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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가르뎅은… ──────────────────────────────────── ● 1945년_ 프랑스 파리 상경. 파캉과 스키아파렐리 밑에서 차례로 견습하다 장 콕토의 영화 의상을 제작하면서 실력을 인정받다. ● 1946년_ 크리스티앙 디올에게 고용되어 디올의 첫 컬렉션 뉴 룩의 책임 재단사가 되다. ● 1950년_ 디올을 떠나 자신의 아틀리에를 갖추다. ● 1953년_ 피에르 가르뎅의 첫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열다. ● 1954년_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이브에 이어 아담이란 부티크를 파리에 개장. ● 1959년_ 패션계 사상 최초로 거리에서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을 선보이다. ● 1960년_ 최초의 남성 기성복 프레타포르테 추진. ● 1970년_ 디자인의 일환으로 환경 예술 분야 라인을 만들다. ● 1977년_ 카르티에(Cartier)가 수여하는 프랑스 오트 쿠튀르상 ‘De d'Or’의 첫 수상, 이후 1979년과 1982년에 같은 상을 받음으로써 3관왕의 영예를 안다. ● 1979년_ 중국(그 당시 중공)에서의 첫 컬렉션, 공산국가 패션 컬렉션을 이끈 최초의 디자이너가 되다. ● 1980년_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30주년 기념쇼 개최. ● 1985년_ 밀라노의 최고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Ascot Brun 수상, 파리 오페라에서 패션 오스카상 수상. ● 1986년_ 구소련 체제에서 최초로 패션 라이선스 계약서에 사인, 이듬해 10,000㎡의 쇼룸 오픈. ● 1988년_ 전 교황 바오로 2세, 필리핀 대통령 코리 아키노(Cory Aquino) 친견. ● 1989년_ 영국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미술관 내 20세기 갤러리에서 여성복 40주년, 남성복 30주년 기념쇼 개최. ● 1991년_ 구소련 체제 아래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디자이너로서 최초의 패션쇼 개최. ● 1993년_ 베트남의 호치민시에서 최초의 패션쇼 개최. ● 1994년_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상견. ● 1995년_ 넬스 만델라(Nelson Mandela) 전 남아프리카 대통령 친견. ● 1996년_ 1980년과 1996년 사이에 불가리아, 헝가리, 런던, 알바니 등의 제1~3국가에 라이선스 매장 오픈. 16~25세를 위한 새 프레타포르테 ‘Evolution’ 발표. ● 2000년_ 새 가구 컬렉션. ● 2002년_ 도쿄에서 패션 50주년 기념쇼 개최. ● 2003년_ 이탈리아의 유적지 플로렌스에서 패션쇼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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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여행이 자유로워진 요즘, 기내의 쇼핑 안내 책자를 들춰보자. 립스틱과 향수에서부터 만년필, 시계,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공통분모를 가진 브랜드가 바로 동그스름한 알파벳 이니셜이 낯설지 않은 피에르 가르뎅이다. 공산주의 진영이 무너지기 전의 독재 국가에서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던 일반인들에게 처음으로 인식된 디자이너의 이름도, 1980년대 한국의 지방 도시와 시골 마을에 최초로 들어선 패션 라이선스 부티크도 그의 로고 아래에서 가능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유럽 사회와 여성들의 환상을 자극한 ‘New Look’의 주인공 크리스티앙 디올이 그의 첫 컬렉션을 위해 지목한 책임 재단사 역시 피에르 가르뎅이었음을 많은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으로 베니스 유지였던 부모의 몰락, 두 살에 파리로 이민. 2차 세계대전 중 파캉(Paquin), 스키아파렐리(Schiaparelli) 밑에서 견습하고 디올(Dior)의 책임 재단사로… | |
그의 나이 23세, 프랑스 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장 콕토(Jean Cocteau) 감독의 <미녀와 야수>를 위해 의상을 제작한 것이 피에르 가르뎅에게 행운이었다면 디올 곁에서 일했던 3년간의 경험은 그 행운이 가져다준 씨앗을 싹틔우고 키우는 과정이었을 터. 그 묘목에서 첫 열매가 열린 것은 그로부터 4년 후, ‘피에르 가르뎅 신화’가 시작되는 그의 아틀리에가 파리에 간판을 걸면서부터다. 유럽 최고의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티앙 디올 밑에서 쌓은 경험에 피에르 가르뎅만의 미래지향적인 스타일을 접목시켜 대중 앞에 선보인 그의 첫 컬렉션(1953년)의 성공은 그 이듬해 ‘Robes Bulles’의 세계적인 성과로 이어진다. 이러한 성과는 같은 해, 피에르 가르뎅의 첫 부티크가 파리에 문을 열고 맞춤복만 존재하던 1950년대 유럽에 그가 남성 기성복이라는 분야를 개척하는 데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된다. 후에 팝의 전설이 된 비틀스의 멤버들에게 입혀 유명해진 칼라 없는 베스트나 우주복에서 착안한 남성정장 등 바야흐로 여성 중심이던 당시의 패션 스타일을 남성들의 영역으로 확대한 첫 디자이너로서 입지를 굳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무후무했던 남성 기성복 아이디어는 ‘메종 피에르 가르뎅’이 겪을 시련의 단초가 되었다. 첫 컬렉션 이후 승승장구하던 젊은 가르뎅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될 뻔했던 사건이 찾아오는데, 프랑스 오트 쿠튀르 위원회로부터의 제명 통보가 그것이었다. 통보는 1959년, 가르뎅이 패션계 최초로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컬렉션을 마치고 난 직후에 찾아온다. 프랑스 오트 쿠튀르 위원회가 디자이너들에게 사회 상류층을 위한 고급 맞춤복의 컬렉션만 허가하던 시절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기성복 컬렉션은 위원회의 명성과 격에 먹칠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던 것. 제명 소식을 들은 주변의 절친한 관계자들이 전하는 걱정과 충고를 뒤로하고 가르뎅이 뱉은 한마디는 지금까지 그를 지탱하는 자존심을 잘 보여준다. “내가 필요로 한 것은 그들(위원회 회원들)이 아니다. 언젠가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가 올 거다.”
