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督敎 信仰人으로서 古堂 曺晩植
이 만열(숙명여자대학교 교수)
1. 古堂 曺晩植
古堂 曺晩植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일제 강점기와 해방 초기에 걸쳐 교육 경제 언론 체육 정치 등 근대 한국의 민족 민주 통일 운동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선생이다. 그는 풍운이 감돌던 19세기 말 음력으로는 1882년 12월 24일(양력 1883년 2월 1일) 평양의 진향리에서 한학의 조예가 깊었던 昌寧 曺氏 景秅과 慶州 金氏 敬虔을 부모로 하여 외아들로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본적은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이었다.
그가 태어났던 1882년은 壬午軍亂으로 한국의 신구세력이 치열한 대결을 벌이던 해이기도 하지만, 그 해 5월에 미국과의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져 한국이 서양에 대해 문호를 처음 개방한 해이기도 하다. 1876년 일본과 국교를 튼 조선은 청 나라의 권유를 받아들여 서양 제국과의 국교를 터서 개화를 도모하기로 하였다. 미국과 국교를 맺은 후 이어서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도 국교를 맺게 되었다. 白凡 金九가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 맺어지던 해에 출생, 거의 평생을 일본에 대결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고당 조만식은 미국과의 국교가 트여진 1882년에 출생하여 미국 선교사와 기독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역사에는 가끔 이렇게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우연스럽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고당 조만식에 대하여는 그분이 위대했던 그만큼 그 동안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번의 학술대회에서도 종합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그 동안 고당에 대한 연구가 거의 교육자로서 혹은 물산장려운동의 실천자로서 또는 해방 후의 정치가로서의 모습은 부각시켰으나, 이러한 그의 삶의 근원이 되는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서는 단펀적으로밖에는 언급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이번 학술대회에서 '종교인으로서의 고당 선생'을 발제의 하나로 올려놓은 데에는 종래 그에 대한 이같은 연구경향을 반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은 그의 생애를 전환시킨 기독교 신앙과 그와 관련된 기독교 활동을 살피는 데에 초점이 있다. 그는 기독교에 입신한 이후 곧 선교학교인 숭실학교과 관련을 맺었고 일본에 유학할 때에는 동경에서 장 감 연합교회를 설립하는 데에 협력하였으며, 귀국해서는 기독교학교인 오산학교와 숭인상업학교에서 가르쳤고 평양 YMCA 총무에 산정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으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에는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를 격려하며 그가 용감하게 그 반대투쟁을 선도하도록 뒷받침했던 것이다. 그의 생애를 일별해 볼 때, 대부분의 사회적 민족적 활동은 어쩌면 기독교 신앙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느낍조차 갖는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그의 일생의 활동을 기독교적인 활동 내지는 관점과 관련시켜 살펴보는 것은 어색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반대로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활동이지만 기독교와 관련되지 아니했다는 필자의 판단 때문에 언급되지 않을 부분이 있을 것임을 미리 전제해 두고자 한다.
2. 기독교 신앙 입문
고당 선생의 연보에 의하면 그는 1888년 7세때부터 평양의 관후리에 있는 한학자 張正鳳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이 때 같이 공부했던 학우로는 뒷날 그의 기독교 입신의 계기를 마련해 준 韓鼎敎와 평생을 그와 동지적 관계에 있던 金東元이 있었다. 1896년 15세 때에 일단 한문수학을 마친 듯한데, 이 때에 익힌 한문은 40여세에 이르러 민족적인 고뇌로 괴로와할 때 때때로 익명의 한시를 남기게 했다. 한문수학을 마친 그 이듬해 1897년부터 그는 상업활동에 종사하게 되었고, 1904년 2월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상업을 그만두고 3월 13일 가족을 따라 대동강 중류 베기섬(碧島只里)로 피난하였다. 그가 기독교에 입신하고 곧 금주 단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즈음인 듯하다. 그 이듬해 1905년에 그는 선교사 베어드(W.M.Baird 裵緯良)가 1897년에 설립한 숭실학교(중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연보에는 없지만, 그가 선교사를 만나고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 것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열한두살 때라고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장황하지만 뒷날 그의 기독교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용해 보겠다.
"서양인을 처음 보던 감상은, 아이 때의 일이 되며 잘 생각되지 아니하나 기억에 남아있는 몇가지만 말씀하면 이러합니다. 내가 서양인을 처음으로 보기는 열한두살 되었을 때 즉 임진년(1892)인가 계사년(1893)인가라고 생각되며, 보았던 곳은 대동문 안 술막골 한석진 목사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목사의 맏 자제 고 民濟 兒名 갑손이는 나의 글동무였습니다. 이 집에 서양인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늘 놀 겸 구경 겸 자주 가서 서양인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서양인이 아니고 '洋鬼子'였지요. 이 양귀자는 馬布三悅목사였는지 혹 다른 목사였는지 그 때는 물론이오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커먼 옷, 커다란 눈, 높은 코, 참말로 모든 것이 무섭다기보다는 놀랍고 이상스러운 눈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다가 그 때 일반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양귀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약을 먹여서 미치게 하는데, 약 먹이는 방법은, 몰래 얼른 입에다 슬쩍 스치기만 하면 곧 미쳐서 양귀자가 하라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모양, 그런 말 때문에 더욱 자주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때마다, 양귀자 냄새나는 책자를 줍디다. 지금 생각하니 이 책자는 한문으로 번역하여 인쇄한 쪽복음 즉 마태복음 누가복음 기타 부속서류인 引家歸道 臨慧入門(sic. 德慧入門인듯) 등과 같은 조그마한 전도서류이었는데 洋紙 냄새와 印刷墨 냄새들이 그렇게 변하여 양귀자 냄새로 되었던 것인데, 그 냄새가 역시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인가 하여 좀 맡아보고는 내어버리던 것이 어제와 같은데, 벌써 40여년 전(1890년경)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묵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1892년에 들어서면서 선교사 마펫(S.A.Moffett, 馬布三悅)과 그래함 리(Graham Lee, 李吉咸)를 평양에서 활동하도록 하고 韓錫晉을 조사로 이 곳에서 함께 활동하도록 하였다. 고당은 어린 시절 한석진의 아들 민제를 글동무로 삼아 그의 집에 드나들면서 선교사를 만나 그가 주는 마태복음 누가복음 등의 쪽복음 성경과 <인가귀도>와 <덕혜입문> 등의 전도문서를 접한 적이 있어서 기독교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그가 선교사를 '양귀자'라고 회상하였던 것도 당시의 다른 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선교사에 대한 그런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1894년 평양에서도 기독교인 박해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다 한때 그와 상업을 같이 한바 있는 어린 시절 글돔무 한정교의 전도로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아마도 술과 환락으로 그의 상업이 거의 거덜난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상업에 실패하고 홧김에 놀음을 계속할 때에 어떤 분이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해보라는 권고에 그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숭실학교의 문을 두들겼다고 한다. 그의 기독교입문과 숭실학교 입학은 장사에 실패하고 난 뒤에 이루어진 변화다. 인간의 실패는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사실은 고당의 생애에서도 나타난다. 숭실학교 입학과 관련,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숭실학교에 입학할 결심을 했고 아버님에게 승락을 받은 선생은 지금까지의 술동무, 화류계 동무들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명목으로 그날 밤이 새도록 餞別酒를 마셨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장관이거니와 밤새워 술을 마시어 아직 입에서는 술내새가 나고 발걸음을 갈지자고 걷게 되는 작취미성의 몽롱한 꼴을 하고도 좌우간 숭실학교를 찾아가 당시 설립자요 교장이던 고 배위량(裵緯良 미국인) 박사를 만나 입학을 요구했다. 배 박사는 조선생의 곤쓰고 주정뱅이 같은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공부는 무엇하려구 하겠나" 하면서 숭실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없다는 표시이었으나, 조 선생은 지금에도 어떻게 그러한 걸작의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 하고 대답을 한 것이 배 박사를 감격케 하여 "좋소!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으로 공부하시오" 하면서 조 선생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한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생활과 숭실학교 교육을 받게 되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방탕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전혀 새로운 생애를 걸어가게 하였다. 그는 이 때부터 40여년간 금주 단연하는 생활을 철저히 지속하였다.
