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50년목회 특별인터뷰(상)] “은퇴 감회 완주한 마라토너처럼 홀가분”
[2008.05.13 14:41] | ||
![]() 누구나의 시작은 미약하다. 그리고 조금은 드라마틱하다. 여기 그런 드라마가 있다. "난 할렐루야 아줌마가 하두 소리를 잘해서 그거 들으려고 왔지. 그런데 젊은 양반이 연설을 하네. 그럼 난 그냥 집으로 갈게요. 배도 고프고." 1958년 순복음신학교를 갓 졸업한 22세의 조용기 전도사가 서울 대조동 천막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릴 당시의 장면이다. '할렐루야 아줌마'인 최자실 전도사가 대조동 묘지 옆 깨밭에 천막을 두르고 사과상자에 보자기를 씌워 강대상을 만든 교회에 찾아온 첫 교인인 할머니는 소리를 들으러 왔다며 그냥 가겠다고 하고, 조금만 있으면 소리를 들려주겠다고 붙잡는다. 순복음교회의 출발은 이렇게 희극적이다. 이런 미약함에서 역사가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재적 성도 76만명을 기록하며 세계 최대의 단일 교회로 성장시킨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그의 '영적 어머니'인 최자실(1989년 작고) 목사. 외국에서는 '한국의 대통령은 몰라도 조용기 목사는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아 지난 9일 기념대성회를 가진 데 이어 14일에는 조용기 원로목사 추대예배를 갖는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개척자 조용기 목사가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는 것이다. 석 달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피를 토하며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절규했던 청년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나 세계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성장의 기록을 남기고 일선을 떠나는 것이다. ―올해로 목회 사역 50주년을 맞아 오늘 원로목사로 추대예배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감회가 어떠신지요. "사람들은 목회 50주년을 맞아 은퇴를 하니까 섭섭하다고 하는데 저는 평온한 마음입니다. 마라토너가 최선을 다해 달려 목표 지점에 골인하는 것처럼 홀가분합니다." ―천막교회에서 5명의 성도로 시작한 교회가 현재 재적 성도 76만명의 세계 최대 단일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교회 성장 최고의 기록을 거둔 데에는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한가지만을 든다면 무엇을 꼽고 싶습니까. "목회자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전쟁 직후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국민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들은 영적 구원에 매달려 사람들의 현실적 삶과 육신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적 구원과 동시에 일상의 삶과 건강의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람들은 물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쇼핑센터에 갑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세계적인 성장은 제일 먼저 설교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쉬우면서도 핵심이 분명하고 스토리텔링이 대단히 조직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설교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와 감동 없이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조를 잘 짜서 말을 잘 하더라도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설교는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님께 의지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염려와 근심 걱정에 대해 해답을 주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했습니다. 그것을 전달할 때는 어린 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최근 발행된 '여의도의 목회자'를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처럼 읽었습니다. 국제신학연구원에서 펴낸 것이기는 하지만 구술된 구조로 볼 때 목사님이 글을 쓰는 것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젊었을 때 저는 문필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서대문교회 시절에도 글을 쓰곤 했지만 시간이 부족해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문학적인 성향 때문인지 설교를 할 때에도 시적 운율과 소설적인 구조력을 높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대조동 순복음교회 시절이나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또 여의도순복음교회 초기 시절에는 가난한 성도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회의 불안세력이 될 수도 있었던 그들이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고 희망을 가꿔나감으로써 안정세력으로 변화해 나갔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당시 많은 사람의 절박한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특히 집도 없이 노동을 하며 교회에 와서 먹고 자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사회적으로 불안세력이 됐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온순한 양이 되어 열심히 일하고 술과 폭력을 멀리하며 저축해 중산층이 되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왜 장로교회가 아닌 순복음교회가 대형 교회가 되었느냐고 하면서 '장로교회에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신학이 없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도 많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서러움이 많은 사람들이었기에 슬픔을 호소하고 목놓아 울 수 있는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 실컷 울고 위로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울부짖으며 하는 기도는 우리 교회가 처음인데 장로님들이 '당장 중지시키자. 