몇 년 후 위원회가 그를 다시 인정함으로써 오만에 가까웠던 그의 말은 용기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고, 그 후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은 가르뎅의 용기를 모태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9년, 그는 공산국가 최초로 중국에서 프레타포르테를 선보인 패기 있는 디자이너로 다시 주목을 끈다.1986년 구 소련에서 컬렉션과 기성복을 위한 라이선스를 최초로 획득한 데 이어 1991년에는 모스크바, 1993년에는 베트남의 호치민에서 컬렉션을 소개하면서 패션계뿐 아니라 사업가로서의 면모까지 인정받는다. 이로써 가르뎅은 세계 각국에 자신의 이름이 박힌 9백여 개의 라이선스를 획득, 패션을 글로벌로 이끈 최초의 디자이너 출신 사업가이자 현재까지 메종 피에르 가르뎅의 현역 대표로 변함없는 자리를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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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연극, 음악, 가구 디자인, 젊은 디자이너 양성, 레스토랑, 호텔 관리, 2개의 문화재단 에스파스 피에르 가르뎅 운영, 그리고 권위 있는 국내외 기관들의 초대 대사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는 그의 나이는 현재 86세.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수많은 유·무형 재산과 명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 지금쯤 일선에서 물러난다 해도 한 치 안타까울 것 없는 고령이다. 겐조와 소니아 리키엘, 이브 생 로랑 등 패션 디자인계에 획을 그은 아티스트들이 통상적으로 60세 전후에 맞이한 공식 은퇴 시기를 훌쩍 넘기고도 디자인계를 포함한 라이선스 글로벌 사업과 문화 활동을 20대처럼 소화해내고 있는 이 거대한 디자이너의 비밀은 무엇일까? 전쟁으로 모든 재산을 잃고 부모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이민을 결행했을 때 그의 나이 고작 두 살이었다. 60년 경력의 기념쇼를 눈앞에 둔 살아 있는 패션계의 역사, 프랑스 인사의 최고봉 피에르 가르뎅이 <리빙센스>에 기꺼이 시간을 할애했다. 이탈리아인 특유의 자존심과 예술적인 감각으로 세계의 패션, 사업 그리고 문화계의 대부로 자수성가한 그가 회상하는 인생 이야기 그리고 식지 않는 정열….
오늘날의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의 창시자, 오트 쿠튀르 위원회의 회원 자격 박탈 | |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시대에 패션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무엇인가?
현재와 비교하면 소수의 패션 잡지만 존재하던 시기에 책 속에 실린 사진들과 텍스틸, 그리고 각종 직물의 다양함이 좋았다. 막연히 그 세계에서 일해보고 싶었고, 1940년경 생 에티엔 (St-Etienne)에 있던 루이 봉푸이(Louis Bompuis)라는 디자이너의 재단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패션 디자인에 대한 학교 교육을 받는 게 아니라 무조건 한 도시의 재단사로 들어가 실력을 쌓아갔다. 코코 샤넬이나 크리스티앙 디올도 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
-스물세 살의 젊은 나이에 고(故) 장 콕토 감독의 대표작 <미녀와 야수(La belle et la bete, 1945년)>의 의상을 맡은 것은 행운 아니었나?
1950년 전까지만 해도 스물세 살은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파리에 입성하기 전, 비시(Vichy : 오를레앙과 리옹의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에서 견습하고 상경한 다음 프랑스 디자이너 파캉이나 이탈리아 디자이너 스키아파렐리 밑에서 계속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스키아파렐리의 지인 중 한 명이었던 장 콕토 감독의 눈에 띈 것이 계기가 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이 된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내가 준비한 의상들이 수준 이하였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다가온 기회를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듬해에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 최고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티앙 디올에게 고용되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한 분야의 대가 곁에서 일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일 수밖에 없다. 영화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충만해 있던 때 장 콕토와 한 친구를 통해 디올을 직접 대면할 기회가 생겼고, 그의 작업을 경탄해 마지않던 내가 디올에게 고용 의사를 물은 것은 당연했다. 마침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맞춤복으로 고객층을 넓히고 있다가 첫 번째 컬렉션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렇게 그의 책임 재단사로 영입되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아틀리에를 구상할 수 있을 만큼 확신이 섰던 것은 언제였나?
디올 곁에서 3년 남짓 경험을 쌓았던 시기다. 우선 디올 스타일의 나침판인 ‘New Look(뉴 룩: 코르셋에서 해방되었던 여성들의 허리를 다시 강조해 전체적으로 모래시계 형상의 실루엣에 초점을 맞춘 스타일)’을 함께 작업해 얻은 세간의 주목과 3년간 그의 지휘 아래서 내가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배웠다는 자신감이 내 이름을 건 컬렉션을 시작하는 데 엔진 역할을 했다. 큰 디자이너 밑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자신만의 부티크를 여는 일은 그 당시 관습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피에르 가르뎅 스타일’로 넘어가 보자. 당신은 여성스런 곡선을 살린 디올 룩 또는 그 당시 디자이너들의 실용성 디자인과는 전혀 다른 기하학(?)을 응용한 의상으로 첫 컬렉션을 열었다. 21세기인 현재까지도 피에르 가르뎅 오트 쿠튀르의 모티브가 되는 둥글고 미래지향적인 의상들을 반세기 전에 착안할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인가?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둥근 것에 대한 내 집착’일 것이다. 구형(球形)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절대적으로 끌린다는 점이 이유라면 이유다. 지구의 모양과 어머니의 뱃속, 흔히들 상상하는 UFO의 형상 등을 모티브로 만든 의상들, 즉 지구상의 인간들이 입기에 아주 낯선 의상들에 희열을 느낀다.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입을 것만 같은 옷 말이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도 내가 추구하는 의상 스타일은 오늘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내일을 위한 옷이다.