고당의 기독교 입신과 관련하여 연상되는 한두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 평안도 지역에서 기독교의 수용이 우리나라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빠르고 광범위하였으며 또 다른 지역보다도 신자화와 교회설립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평안도 지멱은 복음선교사의 입국 이전에 만주에서 번역, 보급된 성경의 영향과 서간도 지역에 진출했던 한국인들의 기독교 개종으로 광범위하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다. 둘째로 이 지역은, 숭실학교를 건립한 선교사 베어드(W.M.Baird, 裵緯良)의 지적처럼, 일찍부터 '자립적인 중산층(Independent middle class)'이 우세하였고 이들은 새로 수용된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서북지방에 기독교가 번창하게 된 요인이다. 이들은 기독교가 이 지역에 보급되었을 때에 기독교를 통해 개화운동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앞장 서게 되었다. 조만식을 비롯하여 이승훈 안창호 등이 중산층 계급으로서 뒷날 기독교에 입신하여 민족운동에 나섰던 것은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그가 숭실에서 어떤 신앙훈련을 쌓았는지 남은 기록이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가 1905년 입학했을 때에는 설립자 겸 교장이었던 베어드와 한국인으로 朴子重이 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베어드는 맥코믹 신학교 출신으로 당시 시카고의 진보적인 신앙사조에 대항하여 설립된 그 학교의 출신답게 마펫 등과 함께 선교사로서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면서도 당시 한국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감안, 교육자로서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선교를 꾀하고 있었다. 조만식은 당시 선교사들이 가졌던 보수적인 신앙과 함께 베어드가 가르치는 '사회적 구원'의 신앙을 감명깊게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베어드가 말했다는, "내가 조선에서 전도할 새 조선인은 내세 영혼의 천당구원을 위함보다 현재의 사회적 구원 즉 실제생활에서 구원을 얻으려함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을 인용하곤 하였다. 이것은 그가 베어드로부터 어떤 점에서 감화를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당이 학생이었을 때에 한국인 교사로서 박자중이 약 1년간 가르쳤을 것이다. 그는 1895년에 기독교에 입신하였고 처음에 소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1900년에 중학교 교사로 전임하였다. 박 선생은 "성품이 온화하고 지추가 청한하며 행위가 단아하고 학문이 깊고 지식이 넓어 일찍이 세상에서도 꽃다운 이름을 얻은" 분으로 교회에서는 장로추천까지 받았으나 1906년 56세로 돌아갔다. 장례 때에 숭실의 소중학교와 온 교우 형제자매 수천여명이 그 상여 전후에 호상한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흠모가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교사 박자중도 고당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당은 23세에 입학한 숭실에서 '신학문'을 공부하고 기독교 신앙에 접함으로 세계관을 넓히고 과거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는 등 '거듭난'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당은 학생 시절을 회상한 적이 있다. 학생 때에 개화한 사람은 양안경을 끼어야 한다는 법이라 하여 미국으로부터 도수가 맞지 않은 금테 안경을 쓴 것이며, 숭실도서관 근처에서 쉬는 시간에 담배쟁이들이 모여 망을 보며 몰래 담배질을 하던 것이며, 운동회 때 紅帽를 쓰지 않도록 항의한 일 등도 있었지만 "모든 학과의 과목이 새롭고 새로우며 또한 신기하여, 이런 학문을 내가 왜 이제야 배우게 되었는가 하는 晩時之歎이 생"겨서 열심히 공부하여 無等(1학년의 예비급)으로 입학한 그가 1년후에는 2학년으로 승급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을 통한 새 생활의 재미를 '무엇이라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느겼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통해 그는 많은 기쁨을 맛보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숭실 시절을 이렇게 결론내렸다.
"공부하고 기도하고 또 전도하고 그러고는 학우들끼리 즐겁고 웃고 놀고 불규칙하나마 운동하고 이렇게 학우들은 친밀이 사귀며 지냈다. 여기는 반목도 질투고 시기도 파벌도 彼我도 다 없는 참사귐이었으며 참 낙원이었다. 이것이 순진한 초대 학생이었는가 보다. 옛날의 그 일이 퍽 그리워진다."
고당은 뒷날 '白光'지와의 인터뷰에서 숭실학교 시대에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우를 소개하라는 질문에, "무어 가깝다는 것보다도 그 때 동기생으로 林鍾純 朴尙純 金得洙 故 孫貞道 등 제씨였지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이 중 임종순 박상순 손정도는 한국교회사 및 한국민족운동사에 남는 인물들이고, 김득수는 생물학자요 교육자며 좋은 신앙인으로 평양의 광성중학교의 교장과 평양 YMCA 발기인으로도 활약한 이다. 처음 무등으로 입학했을 때는 13명이었으나, 그가 월반하는 등 변화가 있었으므로 숭실중학 5회로 같이 졸업한 이들은 23명이었고, 고당이 거론하지 않은 인물 중 이성휘 선우혁도 쟁쟁한 분들이었다.