교회가 초상집이냐'며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중지시키지 않았습니다." ―순복음교회의 장점과 단점을 분석해 주십시오. "장점이라면 우리 교회는 서민교회라는 점입니다. 출석하는 교인은 대부분 우리 사회 중산층 이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쉽게 나올 수 있는 교회라는 점이 커다란 장점입니다. 어떤 교회는 엘리트층이 많고, 또 어떤 교회는 지식인 계층이 많지만 우리 교회는 '쟁이'들이 많습니다. '떡쟁이' '소금쟁이' 그런 것이 자랑입니다. 정다운 교회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장엄한 예배 형식, 즉 예술적인 예배 의식이나 예배의 미학 같은 것은 부족합니다. 이것이 단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전 건축 과정에서 목사님이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로 큰 어려움이 있었는가 하면, 대대로 쓰던 놋그릇을 바친 한 할머니와 같이 뜨거운 성도들의 헌신이 뒷받침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까. "중동전쟁이 일어나 오일 쇼크를 겪을 때였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헌금도 들어오지 않고 교회 건축은 중단되었습니다. 건축회사는 나를 고소하고 노동자들은 돈 달라고 아우성이고, 집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참담한 형편이었습니다. 아파트 7층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회 건축 현장 콘크리트 바닥에서 철야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어느날 아현동에 사시는 80대 할머니가 '우리 목사님이 지금 죽게 됐다. 나는 돈이 없으니 이것이라도 바치겠다'며 조상 대대로 쓰던 놋그릇을 내놨습니다. 저는 마음이 너무 아파 꿇어앉아 할머니를 붙잡고 울며 '이것은 죽어도 못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돈이 안 된다고 안 받는 것이냐'며 흐느껴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있던 3000명의 교인이 모두 다 울면서 '나는 집을 내놓겠다' '나는 1년치 월급을 내놓겠다'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의 그런 헌신으로 한일은행에서 무담보로 5000만원을 융자해줘 공사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헌신한 교인들께 오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가장 괴로웠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국민일보에 문제가 생겼을 때가 저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통일교에서 신문을 발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맞서 문서선교를 담당할 일간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한국 교계에 형성됐지만 누구도 돈을 내지는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분석은 초기비용으로 6000억원을 투자해야 하고, 거기에 한 달에 30억원씩 5년을 투입해야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엄두도 낼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기도 끝에 응답을 얻고 성도들의 동의를 받아 국민일보를 창간했습니다. 신문사에 적자가 누적되고 윤전기 구입, 컴퓨터 시설 도입, 사옥 신축 등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는데 IMF 사태가 밀어닥쳤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세무조사를 당해 200억원이 넘는 세금을 추징당하고 국민일보를 운영하던 큰아들이 구속되었습니다. 그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당뇨와 고혈압을 얻었고 손 떨림 증세도 그때부터 생겼습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이 건져주셨습니다." ―50년 목회생활 동안 휴가 한 번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건축할 당시 김성혜 사모께서 두 말 없이 집문서를 내놓았다는 기록도 보았습니다. 가족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동안 교회를 성장시키면서 한세대, 베데스다대학, 오산리기도원, 국민일보, 엘림복지타운 등을 세우고 해외 선교집회를 개최하느라 휴가를 갈 수 없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도 인도해야 했기 때문에 간이침대를 놓고 교회에서 자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집안 대소사는 집사람이 처리했습니다. 아이들은 내가 손님 같다고 했습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에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시간을 내서 가족에게 더 잘해줄 생각입니다. 그러나 좋은 점도 있습니다. 제가 간섭을 안 하고 모든 걸 맡기니까 집사람은 남는 시간을 이용해 공부를 했습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미국 브루클린음대 대학원과 맨해튼음대 대학원을 졸업했고 오럴 로버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우리집에서 정식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아내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한세대 총장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절을 하라고 농담도 합니다." 대담=임순만 미션부국장, 정리=유영대·백상현 기자 |

누구나의 시작은 미약하다. 그리고 조금은 드라마틱하다. 여기 그런 드라마가 있다. "난 할렐루야 아줌마가 하두 소리를 잘해서 그거 들으려고 왔지. 그런데 젊은 양반이 연설을 하네. 그럼 난 그냥 집으로 갈게요. 배도 고프고."