-남성 넥타이 디자인에 이어 당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이 당시 보수적인 패션계에 가져온 충격은 가히 스캔들감이었다고 알고 있다.
1959년이었다.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큰 도구인 의상이 부르주와 부인들의 특권만 정착하는 사실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그런 생각이 길거리 기성복 쇼라는 무모한 도전을 가능하게 했다. 오트 쿠튀르 위원회의 격한 반응은 예상하고 있었다. 상류층의 문화를 흐려놓았다는 이유로 위원회로부터 제명 통보를 받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염려도 내 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패션계의 한 일원으로서 제명을 당할 각오를 하면서까지 그 같은 생각을 행동에 옮긴 이유가 있었다면?
돈 많은 늙은이들만 멋지고 최상의 질을 겸비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 현재의 부를 일구어온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의상을 통한 개성 표현에서는 그러한 차별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싶었다. 파릇파릇하게 피어나는 젊은이들부터 일반 중년들까지 질 좋은 기성복을 통해 그들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친구들을 비롯한 매스컴에서 한결같이 점쳤다. 회원 자격이 박탈된 이상 피에르 가르뎅이란 이름도 3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고. 하지만 3년 뒤에는 모든 디자이너가 앞 다퉈 프레타포르테를 선보이느라 바쁘더라. 패션 역사를 들여다보라. 1940년대 디자이너 중 지금까지 나만큼 건재하게 생존한 사람이 있는지를….
-흉내 내기 어려운 자신감이다. 스물일곱 살이라는 패기 넘치는 나이 덕분이었을 거다. 디올의 뉴 룩 성과로 당시 유명한 모든 패션 잡지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고, 그 이후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니까. 그때까지 쌓아온 것을 모조리 버리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면 기꺼이 그러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신의 이력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르는 사건이 많다. 중국을 비롯해 냉전 중이던 구소련 안에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패션이란 코드의 자본을 처음으로 수출한 사람도 당신 아닌가.
그때 누군가가 지구 반대편은 신천지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완전히 다른 세상 말이다. 내게 익숙해진 것이 아닌 다른 문화에 관심이 지대한 내게 그 말은 신비스런 유혹과 같았다.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 1957년에 유럽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일본을 방문했고 지금까지 일본 여행만 쉰일곱 번을 했다. 동양을 향한 여행이 계속되면서 자국에 갇힌 오트 쿠튀르 세상 너머에 무궁무진한 자본이 숨어 있음을 보았던 건 나도 몰랐던 사업가적 능력이 아니었겠나. 그 능력과 호기심이 조화를 이루어 당시 러시아 대사관의 협조로 까다로웠던 중국 비자를 획득, 1965년에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디자이너로서는 최초의 공산국가 여행이었다. 그런 출장이 잦아지다가 1969년에 첫 중국 컬렉션을 마쳤고, 구소련이 망하기 직전에 모스크바에서 컬렉션을 연 최초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패션과 디자인을 자본화하기 시작한 첫 디자이너란 말과 상통하는가?
물론이다. 파리에 처음 선보인 남녀 기성복 매장은 일류 메종 드 쿠튀르(고급 맞춤복 브랜드)란 명칭에서 피에르 가르뎅 라이선스 회사로 거듭나게 한 시발점이나 마찬가지다. 의류와 디자인 브랜드로는 세계 최고의 규모이며, 한국에도 37개의 피에르 가르뎅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
-특정인들에게는 예술 및 고가의 창작물과 다름없는 디자인을 지나치게 상업화한다는 비난은 어떻게 받아들이나?
앞서 말했지만 나는 디자이너로 출발했지만 다국적 기업을 거느린 사업가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업가로서 최대한 다양한 사람에게 줄 만족을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일류 맞춤복만 고집하는 사람들이 특정 소수라면 최소한의 자본으로 최대한의 만족을 얻고 싶은 이들은 특정다수다. 자본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 대한 투자는 금세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많은 직종의 탄생과 성장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단순히 공장 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패션이란 한 분야만 본다면 디자이너와 재단사, 메이크업 아티스트, 액세서리, 헤어를 비롯해 그들을 평가하는 패션 전문 기자, 포토그래퍼, 수많은 잡지사 관계자들까지 패션으로 인해 파생되어 패션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직종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물론 사업적인 시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지 나를 사업가로 거듭나게 한 패션, 그 속에서도 오트 쿠튀르 정신을 내가 등한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게 고급 맞춤복과 디자인의 상업성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처럼 똑같이 중요한 요소다.
-미식가들의 나라 프랑스에서 1백20년에 가까운 전통을 가진 레스토랑을 소유하는 것만큼 자극적인 일도 없을 것 같다. 디자이너였던 당신이 전혀 색다른 분야인 레스토랑 사업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남다르지 않을까?