이렇게 고당은 1905-1908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어가는 시기에 숭실에서 좋은 벗들을 사귀며 자신으로서는 새로운 신앙에 심취하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숭실과 기독교 신앙, 그의 생애에 함께 닥아왔던 이 두 사건은 조만식을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제 그의 생은 이렇게 수용한 기독교 신앙을 근거로 해서 전개되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3.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 - 東京 유학생 시절
고당은 숭실을 졸업하자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신앙으로 무장된 그는 처음 그가 숭실에 입학할 때 베어드 교장에게 약속했듯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더 배워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1908년 3월에 숭실을 졸업하고 4월에 동경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하여 거의 3년간 영어를 전공하였다. 이 때 고당은 비로소 인도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그의 무저항주의와 채식주의에 철저히 공명하였다. 뒷날 그가 한국의 간디로 추앙받게 되는 것은 이런 계기가 있었다.
29세에 영어학교를 졸업한 그해 1910년 그는 다시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도 같아 많은 우국지사들이 조국을 떠나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계속 일본에서 공부하려고 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을 것이다. 논리 못지 않게 이를 가능하게 한 요인은 그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일시적인 분노와 좌절을 절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점은 그뒤 그가 한때 망명의 길을 택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강점기에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일신의 안녕을 포기하고 평양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북한의 민중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결심한 데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그의 신앙은 연륜을 쌓아감에 따라 점차 성숙되어 갔다. 신앙은 듣고 가르침 받는 것을 통해서도 성장하지만, 봉사를 통해서도 성장하는 법이다. 고당은 동경에서는 한인교회의 설립과 연합 그리고 영수의 책임을 맡았고, 귀국 후에는 오산 광성 등 기독교학교에서 성경교수와 설교를 통해, 산정현교회의 장로로 그리고 평양 YMCA의 총무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이제 한국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한인들에 의한 '동경교회'가 설립된 것은 1908년이며 유학생들과 관련이 깊었다. 1876년 이래 한국인들의 일본유학이 시작되었는데, 1908년 교회가 설립될 때에는 동경유학생이 관공립학교를 통털어 270명이나 되었다. 유학생들을 위해 1906년 8월에 '在日本東京 朝鮮基督敎 靑年會'가 창립되었고, 이 때 조만식은 청년회 창설자의 한 사람이었다. 청년회관에는 주일마다 학생들이 모여 예배하고 있었다. 동경의 청년회 총무를 역임한 白南薰의 증언에 의하면, 1908년에 鄭益魯 장로가 평양으로부터 국한문 옥편을 편찬하기 위해 동경에 와 청년회관에 유숙했다. 앞으로 유학생이 많아질 것에 대비, 정 장로는 교회를 세울 것을 권고하였다. 논의 중에 장로교로 할 것인가 감리교로 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감리교 신자가 한 사람 뿐이므로 장로교로 하기로 하고 본국의 장로교회에 이를 보고, 목사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그 이듬해(1909) 5월에 韓錫晉 목사가 와서 김정식 조만식 吳舜炯을 領袖로, 金顯洙 莊元瑢 張惠淳 白南薰을 집사로 하여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장로교회로 출발하고 보니 뒷날 문제가 생겼다. 감리교인 학생들(盧正一, 金永燮 외 6, 7명)이 왔다가 이 교회가 장로교회임을 알고 유학생 감독부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당시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던 고당은 이를 알고 급히 백남훈에게 편지를 띄우는 등의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고당은 일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해서라도 따로 예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고당의 이같은 노력의 결과, 본국의 장로교 감리교회와 교섭, 동경교회를 장 감연합교회로 만들었던 것이다. 고당의 에큐메니칼한 이념과 실천이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의식이 뒷날 '고향을 묻지 맙시다'라고 외치면서 예상되는 교파적인 분열은 물론 지역적 갈등도 대승적으로 승화시켜 민족적 화합을 주장하게 되었다.
4. 기독교 신앙교육과 실천성 - 오산학교 봉직 시절
1913년 명치대학 점문부 법학과를 졸업한 고당은 평북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받아 부임하였다. 늦깍이로 배움의 길에 나섰던 그였지만, 이제 자신이 그동안 배운 바를 나누고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왔던 것이다. 더구나 五山이라면 그가 존경하고 있던 南崗이 창립한 학교다. 그로서는 배움의 길에 나선 이후 그 배움을 실천하는 첫 발걸음이 오산으로 향했기에 더욱 흔쾌한 마음으로 부임했을 것이다. 오산은 개교이래 선생과 학생이 함께 기거하는 전통을 세웠다. 고당은 이 전통을 더욱 견실하게 만들면서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신앙의 훈련을 강화하였다. 오산에서 고당의 지도를 받았던 김기석과 김홍일은 이렇게 그들의 존경하는 스승을 회상한다.
"그는 아침 6시에 학생들과 같이 일어나 아침체조를 같이 하고 학생들 틈에 끼어 구보도 같이 하였다. 그 때 오산학교는 사환이 없고 청소를 위시하여 난로피우기 장작패기 같은 일은 선생과 학생들이 맡아서 하였다 고당은 여러 번 학생들을 데리고 제석산에 가서 오리나무를 베어 같이 날라왔다. 겨울에 눈오는 날 아침이면 고당은 맨 먼저 교정에 나와 선생과 학생들이 다닐 길을 내고 운동장 눈을 쓸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생활을 지도하고 같이 장작을 패고 눈을 쓴 것뿐이 아니었다. 그는 기도회를 주관하여 기도를 올리고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였다. 그는 언제나 민족을 위하여 간구하는 기도를 올렸고 설교로 듣는 사람의 마음에 맑은 물결을 일으켰다. 고당이 오산에 온지 1년이 못넘어 오산은 놀랍게 변모되었다. 교직원과 졸업생은 다시 단결을 찾았고 학생들 사이에는 검소한 기풍이 번져나가고 학교와 교회에는 새로운 신앙이 불타 올랐다" "그는 교장이면서 사감이면서 사환과 교목까지를 겸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같은 돈독한 목자들이 나온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백인제(白麟濟)가 독일로 유학을 가고 朱基鎔과 金恒福이 교육에 헌신하기로 하고 金弘壹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고 洪鐘仁이 신문기자가 되고 李鎬와 林克濟가 이과계통에 진학하고 한 것이 고당의 영향아님이 없었다. 이 예언자를 겸한 교육자는 언제나 제자들에게 경건한 신앙과 높은 이상과 민족을 위하여 바치는 헌신의 감정을 불어넣었다. 스승의 고매한 모습과 맑은 목소리는 제자들을 게으른 잠에서 깨어 일으켜 그들의 혈관 속에 새로운 피를 부어넣어 주었다. 고당은 오산에 있으면서 보수를 받은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수 받는 동지들에게 보수를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넉넉한 형편을 미안하게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1926년 가을 고당은 전후 9년에 걸친 오산생활을 그만두고 평양으로 나왔다."
