐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죠. 옆에서 저를 지키는 동생과 엄마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좋은 컨디션을 회복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고 싶어
방실이는 얼마 전, 여전히 마비 상태인 나머지 성대를 수술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당분간 약물치료를 하다가 적당한 시기가 되면 수술을 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만약 수술을 하다면, 예전처럼 말도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이고 노래도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제가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는 말도 못하고, 온몸에 힘도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말 나아졌잖아요. 여기 계신 다른 환자들도 얼마나 좋아해주는지 몰라요. 저를 보면서 '우리도 빨리 좋아져야겠다'고 이야기하세요(웃음)."
병원에서 방실이는 여전히 인기 연예인이다. 일단 병실 문 밖으로만 나가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다른 환자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면,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농담도 잘 한다.
얼마 전에는 병원에서 열린 콘서트 무대에 서면서 가수 시절의 설렘과 가슴 벅찬 환희를 느끼기도 했다. 아직은 노래 부르는 게 힘들지만, 언젠가는 예전처럼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제가 죽음 직전에서 일어선 기적을 경험했잖아요. 제 병이 다 나으면 저처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웃음)."
절망에서 희망을 찾고, 하루하루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방실이. 곁에서 마음으로 힘을 주는 어머니와, 남동생, 동료들을 위해 그녀는 오늘도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는다.
"그때 동생이 없었다면 전 죽었을지도 몰라요. 24시간 집에도 못 들어가고 옆에 붙어서 짜증내고, 울고, 화내는 저를 다 받아줬어요. 지금까지도 한결같아요. 어떤 사람도 제 동생처럼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아요. 빨리 나아서 정말 잘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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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방실이는 한창 바쁘게 활동하던 지난 2007년 6월,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그 후 180도 달라진 인생을 살게 됐다.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걸을 수도 없었으며, 손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전신마비의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눈을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무대 위를 뛰어다니며, 세상을 향해 노래를 부르던 그녀가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방실이는 그때를 회상하며 "정말 죽고 싶었다"라고 표현했다.
방실이가 다친 부위는 뇌의 '연수'라는 부분이다. 이곳은 숨쉬는 기능을 관장하는 곳. 때문에 한동안 방실이는 숨쉬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생(生)과 사(死)를 오가던 그녀에게 한 줄기 빛처럼 희망이 되었던 이는 바로 그녀의 남동생 방화섭씨다.
"그때 동생이 없었다면 전 죽었을지도 몰라요. 24시간 집에도 못 들어가고 옆에 붙어서 짜증내고, 울고, 화내는 저를 다 받아줬어요. 지금까지도 한결같아요. 어떤 사람도 제 동생처럼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아요. 빨리 나아서 정말 잘해주고 싶어요."
처음 컴퓨터로 의사소통을 시도한 것도 동생 덕분이다.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가 눈을 깜빡이면, 남동생 방화섭씨가 눈 깜빡임을 보면서 컴퓨터 자판에 글씨를 쳐주었고 그렇게 의사소통을 시작했다. 그때는 상대방에게 단어 하나를 전달하는 데 5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동생은 한 번도 싫다는 소리 없이 옆에서 끈기 있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폈다.
3개월이 지난 후, 목에 있던 2개의 성대 중 하나가 마비가 풀리면서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녀가 처음 내뱉은 단어는 바로 '엄마'였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속으로 부모님 걱정을 가장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제가 쓰러졌을 때 우리 형제들이 차마 엄마에게 알리지 못했대요. 그런데 엄마가 뉴스를 통해 제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기절을 하셨어요. 그때 엄마도 심장에 물이 차서 수술을 한 상태였어요. 절 보러 오고는 싶은데, 본인도 몸이 약해서 못 오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제가 쓰러진 후 3개월 만에 엄마를 처음 볼 수 있었어요."
어머니는 항상 그녀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돼서 고맙고,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고맙고,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라고 한다.