1981년 어느 날 당시 자주 들르던 단골 레스토랑 ‘막심(RestaurantMaxim’s)’의 주인인 보다블르(Vaudable) 부부의 저녁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다음 날 당장 아랍의 한 거부에게 레스토랑을 양도해야 할 일이 벌어졌다며 이왕이면 그보다는 내게 ‘막심’을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지적이고 예술적인 분위기 때문에 내가 평소 애착을 가지던 장소가 프랑스인이 아닌 타국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 좀처럼 마음에 내키질 않았다. 레스토랑 운영에 대해서는 무지했음에도 하룻밤 만에 양도 제안을 받아들인 까닭은 안타까운 마음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지 싶다. 결국 그 아랍인이 사인을 하기로 되어 있던 증명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나였고,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에스파스 피에르 가르뎅(Espace Pierre Cardin)을 설명하면?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문화 예술 공간이다. 각각 3백 명, 7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 2개와 레스토랑과 정원 그리고 강의실이 한 개씩 있어 다양한 종류의 이벤트와 전시회를 구상할 수 있는 곳이다. 데필레 파티와 영화 시사회, 기업들의 제품 설명회나 세미나 등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디자인 분야는 물론 사업 분야에서도 대단한 프로필을 자랑한다. 그런가 하면 피에르 가르뎅을 언급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수상 내역이나 명예 회원 자격도 많다고 알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유네스코 명예 대사와 아카데미 보자르 멤버로서의 역할은 무엇인가?
1991년에 유네스코 명예 대사로 임명되었을 때는 유네스코를 위해 기념 메달과 보석을 디자인했고, 재단이 관용의 해로 지정한 1995년에는 콩코드 광장에 개양되었던 6개의 깃발을 제작하기도 했다.
아카데미 보자르는 2009년 현재 멤버가 세계적으로 총 47명에 불과하다. 회원은 단순히 재력과 재능만으로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각 분야에서 누구보다 지식과 견해가 밝은 사람을 선정해 수여하며, 프랑스인이 칭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스런 자격이다. 백과사전 편찬이나 사회 전반적인 사항에도 멤버들의 의견이 수렴된다.
-일반인은 하나도 꿈꾸기 힘든 수많은 역할과 자격을 고령이 무색할 만큼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자신의 성공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단호하게) 당연히 재능이다. 시대적인 운도 따랐지만 절대적인 요인은 내 재능과 그것을 신뢰한 자신감 외에는 없다. 오트 쿠튀르 위원회에서 제명당했을 당시, 재정 결제 더미에서 나를 구원한 사람이 유일하게 나뿐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라. 최연소로 패션에 입문한 나였지만 이제는 최고령으로 건재하지 않나? 오늘날 많은 고급 메종 쿠튀르 중 창업자가 디자인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의 사업을 선두지휘하고 있는 곳은 오로지 ‘메종 피에르 가르뎅’뿐이다.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은퇴를 고려하지는 않나?
(웃음) 울랄라~~. 내 나이 곧 여든일곱 살이 된다. 위로 형제가 둘 있는데 아흔여섯 살, 아흔 살인 것을 감안하면 나도 아직 10년은 거뜬할 것이다. 은퇴를 생각했다면 예순 살에 벌써 하지 않았겠나?
-마지막 질문이다. 무엇이 당신을 이토록 정정하게 유지시키나?
창작에 대한 열정이다. 큰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일이 창조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후반부에 이룩한 사업 내역 역시 창조의 다른 이름이다. 옷을 만들면서 늘 지금껏 존재했던 것보다 앞으로 존재할 것들을 만들었듯이 내 삶을 가득 채우는 것들은 바로 그 미래를 위한 일련의 과정들이다.
지나친 자존심은 오만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단아한 키에 고집스런 자신감을 가진, 자수성가를 이룬 고령자 앞에선 유명한 속담의 끝도 흐려지고 만다. 한국의 3060세대들에게 최초로 각인되었을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망설임 없이 자찬하는 피에르 가르뎅의 오만을 이쯤에서 존경으로 바꾸어 불러야 하지 않을까? 세계가 다 아는 이름. 여든여섯 살의 재력가란 칭호 뒤에서 예술에 대한 정열로 반짝이는 그의 눈이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해발 300m의 바위산까지 솟구쳐 올라오는 지중해를 상상해본 적 있는가? 겨울에도 싱싱한 야자수가 하늘을 찌르는 프랑스 남부의 풍경과 더불어 상상 이상의 광경을 연출해내는 저택이 있다. 프랑스의 해양 요양 도시 칸(Cannes)에서 테울(Theoul)을 향해 끝나지 않을 것처럼 구불거리며 올라가는 국도를 따라 30여 분 정도 차를 몰다 보면 어느 순간 탁 트인 전망에 잠시 호흡이 멈추는 때가 온다. 열대 식물들과 노란 미모사(mimosa)의 봄기운 사이로 붉은 흙과 벽돌로 지은 주택이 드문드문 보이고, 그 사이로 마치 우주의 한 부분을 떼어 옮겨놓은 듯 둥글고 묘한 건물이 하늘과 맞닿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지상의 물체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의심스러운 방울처럼 생긴 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주변의 경관을 향해 이보다 더 훌륭할 수는 없다며 마침표를 찍듯이 절대적인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바위산과 하늘 그리고 바다가 진정으로 일체를 이루는 절경에 자리한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의 휴식처, 팔레 뷸(Palais Bulles, 공기방울 저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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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으로 내려와 팔레 뷸의 중심을 바라본 모습. 왼쪽으로 파티 룸이 이어진다. 야자수는 스페인산. |
공기방울(Bulles)이라는 애칭이 정식 칭호가 된 팔레 뷸과 피에르 가르뎅의 인연은 특이하게 찾아왔다. 1980년 초, 시트로엥 자동차 계열 트럭(Camion Berliet) 생산자의 동업자이자 붉은 바위산으로 유명한 테울의 넓은 부지를 소유한 사람이 가르뎅을 만나고자 했다. 그의 이야기인즉, 유산으로 물려받은 부지에 1975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사업에 위기가 찾아와 완공할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부지의 희소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르뎅의 공사 지원금을 부탁했다. 레스토랑 막심에 대한 투자와 맞물려 있을 때라 고민을 거듭해야 했지만 가르뎅은 평소 좋아하고 친분이 있던 이탈리아 건축가 앙티 로박(Antti Lovag)에게 프로젝트를 맡긴다는 조건하에 투자를 결심하기에 이른다. 팔레 뷸이 이 시대에 지니게 될 명성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내 자본이 허락했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데 투자한 결과지요.”