"고당 선생께서는 그 때 오산중학에서 수신(도의)에 해당하는 성경을 가르치시고, 또 특별예배도 주도하셨는데, 하루 아침엔 수신시간에 들어오셔서 성경을 가르치시며 '예수님이 人子로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교훈은 눈물과 땀과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눈물 즉 同情과 사랑, 피 즉 희생, 이 세가지는 우리가 본받아서 민족을 사랑하며, 나라를 위해 땀흘려 일을 해야 하며, 최후에 가서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침통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시간에 비록 전문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로서 가르친 것이었지만 고당은 기독교의 대속의 진리를 바르게 가르쳤고 기도회를 주관하고 특별예배를 인도하는 등 오산인들을 신앙인으로 무장시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오산을 졸업한 이들 중 민족과 인류를 위해 희생 봉사한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은 그의 이러한 신앙교육이 남긴 값진 유산 때문이요, 그가 세운 이러한 신앙중심적인 학풍 때문이었다.
오산에 부임한 지 2년 후 그는 교장의 자리를 맡아 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남강이 자기는 학교의 운영만 맡고 교육을 고당이 맡도록 부탁했던 것이다. 김기석은, 고당이 학교의 책임을 맡은 1915년부터 교장직을 물러나는 1919년까지 5년간을 '오산학교 교육의 황금시대'라고 하였다. 이 때 백인제 백봉제 김주항 주기용 박동진 주기철 김택호 이약신 김동진 한경직 임창선 김항복 김홍일 조진석 등 한국의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고당이 교장에 취임한 그 다음해(1916)에 입학한 한경직은 스승 고당에게서 배운 성경과 지리 특히 사도행전 강의를 오랜동안 기억한다고 하면서, "선생의 교육방침은 철저한 신앙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며 학문과 지식을 배워서 민족중흥에 투신할 수 있는 애국자를 양성하는 데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고당은 오산에서 신앙과 실천에 바탕한 민족교육을 시행하였다.
5. 기독교 운동과 사회 활동의 접목 - 평양 YMCA 總務
고당의 행적 중 필자에게 석연하게 설명되지 않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1919년 2월 27일 都寅權과 함께 상해로 가려다가 江東에서 붙잡힌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2년의 언도를 받았고 이듬해 1920년 1월에 가출옥되었다. 남강 또한 3 1운동 주도자로서 감옥에 갇혀 있었기에 고당은 남강을 면회하고 이 해 9월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돌아왔다. 3 1운동 때 오산학교는 일제에 만행으로 교사가 불탔다. 고당은 교사 학생과 함께 임시교사를 지었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 오산학교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인가하지 않아 1921년 4월에 오산학교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평양YMCA 총무로 취임한다. Y는 1914년에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평양 Y는 1920년 11월부터 준비하여 그 이듬해 3월 21일 남산현 예배당에서 '각 교파 교인들과 사회인사 8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발기회장 김동원의 개회로 창립총회가 열렸는데, 이들은 "평양 교계만 아니라 민족적인 지도자들로서 장 감 양교파 지도자들이 이처럼 결속된 것"은 이채로운 일이었으며, 초대 임원진은 회장에 김득수 부회장에 김동원 총무에 조만식이었다. 창립취지문에서 그들은 자유와 인도 정의의 기치를 높이 들 것을 주장하고 만국청년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경천애인의 복음으로 經을 삼고 청년의 지덕체 三育의 발달로 緯를 삼았음을 강조하고 평양에서 늦게나마 시작된 이 청년회운동에 크게 호응하기를 권고하였다.
"조선의 제 2도시로 신문화 발전의 영원이요 기독교의 중심지인 우리 평양에 이러한 기관이 우금까지 설립되지 아니함은 실로 기괴한 사실이요 또한 유감천만으로 여기던 바이더니, 다행히 작금 수년에 우리 청년은 크게 각성한 바 있어, 혹은 부허경박하고 무위안일에 답하고, 혹은 사리에만 급급하던 可憎 可憂할 지경에서 초월하여, 자신의 수양과 사회활동에 전심하려는 크게 경하할 경향이 있음을 본 오인은, 우리 청년은 이제는 차차 세계의 청년으로 더불어 보조를 아울러 인류의 문화와 행복을 위하여 만분의 공헌이 있기를 바라며, 따라거 평양 청년을 위하여는 영원무량의 행복이 되기를 위하여 '평양기독교청년회'를 발기하노니, 오인의 所意를 양해 공명하는 유지 청년 제군은 호응 찬동하기를 절망하노라."
고당은, 연보에 의하면,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1년간 평양의 기독교청년회 총무로 봉직하였다. 한편 그는 1925년 전국 Y연합회의 도시부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9년에는 황찬영씨가 기부한 2천여평의 토지에 콩과 고구마를 회원 공동으로 재배하였으며 대동군 청동리에서는 절약저금조합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총무직을 사임한 후에도 계속 Y와 관례를 맺고 있었는데, 1932년 12월 29일 서울의 중앙청년회 회관에서 전국 62명의 대표로 개최된 제 7회 조선 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정기대회에서 고당은 윤치호 유억겸 양주삼 등 15명과 함께 연합위원에 선출된 적이 있고, 1938년에는 평양 Y의 이사로서 회장 김동원과 총무 김취성를 도와 기독교청년회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당은 좋은 신앙은 좋은 인격을 낳는다는 신념을 가졌고 또 그것을 실천하였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졌듯이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는 옳지 않고 바르지 않은 일에는 추호도 타협이 없었으며 거짓을 싫어하고 꾸미는 것을 미워하였지만, 회무를 처리할 때에 늘 인화와 관용을 중요시하였다. 최승만의 다음 회고에는 고당의 이러한 인격이 배어나 있다.