1958년 순복음신학교를 갓 졸업한 22세의 조용기 전도사가 서울 대조동 천막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릴 당시의 장면이다. '할렐루야 아줌마'인 최자실 전도사가 대조동 묘지 옆 깨밭에 천막을 두르고 사과상자에 보자기를 씌워 강대상을 만든 교회에 찾아온 첫 교인인 할머니는 소리를 들으러 왔다며 그냥 가겠다고 하고, 조금만 있으면 소리를 들려주겠다고 붙잡는다. 순복음교회의 출발은 이렇게 희극적이다.
이런 미약함에서 역사가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재적 성도 76만명을 기록하며 세계 최대의 단일 교회로 성장시킨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 그의 '영적 어머니'인 최자실(1989년 작고) 목사. 외국에서는 '한국의 대통령은 몰라도 조용기 목사는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아 지난 9일 기념대성회를 가진 데 이어 14일에는 조용기 원로목사 추대예배를 갖는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개척자 조용기 목사가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는 것이다. 석 달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피를 토하며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절규했던 청년이 하나님을 믿고 살아나 세계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성장의 기록을 남기고 일선을 떠나는 것이다.
―올해로 목회 사역 50주년을 맞아 오늘 원로목사로 추대예배를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감회가 어떠신지요.
"사람들은 목회 50주년을 맞아 은퇴를 하니까 섭섭하다고 하는데 저는 평온한 마음입니다. 마라토너가 최선을 다해 달려 목표 지점에 골인하는 것처럼 홀가분합니다."
―천막교회에서 5명의 성도로 시작한 교회가 현재 재적 성도 76만명의 세계 최대 단일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교회 성장 최고의 기록을 거둔 데에는 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한가지만을 든다면 무엇을 꼽고 싶습니까.
"목회자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전쟁 직후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국민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들은 영적 구원에 매달려 사람들의 현실적 삶과 육신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적 구원과 동시에 일상의 삶과 건강의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사람들은 물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쇼핑센터에 갑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로 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세계적인 성장은 제일 먼저 설교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쉬우면서도 핵심이 분명하고 스토리텔링이 대단히 조직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설교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와 감동 없이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조를 잘 짜서 말을 잘 하더라도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설교는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님께 의지하면서 성령으로 충만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염려와 근심 걱정에 대해 해답을 주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했습니다. 그것을 전달할 때는 어린 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최근 발행된 '여의도의 목회자'를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처럼 읽었습니다. 국제신학연구원에서 펴낸 것이기는 하지만 구술된 구조로 볼 때 목사님이 글을 쓰는 것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젊었을 때 저는 문필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서대문교회 시절에도 글을 쓰곤 했지만 시간이 부족해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문학적인 성향 때문인지 설교를 할 때에도 시적 운율과 소설적인 구조력을 높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대조동 순복음교회 시절이나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또 여의도순복음교회 초기 시절에는 가난한 성도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회의 불안세력이 될 수도 있었던 그들이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고 희망을 가꿔나감으로써 안정세력으로 변화해 나갔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당시 많은 사람의 절박한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특히 집도 없이 노동을 하며 교회에 와서 먹고 자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사회적으로 불안세력이 됐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온순한 양이 되어 열심히 일하고 술과 폭력을 멀리하며 저축해 중산층이 되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왜 장로교회가 아닌 순복음교회가 대형 교회가 되었느냐고 하면서 '장로교회에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신학이 없었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도 많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서러움이 많은 사람들이었기에 슬픔을 호소하고 목놓아 울 수 있는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 실컷 울고 위로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울부짖으며 하는 기도는 우리 교회가 처음인데 장로님들이 '당장 중지시키자. 교회가 초상집이냐'며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중지시키지 않았습니다."