피에르 가르뎅의 회상이다.
“앙티 로박의 작품은 그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자연 조건과 그 지방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현지 재료들을 이용하는 그의 작품 세계가 좋았고, 특히 내가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쏟는 원형 공간 제작자라는 데 이견이 필요 없었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투자를 부탁했던 부지 주인은 사업 실패에 대한 충격으로 심장병을 얻어 사망했고 프로젝트는 고스란히 가르뎅의 것으로 남았다.
자금에 대한 걱정은 해소되었지만 팔레 뷸을 몇 년 안에 완성하지는 못했다. 공사를 시작해서 실제로 완공을 맞은 때는 1990년. 자그마치 15년의 세월이 흐르고 난 뒤다. 바위와 잡목들이 무성했으며 해발 300m의 급경사라는 난항들에 부딪히면서도 자연 조건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겠다는 건축가 로박의 도전장은 사실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을 일이다.
“첫 공사는 10년이 되기 전에 마쳤습니다. 이 휴양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가르뎅 씨의 완벽주의가 개축에 재축을 거듭해 나간거지요.”
15년째 팔레 뷸의 관리를 맡고 있다는 리처드의 말이다.
“쓰레기 저장고의 출입구마저 그의 이니셜을 따서 P와 C 형상을 갖추기를 원한 분이었으니까요. 보다시피 팔레 뷸 내에서는 정문 입구부터 마지막 층까지 직선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최근까지도 크고 작은 보수 공사를 마칠 때마다 한 곳이라도 직선이 보이면 보다 둥글게 개조하기를 바라세요. 그러다가 공사 후반부에는 외부에서 그의 개인 아파트로 바로 연결되는 문과 통로도 확장하게 되었고요. 완공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현재 피에르 가르뎅 휴식처의 총관리인으로 아내와 함께 팔레 뷸의 잔디 보호, 야자수와 정원 관리, 수영장 물 조절, 파티 이벤트 협조, 청소 등을 맡아 가까운 칸에서 매일이다시피 출퇴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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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가르뎅의 아파트 테라스에서 지중해 정면을 조망한 모습. 잔잔한 지중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
내부 면적 1,200㎡, 정원과 수영장 그리고 야외극장 등 외부 시설들을 포함하면 8,500㎡에 달하는 이 어마어마한 팔레 뷸은 애칭에서도 확인되듯 건축가 로박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살려 모든 공간이 둥글게 구성되어 있다. 집은 가르뎅의 아파트가 있는 1층과 몇몇 스위트의 낮은 1층들을 제외하고 모두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를 이룬다. 이렇게 내려갈 수 있는 층은 지하 5층까지. 지하라지만 언덕에 자리한 지리적인 조건과 모든 스위트가 바다를 바라보는 형태로 지은 덕에 지하 5층도 채광이 문제되는 방은 없다. 작게는 50㎡, 크게는 165㎡인 방울 한 개의 공간이 26개에 달하는 특이한 구조들은 하나의 기다란 복도로 예외 없이 연결된다.
“마치 인간의 오장육부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요.”
피에르 가르뎅의 표현이다.
“사람의 몸속에 있는 여러 가지 둥근 형태의 기관이 긴 십이지장과 연결되어 있는 그림을 상상하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물론 사람 내장과 팔레 뷸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를테면 꼭 그런 느낌이 든다는 말이지요.”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입구에서부터 각각의 스위트로, 정원으로 또는 다른 방향의 복도로 인도하는 긴 메인 복도는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공간을 이루는 데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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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복도와 리셉션 공간이 만나는 곳에 있는 스위트는 회의실이다. 합성수지로 주문 제작해 설치한 문을 열면 UFO의 내부처럼 둥그렇고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회의실은 팔레 뷸의 외부에서 받은 느낌을 그대로 이어간다. 군데군데 뚫린 둥근 창들, 둥근 탁자와 의자,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설치된 빨간 합성수지 의자 세트, 거기에 피에르 가르뎅 가구 컬렉션의 초창기 작품들인 램프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창문으로는 지중해가 보이고 바로 아래층의 파티 룸 단면도 볼 수 있다. 회의실 옆에는 작은 층계를 따라 연결되는 다른 공간이 있는데 서재나 집무실로 사용 가능하다. 환한 파스텔 톤의 벽 한 쪽에는 프랑수와 로방(Francois Lhauvin)이라는 젊은 아티스트의 벽화가 아늑함을 더한다. “평균 나이 25~26세의 신인 작가 8명을 선별해 방의 벽화를 맡겼습니다. 이미 명성을 얻은 아티스트들을 고를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재능 있는 작가들에게 먼저 기회를 주고 싶었으니까요.” 피에르 가르뎅의 말은 그가 재단주로 있는 에스파스 피에르 가르뎅 내 젊은 아티스트 육성회로도 확인이 가능하다.