"그리고 잊혀지지 않는 것은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위원회 때의 일이다. 그 때의 위원은 李商在 尹致昊 申興雨 兪億兼 李舜基(함흥) 매큔(선천) 金東元 고당 선생과 본인 등이었는데, 의논하는 일은 함흥에 있던 서양인 번스와 중앙에 있던 서양인 간사 내쉬에 관한 일이었다. 중앙의 신흥우 연합회 총무와 협동총무 반하드 씨는 번스와 내쉬도 간사직에서 파면시켜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이 때에 중앙과 지방의 의견이 대립되어 상당한 격론이 있었는데 그 때에 가장 열렬히 반대의 의견을 주장한 분이 고당 선생이었다. 아직도 네 귀에 쟁쟁한 것은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에게 다소의 의견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이를 면직시킨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냐'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화평을 좋아하면서도 그릇되고 의 아닌 일에는 모른 체하시는 어른이 아니었다. 결코 무사주의나 안일주의로 불의부정에 타협하시는 어른이 아니었다"
고당이 기독교 청년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한 것은 다음 몇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상담을 통해 '민중'들을 돕는 일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요즘 말로 상담이지, 당시로는 억울하고 어려운 일들을 호소하는 것을 들어주고 해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식민지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조선인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들과 고난을 같이하는, 제사장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시민들은 고당이 그 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얻었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吳基永의 회상이다.
"선생이 매일같이 기독청년회에 나와 앉아 있으면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정말 각 방면 인물이다. 억울한 호소, 딱한 의논, 입학시험에 낙제한 학생의 부형, 낙제의 염려있는 학생의 부형, 지방에서 처음으로 평양 오는 사람의 방문, 심지어 년전에는 出奔한 계집 때문에 찾아 온 노동자도 있었다. 선생은 반드시 이들과 악수하고 친절로써 그의 온화한 성품을 발휘한다."
두번째로 그는 기독교청년회에 있으면서 각종 민족운동을 주도하고 거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고당이 기독교청년회 총무시절에 관여한 대부분의 민족운동, 예를 들면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기성회 운동, 신간회 운동 등과 또 오산학교 교장에 다시 취임하고 숭인상업학교 이사장으로 활략한 것은 기독교청년회 총무직과 병행하여 수행하였던 것 같다. 그는 기독교 청년회 총무직에 무보수로 봉사하였으나 그 총무직이 갖는 다양한 활동영역을 활용하여 민족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으로 만들어갔음은 부정할 수 없다.
3 1운동을 전후하여 교회에서는 금주 금연 아편 축첩 매음 잡기 등의 사회악에 대한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 8월 24일에는 평양의 조만식 김동원 등 5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물산장려회를 창설하고 국산품애용운동에 나섰다. 물론 이 운동은 1922년부터 자급 자족 운동과 병행하여 더욱 본격화되었고 1923년에는 전국적인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에 국산품애용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평양에서는 면려청년회와 평양노회 농촌부와 Y가 크게 협력하였다. 이 때부터 고당은 말총모자와 짧은 수목두루마기와 편리화를 신어 유명하였다. 그가 물산장려운동을 벌이는 기간은 그가 평양Y의 총무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민립대학기성회(1922)에 관여한 것이나 민족운동 단일체인 신간회(1927)의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으로 있었던 것도 Y총무 시절이다. 그는 Y를 매개로하여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과 민족의식의 사회화를 접맥시킬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 및 민족의 지도자로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세번째로 고당은 Y총무 시절에 무엇보다 젊은이들을 깨우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전국 Y 제1회 하령회(1927)부터 3회(1929)에 이르기까지 계속 강사로 참여하였다. 하령회에서 강연한 내용은 당시 기자가 청강하여 Y연합회 기관지인 《靑年》지에 계재하여 그가 외친 내용을 통해 그의 사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강연에서, 전래 초기에 猛進的으로 우리의 제도와 생활을 변화시키던 기독교가 이제는 睡眠 중에 있다고 경고하는가 하면, 어느 박사가 조선을 시찰하고 동경에 돌아와 조선 유학생들에게 했다는 "세계 어느 나라든지 조선처럼 일 많은 나라는 없다. 동시에 조선청년쳐럼 사명이 큰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젊은이들을 격려하였고 또 숭실학교 창립자 선교사 삐드워드(베어드, W.M.Baird 裵緯良) 박사로부터 "내가 조선인에게 전도함은 영혼의 천당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今世에서 민족적 구원을 위함이라고" 들었던 말을 인용하고는 "기독교인인 우리는 何事를 하든지 此 福音을 압세우고 大願을 품고 진정한 봉사가 잇은 후에라야 진정한 수확을 得할 것이다. 결론에 우리 생활은 좋은 신앙 좋은 수양을 가지고 진정한 봉사를 하라 함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이 밖에도 고당은 숭실 대강당과 각 교회에서 부흥집회와 민중을 깨우치는 집회를 자주 열었고 지방의 강연에도 부지런히 내왕하여 청년들을 깨웠다.
고당은 또 평양 소재의 광성학교와 숭인상업학교에서도 아침 예배를 볼 때에 가끔 설교를 하거나 혹은 강연할 때가 있었다. 채플 시간이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시간이 아니었지만 고당 선생의 말씀은 대인기였다. 그의 말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과 유머와 풍자가 있었으며 젊은이들을 격려하였기 때문이다. 朴在昌의 회고다.
"그래서 선생은 늘 희망을 주는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산을 높이 봐라, 보통 낮은 데에서 옆을 볼 때와 높은 산위에 올라가서 옆을 볼 때와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높이 봐라 그리고 더 멀리 원대한 앞을 봐라, 높이 멀리 크게 지금 당장은 암담하고 당장은 일본의 천지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은 크게 봐라 멀리 봐라(高 遠 大)'라는 말씀을 늘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태산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신념이다'(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라고 하셨던 말씀도 기억납니다".