최진실 자살 소식에 '죽고 싶다'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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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해도 기적 같아요. 처음에 서울대병원에서 지금의 러스크 재활치료 병원으로 왔을 때만 해도 상태가 심각했나 봐요. 제 모습을 본 후, 병원 스태프들이 모여서 심각하게 회의를 했대요. 이곳에서 사망할 가능성도 높다고. 왜냐하면 숨통이 막혀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좋아졌으니 기적이지요. 주위의 많은 분들이 간절히 기도해분 덕문이 아닐까 싶어요."
여전히 방실이의 많은 팬들은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하고, 심지어는 몸에 좋다는 약까지 손수 달여서 가져오는 사람들도 있다. 또 연예인 동료들은 그녀를 위해 모금 운동을 펼치기도 했고,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동료들도 꾸준히 병원을 방문해 쾌차를 빌어주고 있다.
"팬들이 좋은 약이라고 지어서 보내주시는데, 병원 약 이외에는 못 먹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서 너무 죄송해요. 그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열심히 해서 제 힘으로 완쾌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방실이는 재활에 대한 강한 의지로 힘든 재활치료 과정을 잘 이겨내고 있다. 매일 하루 6시간 동안 언어치료(말하는 연습), 작업치료(젓가락질, 칫솔질, 세수, 그림, 글씨), 통증치료(아픈 곳을 기계로 치료하는 것), 물리치료(걷는 연습), 뇌치료(자기장치료), 한방치료(뜸, 침)를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재활치료를 하는 방실이도 가끔 연예계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릴 때는 슬럼프에 빠진다. 지난해 잇따라 터진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에 이어 올해는 친하게 지내던 트로트 가수 이창용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방실이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안)재환이랑, (최)진실이가 죽고 나서 일주일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충격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나도 죽고 싶더라고요. 진실이는 무명 시절 데뷔할 때부터 알았어요. 예쁘고 작은 여자애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그로부터 20년 동안 잘 알고 지냈거든요. 먼 산 바라보며 눈물만 흘렸죠."
안재환도 코미디·오락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면서 친하게 지낸 사이고, 트로트 가수 이창용 역시 방실이의 병원을 자주 찾았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연예계 친한 후배가 한꺼번에 세 명이나 자살했다는 사실에 방실이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나는 이렇게 아파도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살아서 뭐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죠. 옆에서 저를 지키는 동생과 엄마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좋은 컨디션을 회복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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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는 말도 못하고, 온몸에 힘도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정말 나아졌잖아요. 여기 계신 다른 환자들도 얼마나 좋아해주는지 몰라요. 저를 보면서 '우리도 빨리 좋아져야겠다'고 이야기하세요(웃음)."
병원에서 방실이는 여전히 인기 연예인이다. 일단 병실 문 밖으로만 나가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다른 환자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면,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농담도 잘 한다.
얼마 전에는 병원에서 열린 콘서트 무대에 서면서 가수 시절의 설렘과 가슴 벅찬 환희를 느끼기도 했다. 아직은 노래 부르는 게 힘들지만, 언젠가는 예전처럼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제가 죽음 직전에서 일어선 기적을 경험했잖아요. 제 병이 다 나으면 저처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웃음)."
절망에서 희망을 찾고, 하루하루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방실이. 곁에서 마음으로 힘을 주는 어머니와, 남동생, 동료들을 위해 그녀는 오늘도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는다.
"그때 동생이 없었다면 전 죽었을지도 몰라요. 24시간 집에도 못 들어가고 옆에 붙어서 짜증내고, 울고, 화내는 저를 다 받아줬어요. 지금까지도 한결같아요. 어떤 사람도 제 동생처럼 그렇게는 못할 것 같아요. 빨리 나아서 정말 잘해주고 싶어요"
■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원상희
산다는 것은 기적의 연속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있기에
사랑해야 할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오늘을 산다.
빠른 쾌유를 위해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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