 | ▲ 팔레 뷸의 정식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제일 먼저 완성한 공간인 로방 회의실. 둥근 창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이곳은 레드 컬러 합성수지로 만든 의자까지도 둥글다. 카펫과 테이블, 의자 모두 피에르 가르뎅의 디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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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방 회의실을 나와 정원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따라가는 중간에 브르토 스위트가 나온다. 블루 계열 색상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침실이 마련된 스위트 중 팔레 뷸의 입구와 가장 가까이 자리한다. 관리인 리처드는 태초의 방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한다. 아티스트인 브르토의 벽화와 문 입구에 놓인 부화되는 알 조각상 등 생명이 완전한 형태로 세상에 나오기 전의 디자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우주의 어느 곳에 버려진 느낌이기도 하고, 착상할 곳을 향해 여행하는 올챙이의 모습 등이 왠지 신비로운 방입니다.” 60여 년간 생명이 자라는 어머니의 자궁이나 우주의 아늑함을 갈망하며 작품을 디자인해온 가르뎅의 설명이다. 리처드의 말처럼 곡선만이 존재하는 공간의 침대 역시 둥글게 맞춤 제작해 들여놓았다. 침실이 있는 나머지 스위트의 침대는 모두 크기와 형태가 동일하게 통일되어 있다. 하긴 이렇게 둥근 공간 안을 직사각 침대가 차지하고 있었다면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으리라. 디자이너의 선택이 수긍되는 부분이다.
 | ▲ 8명의 젊은 아티스트가 각기 개성을 살린 스위트룸 10개로 이루어진 팔레 뷸. 그중 태초의 신비로운 세계를 주제로 작가 브르토의 스타일을 입힌 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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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토의 방을 나와 계속 아래로 내려가면 팔레 뷸의 중심이라 할 만한 정원이 기다리고 있다. 햇볕이 내리쬐는 8월이나 구름으로 뒤덮인 3월에도 이 높은 언덕까지 전해지는 지중해의 생동감이 가슴을 탁 트이게 만드는 곳이다. 햇빛의 변화에 따라 얼굴이 바뀌는 아름다운 복도가 왼쪽이고 정면으로는 팔레 뷸의 덩치에 비해 아담한 잔디 정원과 수영장, 오른쪽으로 100㎡에 달하는 파티 룸이 있다. 큼직한 구멍이 여러 개 뚫린 복도의 외벽은 마치 어느 행성의 분화구와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날씨가 화창할 땐 더없이 좋지만 불어오는 바람이나 날씨 변동에 날려 들어오는 먼지로부터 집을 완벽히 유지하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피에르 가르뎅의 휴식 공간이자 한편으로는 페스티벌이나 각종 이벤트를 위해 임대하기도 하는 공간인 만큼 리처드 씨의 저택 관리는 하루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나 쌀쌀한 꽃샘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날씨에도 키 큰 야자수가 바다와 저택을 가르는 초록 잔디 정원에 서서 지중해의 경관을 감상하노라면 관리의 괴로움쯤 쉽게 잊을 것만 같다. 여기에서 보는 테울의 절경은 말 그대로 그림이 되고도 남으리라. 팔레 뷸을 등지고 정원에서 오른쪽으로 눈길을 주면 최고 깊이가 3m인 수영장과 뒤쪽으로 파티 룸이 접해 있다. 수영장은 물놀이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가르뎅의 컬렉션이나 외부 리셉션에 무대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 실제로 2008년 여름컬렉션을 피에르 가르뎅은 이 수영장 주변에서 개최했다. 에페 드 미로와(Effet de miroir : 거울 효과)를 도입해 설계한 수영장이지요. 이곳에는 총 3개의 야외 수영장이 있는데 모두 똑같은 시스템으로 디자인해 설치했답니다.” 디자이너의 설명이다. 거울 효과 시스템이란 수영장에 들어가거나 고개를 땅에 가까이 해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 수영장과 뒤에 이어지는 풍경에 경계가 없는 것을 말한다. 팔레 뷸의 경우 지중해의 수평선 또는 하늘과 수영장의 물 표면이 맞닿아 있는 듯한 효과를 낸다. “안전 문제 때문에 웬만한 집 시공에는 고려하기 힘든 시스템이에요. 그만큼 시공 가격도 만만치 않고요.” 리처드가 덧붙인다. 아무튼 이 장소는 이 정도로 까다로운 시설의 수영장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 ▲ 집의 메인 복도 끝에 서면 미니 수영장이 보인다. 미니 수영장은 가르뎅 아파트의 개인 수영장 물이 흘러내려 고인 연못과 같은 곳. 멀리 토굴처럼 뚫린 구멍은 다른 스위트룸으로 연결되는 계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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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돌려 다시 들어간 파티 룸의 중앙 홀 바닥은 이탈리아산 대리석을 사용해 동심원 형태로 마감한 곳이다. 파티를 위해 사용되는 만큼 공간 대부분이 비어 있지만 천장에서 떨어지는 대형 반구와 에멘탈 치즈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고 움푹 들어간 형이상학적 형태들 때문에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르뎅의 창작물들로 장식한 정면 무대에서는 가끔 음악가들의 공연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곳 역시 타원형 창으로 되어 수영장과 바다를 감상하는 데 문제가 없다. 파티 룸 안쪽에는 가르뎅이 휴양차 이곳을 찾을 때 지인들을 초대해 만찬을 여는 공간이 따로 있다. 다이닝 룸에서는 파티 홀 중앙을 통하지 않고 수영장과 정원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있어 곧장 바깥 공기를 느낄 수 있다.
 | ▲ 회의실과 브르토의 방을 거쳐 내려오면 수영장을 접한 파티 룸이 나온다. 중앙의 넙적한 의자는 코끼리 안락의자(Siege elephante), 정면과 측면의 직물 작품, 미래형 TV까지 모두 피에르 가르뎅 컬렉션. 천장의 반구 형태 공간은 회의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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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중간에 2개의 또 다른 스위트가 있다. 이번에는 바다 속 풍경을 연상하게 만드는 산호빛 방이다. 거친 느낌의 주트 천과 지방산 진흙을 이용해 벽을 마감해서인지 브르토의 방보다 한결 따뜻한 느낌이 든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침대 커버는 벽과 같은 산호색으로 처리했다. 마침 살며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스위트의 작은 테라스와 통하는 문을 비추고 있었는데 합성수지 소재의 오렌지색 문 사이로 빛이 통과하는 광경은 꽃이 만개하는 순간의 신비로움과도 닮아 있었다. 이 방의 특징은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정원에서 본 장관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 별이 반짝이는 최고급 호텔의 서비스도 부럽지 않은 매력적인 스위트다.