이렇게 보면 고당의 평양Y 총무로서의 활동기간은 그의 기독교 이념을 사회에 적응하는 한편 기독교 신앙에 바탕한 인격을 실험하는 때였고, 그가 조선의 조선의 기독교계 및 민족의 지도자로서 발돋움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는 1920년대 한국 기독교계가 가졌던 '예수 천당' 혹은 '말세와 재림' 신앙에 몰입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사회와 민족 속으로 적극적으로 개방하는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의 신앙체계가 당시의 보수적인 체질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와 민족의 아픔에 대하여 귀를 열어두고 거기에 동참하려는 자세를 늘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고당은 민족말살기에 들어서서 영적 지도자인 장로로서의 위치를 굳굳하게 지켜나가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신앙과 민족적인 정절을 굳게 지키며 조용하게 영적 전쟁을 치루는 것이었다.
6. 신앙과 사회 경제 - 신앙과 사회운동의 접목 [試論, 未完]
기독교인 조만식은 그러면 어떠한 신앙을 가졌는가. 그는 숭실학교에서 성경교육을 받았고, 동경교회에서는 영수의 직분을, 그리고 산정현교회에서는 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가져 교회 봉사와 신자들의 신령한 일들을 총찰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교리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정도를 유지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고당이 민족문제를 생각하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그가 고백하는 기독교는 사회운동이나 민족운동의 한 방편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어떠한 신앙고백을 남겼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代贖하신 피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보수적인 신앙고백의 터 위에 서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가 숭실에 입학한 당시로부터 1920년대까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기독교는 서구의 보수적인 신앙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주로 미국의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 신앙과 신학을 전수받은 서북지방은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신봉하고 있었다. 장로교가 강조하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란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라는 것, 우일신 하나님과 삼위일체론,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피조물됨, 인간의 완전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代贖, 성령의 역사, 구원역사의 예정, 세례와 성찬 중심의 성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날의 성도의 부활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고당이 숭실학교에서 베어드로부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세계관과 역사의식의 폭이 넓긴 하였지만, 그러나 신앙함의 본질에서는 앞서 언급한 장로교회의 신조를 중심으로 그의 신앙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당에게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 행위나 실천과 별개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신앙은 자신의 인격 속에서 肉化되어 실천적인 삶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고당 신앙의 장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자기의 인격으로 살려고 하였고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초기부터 칼빈주의적인 정교도 신앙과 그 실천을 받아 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신앙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책임과 실천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가 남긴 대부분의 글에는 기독교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 더 많이 눈에 뜨인다.
그의 칼빈주의적 청교도성은 생활의 절제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서구의 칼빈주의가 갖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정직과 신의, 근면함과 절제 절약으로 집약된다. 고당은 생활의 절제성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그의 물산장려운동도 사실은 이러한 절제운동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물산장려운동은 또한 민족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서 깊이 인식한 데서 나온 신앙적 소산이다.
고당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민족경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조선교회가 경제방면에 안목이 열리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그 이유의 하나를, 협성신학교의 어느 학생이 선교사의 사업을 비판한 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조선 선교사들은 경제관념을 우리이게 도무지 넣어주지 않은 것이 금일 교회유지와 발전에 큰 장애라"고 간주한 바가 있다. 그는 기독교인의 경제생활과 관련하여 의복제의 혁신과 근검절약, 경제책연구 및 교육혁신을 강조한 바가 있거니와 더 나아가서 조선의 교회가 거교단적으로 조선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획기적인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방안을 그 하나로 주장하였는데 장황하지만 살펴보자.
"(조선의 빈궁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에는 희망안과 가능안 두가지가 있는데 희망안은 다만 희망함에 불과하므로 가능성이 거의 없고 가능안은 거의 가능한 것입니다. 가능안인데 이 가능안은 즉 빈궁한 원인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일반 民度未及의 대책으로서는 농민지도 계발 즉 농촌진흥책이 가장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매 미개하여 헤매는 자에게 광명과 생명의 도 외에는 다시 없음으로써이다. 다음에는 복음전도인데 이 복음선전은 농촌진흥의 한 조건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구함에 오직 '알파'요 '오메가'일 것입니다. 즉 전적일 것입니다. 다음에는 一洞一敎會주의 실현과 주일학교 대확장(주일학교 사역자 양성필요)인데 10년 계획으로 일동일교회 실현을 꾀할 것이며 수량도 수량이려니와 특히 이후부터는 질에 유의할 것입니다. 일찌기 배드워드(베어드?) 박사는 말하되 내가 조선에서 전도할 새 조선인은 내세 영혼의 천당구원을 위함보다 현재의 사회적 구원 즉 실제생활에서 구원을 얻으려함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과연 백성을 위하여 눈물의 전도자, 熱의 종교가, 사랑의 사역자, 情의 설교자가 대량 산출되어야 함이 필요한 사실입니다. 이렇듯 복음선전으로 농촌계발의 필요를 부르짖게 된 실례는 많은데 그 좋은 예로는 利川 의 三洞이 그것입니다. 평안남도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의
1동 신자 극소 술집 두집 極貧 30-40호
2동 신자 반수 술집 한집 少貧 40-50호
3동 신자 거진 술집 없음 稍富 40-50호
위에서 빈부의 원인과 그 비례현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복음이 우리에게 미치는 바 그 힘의 큼을 가히 짐작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도하자는 말은 보통 꽹과리식의 것이 아니라, 오직 진리는 자주 회집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 복음전도와 지도자 양성문제는 느린 듯하나, 그러므로 나는 일생을 통하여 주창하는 바는 절약과 검소 그것입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조선인은 생산이 저능하면서도 소비에는 대담하ꍷ로써이고 둘째 토지 가옥을 방매하여 일상용품을 買用하므로써이고, 셋째 수입에 초관되는 지출을 함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선 대세로 보아서 물론 호경기라 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냐 함에 있어서 오인은 반대로 조선엔에게 남용과 사치의 악습관을 주는 악영향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남용과 사치를 방지하고 절약과 검소의 사상을 고취하여 이를 실현케 함에는 이하 몇 가지를 필요할 줄로 압니다. 첫째 지도자급(교원 목사 사회기관인, 청년인도자 등)이 솔선하여 실천 감행할 것. 줄째 30만 기독교도가 단합 실행하도록 통제할 것. 셋째 사회적으로 각 단체가 연합하여 이를 감행토록 할 것. 넷째 각체에 이상촌 건설을 대규모로 시행하여 절약, 검소룰 실천케 할 일 등일 것입니다. 이상으로써 불완전하나마 빈궁조선을 구제할 줄로 믿습니다. 요컨대 일반대중은 생존의 의식을 철저히 가지고 이상적 대인물을 중심으로 한 집중결합이 또한 필요하며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대션전과 30만 교도의 철저한 각성이 급선 要務라고 생각할 바입니다."