 | ▲ 산호색과 자연 소재를 이용해 꾸민 스위트. 각 스위트마다 놓인 둥근 침대가 공간의 구조와 잘 매치된다. 바다 느낌이 나는 소품들로 장식해 실내에도 바다의 멋을 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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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뚫린 외벽을 통해 햇살의 축복이 만연한 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구부러지면 가르뎅의 개인 아파트에 닿는다. 일반적으로 도심 속에 층으로 나뉘어 분리된 공간을 일컫는 아파트는 실제로 유럽에 귀족이 존재했던 시절, 그들의 대규모 성안에 보다 작고 사적인 분위기를 살린 개인 공간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가르뎅 역시 팔레 뷸에서 혼자만의 공간이 아쉬웠을 법하다. “팔레 뷸이 일반적으로 한 개인이 생활하기에는 불필요하게 큰 공간이니까요. 너무 크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안락함이 감소하게 마련이지요.” 리처드의 짐작이다. 아파트는 계단을 올라가 다시 복도를 따르고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너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미로 같은 과정을 거쳐야 닿는다. 물론 가르뎅은 3차 공사를 통해 따로 낸 문으로 곧장 아파트에 닿는 길로 출입한다. 아파트의 문을 열면 특이하게 주방이 맨 처음 자리하고 있는데 가르뎅이 인정한 요리 솜씨를 가진 리처드의 아내가 요리사라고. “가르뎅 씨는 여행을 다니며 세계에서 이름난 음식을 먹다가도 제 아내가 만드는 푸짐한 음식이 그립다고 칭찬할 때가 많습니다. 제 아내를 자신의 정식 요리사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리처드의 자랑이 이어진다. 밝고 화사한 주방을 지나면 가르뎅 아파트의 모습이 드러난다. 넓은 공간은 4개의 크고 작은 방울 공간들로 다시 나뉘는데, 한쪽은 식사가 가능한 탁자가 있고 그 위에 그가 세계 여행을 하며 수집하거나 선물로 받은 컬렉션들을 진열해두고 있다. 탁자 옆에는 파티오(위쪽이 트인 건물 안의 안뜰로 주로 스페인과 남아메리카에서 흔히 보인다)의 형태를 흉내 낸 미니 정원이 부족했을지 모르는 2%의 햇빛을 선사한다. 아파트는 구조적으로 보아 크게 6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주방과 식사 공간, 아파트 중앙과 응접실, 계단을 올라 도착하는 메자닌(법적인 층고를 유지하면서 층과 층 중간 부분에 라운지 같은 또 다른 공간을 만든 것)과 그보다 더 깊숙이 자리한 가르뎅의 침실이 그것이다. 침실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팔레 뷸에서 가장 협소한 공간의 메자닌이 있는데 조용히 독서를 하기에 손색없이 아늑한 곳이다. 그렇지만 바로 아래 응접실과 천장을 공유하는 메자닌의 특성상 막힘이 없고 응접실에서 전망하는 바다 풍경을 함께 누릴 수도 있다.
 | ▲ 1 아파트 주방을 지나면 크고 작게 분할된 공간들이 하나의 커다란 공간을 이룬다. 사진은 아파트 입구와 통하는 곳. 정면은 소형 파티오가 있는 식탁 공간, 오른쪽으로는 지중해가 펼쳐지는 응접실로 구성되었다.
2 아파트 입구 중심부에서 미니 파티오 방향을 바라보니 공간의 아기자기함이 한눈에 들어온다. 식탁 위 장식품들은 유리공예로 유명한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등을 여행하며 모은 물건이고, 식탁과 의자는 모두 피에르 가르뎅 컬렉션. 오른쪽으로 보이는 야생화 형상 의자는 팔레 뷸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미지 세계, 인류의 탄생구나 다름없는 여성의 자궁을 형상화한 그의 작품이다.
3 가르뎅의 응접실에 앉으면 지중해와 야자수가 눈앞에 가득 찬다. 소파는 내부 분위기에 맞게 맞춤 제작하고 둥근 쿠션들로 포인트를 주었다. 프랑스의 아트 갤러리에서 구입한 협탁과 양옆에 세워둔 램프는 피에르 가르뎅 가구 컬렉션의 초창기 작품들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난로 역시 동그랗게 맞췄다 하니 가르뎅의 완벽주의가 놀라울 뿐이다.