고당은 평등 사상과 사회정의 관념은 특정계급의 배제, 사유재산의 제한을 강조하는 등 기독교 사회주의를 연상케 해주는 대목이 없지 않다. 그가 '新東亞'와의 인터뷰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답변한 바가 있다.
"설문에 대한 고당 선생의 답변(II) '만일 내가 세계의 독재자라면, 사회제도와 경제제도 개혁안 이상계획의 지지책 및 반역자는 어떻게 취급할까?' 조만식의 답: 위선 특정계급을 배제하는 동시에 국제적으로는 강폭한 민족을 억제하여 평등과 평화를 유지하겠습니다. 사유재산을 제한하여 일가족이 10만원 이상의 치부를 금하고 총 산업기관을 민중화하겠습니다. 위선 세계적 불경기 타개착으로는 국제간 개인간을 물론하고 일체의 公私債를 절대로 해방하겠고 일부 국가에 偏在한 金을 약소국가에게 최저 이부로 대부하도록 명할 터입니다. 이상의 계획으 실시하기 위하여는 박애주의를 기초로 하여 적당한 법령들을 발포하겠고 以黨治世主義로 나가겠습니다. 반역자가 있으면 改悛할 때까지 禁錮해 둘 수 밖에 없겠습니다. 인구가 너무 증가하는 것이 病痛이니까 물론 산아제한을 즉각으로 실시하고 교양하며 선전할 것입니다."
[미완]
7. 信仰과 節操 - 殉敎者와 同行하고 殉民의 길을 가다.
고당은 1922년 그가 봉사하던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았다. 산정현교회는 장대현교회로부터 1905년 분립해서 닭골에 설립된 교회로서, 片夏薛(C.F.Bernheisel) 韓承坤 安鳳周 姜奎燦 宋昌根 朱基徹 목사가 시무하였으며 한때 朴亨龍이 부목사로 봉사한 적이 있다. 장로로서는 초기에 金東元(1910-) 朴禎翊(1913-) 吳允善(1922-) 조만식(1922-)이 있었고 1930년대에는 劉啓俊(1930-) 金鳳淳(1930-) 鄭在允(1933-) 金燦斗(?) 홍정락(?) 있었다. 조만식은 오산학교를 사임하고 평양 YMCA의 총무로 부임한 1921년부터 산정현교회의 집사로 봉사하다가 그 이듬해에 장로가 되었다. 1922년 6월 14일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제2회 평양노회에서 오윤선 조만식 등이 장로 시취를 받았는데, 그는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지 아니면 장로를 원치 않았던지 장로시취에서 불합격하여 오윤선(6월 18일 장립)보다 6개월이나 늦게 그 해 12월 31일에 장립받았다. 오기영의 증언이다.
"선생은 장로교의 장로이시다. 일찍이 장로로 추천되어 그 문답을 받을 때 요리문답에 낙제되어 다음 번에야 장로가 되었다. 다음 번에도 대답이 장로답지 못한 것을 말하자, 특등 취급으로 準無試驗 장로가 되었다. 물론 선생이 신앙이 부족한 까닭은 결코 아니다. 장로 문담에 낙제라는 것도 선생이 아니면 없을 일이다. 그는 장로를 원하지 않았던 듯싶다. 그에게는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다."
그는 장로로서 겸손히 교회를 섬겼다. 예배 때는 맨앞자리에 앉았고 당회에서는 말언을 별로 하지 않았고 꼭 필요한 것만 말씀하였다. 黃聖秀는 장로로서의 그러한 고당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고당과 같은 장로가 있었기에 산정현교회에 그같은 훌륭한 목회자가 있게 되었고 특히 주기철 목사 같은 이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에는 평양 서문밖 교회에 나갔고 나중에는 산정현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의자가 없이 맨바닥에 앉던 시절이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는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친(황보익 목사)께서는 어린 나에게 "그 분이 민족의 영도자요,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요 백성의 모범이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고당 선생님은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였습니다. 산정현 교회 장로님이신 선생님은 당회에서 별로 말씀하신 일이 없으셨으나 그가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그리고 간혹 무게있는 발언을 하심으로 그의 인격의 감화와 위력에 의하여 당회는 일치단결하며 바른 결정을 하며 교인을 감독선도하였으며 특히 그러한 당회 후원을 받아 교계의 거성인 강규찬목사, 박형룡박사(전 총신대학장) 송창근 박사(전 한신대학장) 그리고 한국기독교 순교사상의 샛별인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고당은 장로로서 노회와 총회에도 참석하여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와 행정을 지도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봉사하였다. 1931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0회 총회가 금강산 온정리 기독교수양관에서 회집되었을 때 고당은 평양노회의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그는 변인서 홍택기 이인식과 함께 절차위원으로 선임되어 회기동안 총회의 제반 회의과정을 점검하였다. 그는 또 총회에서 선임하는 이사로서 김우현과 함께 세브란스의학교의 이사가 되었다. 또 평양노회의 보고를 통해 그가 교장 혹은 이사장으로 있던 숭인상업중학교를 30만원의 재단법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총회에 보고되고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는 만주사변(1932)을 일으키고 중일전쟁(1937)을 확대하였다. 일제의 조선에 대한 전시체제의 구축은 더욱 악랄해졌다. 일제의 마수는 신사참배 강요라는 형태로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뻗치고 있었다. 이 때 고당은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셔와 그가 신사참배반대의 선봉장이 되도록 격려하면서 이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고당과 주기철의 관계는 오산학교에서 시작된다. 경남 웅천 출신인 주기철은 고향에서 사립 開通小學校를 졸업하고 1913년에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고당이 明治大學을 졸업하고 오산에 부임하던 해에 주기철은 입학하였고 졸업하는 3년간 고당의 지도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주기철은 고당의 제자다. 주기철은 중학시대에 재주가 있고 웅변이 뛰어나 처음에는 정치방면에 유의하였다. 이는 일제강점하에 있는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한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 학교 창립자인 남강 이승훈과 그의 재학 당시 이 학교의 교사요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된다. 스승의 지도를 받아 주기철은 장차 경제적으로 민족을 구하고자 연희전문 상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의 안질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향해 있다가 金益斗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 크게 회개하고 중생을 체험하였다. "한 때 민족운동에 열중하였지만 소명감에 불타는" 그는 1921년 평양신학교에 진학,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졸업 후 그는 부산 草梁敎會를 거쳐 마산 文昌敎會에서 안정되고 부흥하는 목회를 하고 있었다. 1936년 평양의 산정현교회는 宋昌根 목사가 사임, 부산으로 옮기고 후임 목회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일제는 전시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기독교 학교와 일부의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 기독교의 중심지요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대표하는 산정현교회는 이제 일제의 이같은 기독교 핍박과 대결할수 있는 목회자를 은연 중 요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 목사를 지목하고, 20여년 전 주목사의 은사였던 고당을 주목사의 청빙위원으로 삼아 마산에 파송, 일을 성사시키게 되었다. 한 때 사제관계였던 두 사람은 이제 한 교회의 목사와 장로로서 그 관계가 바뀌어져 있었다. 그러나 고당은 제자였던 주 목사를 잘 받들었다. 고당의 이러한 자세가 온 교회로 하여금 주 목사를 극진히 받들도록 만들었다. 김인서는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
"예전 서울 안국동 교회를 양반교회라 이르면, 평양 산정현교회는 민족주의자의 교회라 이른다. 조만식 선생 외에 민족진영의 여러 거성이 장로로 시무하였다. 그래서 산정현교회의 전통은 그리스도 정신에 화한 민족애 그것이었다. 조 장로가 오산학교 교장시대에 주목사는 오산학교 학생이었으니 학교로는 조 장로가 선생이요 교회로는 주 목사가 선생이다. 두 분이 서로 선생으로 모시는 미덕은 참 부러웠다. 그래서 주 목사의 지도라면 일일이 순종하였고 입옥한 뒤에 전 교인이 효자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정성으로 받들었다. 예배당문은 봉쇄당하였으나 연보를 거두어 주 목사의 가정은 물론 남녀전도사의 가정에까지 매월 생활비를 제공하되 8 15 예배당문 열기까지 계속하였다. 경찰서에서는 일본에 반역하는 주 목사에게 생활비를 제공함은 背日행위라고 번번이 위협하였으나 信義一貫한 산정현교회는 이에 굴하지 아니하였다. 주 목사로 하여금 주 목사되게 함에는 吳부인의 격려와 산정현교회의 힘도 컸었다."
김인서의 지적과 같이, 일제의 모진 핍박과 간섭 속에서도 산정현교회는 주 목사의 신사참배반대 투쟁을 격려하는 한편 가족들을 보살폈다. 산정현교회가 주 목사와 전도사 가족들에게까지 생활비를 제공하게 된 데에는 바로 고당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신사참배에 반대함으로써 신앙의 순결과 민족적 절조를 지키는 주 목사를 격려했을 뿐아니라 그 스스로도 민족적인 긍지를 지킴으로 옥 밖에서 옥중 순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고당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에 동참하지 않았고, 일제의 학병권유 제의에도 칭병하고 나서지 않았으며 드디어는 시골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고당과 산정현교회의 이같은 자세는 그의 제자이기도 했던 주 목사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주 목사는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산정현교우들과 함께 걸어갔던 것이다. 그러기에 《신사참배 반대투쟁 정신사》를 쓴 安道明은 주기철을 주기철되게 한 산정현교회와 고당 조만식에 대해 이렇게 적절하게 썼다.
"펑양 산정현 교회는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통치 하에서 강요한 신새참배를 반대하고서 승리한 유일무이한 교회다. 이 사실로 평양 산졍현 교회 함녀 교계에서뿐만 아니라 전 민족적으로 순교와 순국을 완수한 대표적 교회로 알려졌다. 이 역사적인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그 교회의 장로였고 蘇羊 주기철 목사가 그 고회의 당회장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같이 이러한 표본이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조장로와 주 목사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양립되고 조화됨으로 이루어졌다. 그 당시에 평양 산정현 교회 함녀, 역사적으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분가한 교회였지만, 관서 지방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민족주의 애국자가 집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명망을 가진 교회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南崗 李昇薰 선생도 이 교회와는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 이 교회 장로님들도 평양에서는 굴지의 유지들로 꼽히는 기라성과 같은 인사들이었다. 이러한 평양 산정현 교회가 생긴 것은 그 중심역할을 고당 선생이 무언중에 했었기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에 전국의 모든 교회가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탄압이 치열해지니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일본 제국주의 앞에 굴복을 했고 또 민족적 지도자들도 하나씩 변절했다. 이러한 때에 고당 선생은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하리라' 하듯이 創氏改名도 하지 않고 민족지조를 지키며 평양 산정현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고 있었다. 이 때에 고당 선생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선두로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는 다른 장로 네명(오윤선 박정익 유계준 정재윤)과 청년집사 네명(한원준 김승기 김경진 김성식) 도합 아홉명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사각오를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철두철미한 민족주의 학교로 꼽히는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목사였고, 또 신사참배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주 목사가 一死覺悟를 하고 당회장 목사로 부임해 왔다. 조 장로와는 오산학교에서의 사제관계의 인연을 가진 사이이다. 만약 그 때에 주 목사가 다른 교회에서,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하듯,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더라면 그 교회에서 내어 쫓았을 것이고, 또 반대로 평양 산정현 교회는 주 목사 같은 목사가 아니고 , 일제 앞에서 친일하며 어물어물하는 목사였더라면, 당신 같은 목사는 필요없으니 우리 학교에서 나가시오 하고 내어 쫓았을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라는, 하나님의 뜻이. 산정현교회라는 場에서 정치적인 면의 조만식 장로와 종교적인 면의 주기철 목사의 양립과 조화로서 영광의 승리가 성취되었다. 평양 산정현 교회와 고당 조만식 장로는 우리민족 역사에 길이길이 횃블이 될 것이다."
옥문 밖에서 순교자와 동행했던 고당은 해방 후 자신을 기대하는 수많은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한 목숨을 버리는 殉民의 길을 걸었다. 한 몸이 살 수 있는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나 혼자만이 살기 위하여 이곳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을 버리고 떠날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일천만 북한 동포와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소"라는 비장한 결심은 바로 일제하의 순교자의 길을 걸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전자가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존재도 숭배하지 않겠다는 '崇神 신앙'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러나 의지할 데 없는 민중들을 끝까지 봉사하겠다는 '活人 신념'에 근거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십자가를 지는 길이었고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는 숭고한 신앙인의 길이었다.
고당은 그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 부르던 찬송가의 가사,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모든 것을이기리라는 믿음으로 일제와 무신론자들을 이기는 삶을 살아간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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