4 가르뎅 아파트의 메인 욕실에는 지중해 햇살이 가득하다. 세련된 욕실 가구들을 보며 역시 디자이너의 공간임을 확신하게 된다. |
이곳에서 다시 작은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디자이너의 침실과 욕실이 나온다. 젊은 아티스트 제롬 티스랑(Jerome Tisserand)이 부분 벽화를 완성한 공간은 전체적으로 블루마린과 레드 그리고 옐로 3가지 컬러가 조화를 이룬다.다른 공간과 마찬가지로 둥근 침대가 있고 곳곳에 둔 의자와 램프 등은 모두 가르뎅의 초창기 컬렉션이다. 팔레 뷸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은 남다르다. 리처드의 귀띔에 따르면 가르뎅이 이곳에서 낮잠 자는 걸 아주 즐긴단다. 침실은 유리문으로 출입이 가능한 개인 테라스가 겸비되어 있기도 하다. 응접실로 방향을 바꾸어 다시 내려오면 2가지 경로의 가능성이 있다. 응접실로 난 유리문으로 가르뎅의 개인 수영장과 피크닉을 하고 싶게 만드는 테라스로 나갈 수 있는가 하면, 내려온 나선형 계단을 쉬지 않고 내려가는 방법이 그것이다. 아래로 내려가는 쪽을 택하면 알라딘이 램프를 찾으러 내려간 지니의 동굴에서 금은보화를 발견하는 것처럼 새로운 스위트들을 구경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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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오픈 장식장이 있는 방이 반기는데 채광에 전혀 문제가 없으면서도 다른 방보다 한층 안락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마 바닥과 벽까지 마감재로 쓴 카펫 재질 덕분인지도 모른다. 벽을 따라 곡선으로 짠 장식장이 이 방의 주인공. 가르뎅이 세계를 여행하며 지인들로부터 받은 선물이나 직접 구입한 공예품으로 채워져 있다. 그 방을 나와 다시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노란 가벽이 손짓하는 스위트룸이 있다. 아티스트 제라르 레클로아렉(Gerard Lecloarec)이 채색을 맡은 방으로 파우더 공간이 마련된 정면과 가벽 뒤로 드레싱을 하도록 배려한 곳. 원색을 많이 사용한 벽의 그림들이 왠지 청소년기를 벗어나는 남학생이 쓰기에 어울릴 것 같은 공간을 만든다.
 | ▲ (왼쪽) 피에르 가르뎅의 아파트에서 계단을 내려오다 만나는 첫 번째 스위트. 다른 곳과 달리 벽과 바닥, 가구들 대부분이 카펫 소재로 핑크와 아이비 블루의 조화가 세련미를 더한다. 벽을 따라 둥글게 주문 제작한 장식장에는 60여 년간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수집하거나 선물 받은 장식품들을 진열해두었다.
▲ (오른쪽) 레클로아렉 스위트의 침실. 옐로 컬러로 들뜬 마음을 보색인 블루로 가라앉히고 있다. 우주선이 연상되는 레클로아렉의 그림이 신비로움을 더한다. 정면의 삼각형 가구와 측면의 거울은 피에르 가르뎅 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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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 뷸의 가장 아래쪽, 즉 정원과 집 입구에서 보면 지하로 오랜 여행에서 집에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을 때의 느낌처럼 편안한 기분에 잠기게 되는 스위트가 있다. 저택의 중심과 떨어져 있어서 특별히 배려한 것일까? 10개의 스위트 중(가르뎅의 아파트 제외) 유일하게 주방과 거실이 따로 배치되어 있다. 가르뎅의 아파트 다음으로 큰 방울 공간이기도 하다. 층계 2개를 올라가 둥글게 이동하도록 설정한 이해심 있는 구성이나 따로 배치한 샤워실과 욕실 그리고 구불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개인 메자닌이 하나의 독립된 아파트로 사용하기에 손색이 없다. 지루한 주방 일을 할 사람을 위해 싱크대 정면으로 낸 위블로(둥근 창) 역시 가르뎅의 아파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일 마지막에 완성한 스위트입니다. 일반적으로 집을 지을 때 가장 아래층에서 시작해 위에서 마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팔레 뷸은 맨 위층의 회의실을 먼저 완성하고 점차 아래로 내려오는 형식으로 공사를 마쳤어요.” 지리적인 구조로 보았을 때 공사의 역행은 당연한 일이었을 거라는 리처드의 말이다.
 | 1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마지막 스위트에는 주방과 거실을 따로 마련해 독립적인 공간을 꾸며놓았다.
2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확 뚫린 채광창을 통해 기분 좋은 일광욕을 즐길 수 있다.
3 가르뎅의 개인 응접실에서 침실로 올라가는 층계에서 브랜드의 로고 디자인을 발견할 수 있다. 공간 디자인만으로 이니셜 P와 C를 읽게 하는 재미난 아이디어다. |
이 방을 끝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방법과 마지막 방에서 정원 아래쪽으로 나와 위로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아래에서 방울 형상을 바라보니 육중하기보다는 어렸을 때 후후 불던 비눗방울 놀이를 문득 떠올리게 한다. 캘리포니아 야자수의 키는 더 크게 솟아오르고 지중해는 더 가까이에서 구경꾼을 유혹한다. 정갈하게 손질한 나무들을 따라 오르면 팔레 뷸의 형상도 조금씩 눈높이와 맞추어진다. 크기의 방대함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을 떠올리다 보면 홀연 이보다 더 자연과의 완벽한 조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다소 기이한 형상과 자연이 이뤄낸 아름다운 일치로 피에르 가르뎅만큼이나 유명한 조형물이 된 팔레 뷸이지만 관리에 들어가는 돈은 막대하다고 한다. 미관 관리를 위해 방문자가 없어도 흐르는 수영장의 물(지하에 설치한 필터가 물을 정화시켜 다시 올려 보낸다)의 전기 사용료나 정식 지붕이 없어 비가 올 때마다 방울 겉면을 타고 내리는 빗물들의 흔적, 높은 지대의 야자수가 찬바람을 맞아 얼지 않도록 신경 쓰는 일 등 언제 어떤 경유로 임대를 요청받을지 모르는 대형 이벤트들을 위해 관리인 리처드는 쉴 새가 없다고. 그렇다 한들 피에르 가르뎅의 팔레 뷸에 대한 애착은 흔들리지 않는다. 수영장 가장자리에 피곤한 날갯짓을 멈추고 잠시 내려앉은 갈매기처럼 패션계의 역사, 위대한 가르뎅이 파리에서 날아와 달콤한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지중해가 선사하는 가장 큰 격려일 테니 말이다. |
자료제공 | 리빙센스 진행·글|오윤경(파리 통신원) 사진|Gleichauf Nicola(인물) & 메종 피에르 가르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