―순복음교회의 장점과 단점을 분석해 주십시오.
"장점이라면 우리 교회는 서민교회라는 점입니다. 출석하는 교인은 대부분 우리 사회 중산층 이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쉽게 나올 수 있는 교회라는 점이 커다란 장점입니다. 어떤 교회는 엘리트층이 많고, 또 어떤 교회는 지식인 계층이 많지만 우리 교회는 '쟁이'들이 많습니다. '떡쟁이' '소금쟁이' 그런 것이 자랑입니다. 정다운 교회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장엄한 예배 형식, 즉 예술적인 예배 의식이나 예배의 미학 같은 것은 부족합니다. 이것이 단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전 건축 과정에서 목사님이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로 큰 어려움이 있었는가 하면, 대대로 쓰던 놋그릇을 바친 한 할머니와 같이 뜨거운 성도들의 헌신이 뒷받침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까.
"중동전쟁이 일어나 오일 쇼크를 겪을 때였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헌금도 들어오지 않고 교회 건축은 중단되었습니다. 건축회사는 나를 고소하고 노동자들은 돈 달라고 아우성이고, 집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참담한 형편이었습니다. 아파트 7층에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회 건축 현장 콘크리트 바닥에서 철야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어느날 아현동에 사시는 80대 할머니가 '우리 목사님이 지금 죽게 됐다. 나는 돈이 없으니 이것이라도 바치겠다'며 조상 대대로 쓰던 놋그릇을 내놨습니다. 저는 마음이 너무 아파 꿇어앉아 할머니를 붙잡고 울며 '이것은 죽어도 못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돈이 안 된다고 안 받는 것이냐'며 흐느껴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있던 3000명의 교인이 모두 다 울면서 '나는 집을 내놓겠다' '나는 1년치 월급을 내놓겠다'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의 그런 헌신으로 한일은행에서 무담보로 5000만원을 융자해줘 공사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헌신한 교인들께 오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가장 괴로웠을 때는 언제였습니까.
"국민일보에 문제가 생겼을 때가 저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통일교에서 신문을 발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맞서 문서선교를 담당할 일간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한국 교계에 형성됐지만 누구도 돈을 내지는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분석은 초기비용으로 6000억원을 투자해야 하고, 거기에 한 달에 30억원씩 5년을 투입해야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엄두도 낼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기도 끝에 응답을 얻고 성도들의 동의를 받아 국민일보를 창간했습니다. 신문사에 적자가 누적되고 윤전기 구입, 컴퓨터 시설 도입, 사옥 신축 등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는데 IMF 사태가 밀어닥쳤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세무조사를 당해 200억원이 넘는 세금을 추징당하고 국민일보를 운영하던 큰아들이 구속되었습니다. 그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당뇨와 고혈압을 얻었고 손 떨림 증세도 그때부터 생겼습니다. 도저히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이 건져주셨습니다."
―50년 목회생활 동안 휴가 한 번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건축할 당시 김성혜 사모께서 두 말 없이 집문서를 내놓았다는 기록도 보았습니다. 가족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동안 교회를 성장시키면서 한세대, 베데스다대학, 오산리기도원, 국민일보, 엘림복지타운 등을 세우고 해외 선교집회를 개최하느라 휴가를 갈 수 없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도 인도해야 했기 때문에 간이침대를 놓고 교회에서 자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집안 대소사는 집사람이 처리했습니다. 아이들은 내가 손님 같다고 했습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에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시간을 내서 가족에게 더 잘해줄 생각입니다. 그러나 좋은 점도 있습니다. 제가 간섭을 안 하고 모든 걸 맡기니까 집사람은 남는 시간을 이용해 공부를 했습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미국 브루클린음대 대학원과 맨해튼음대 대학원을 졸업했고 오럴 로버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우리집에서 정식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아내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한세대 총장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절을 하라고 농담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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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되고 1996년 한국어로 번역된 '4차원의 영적 세계(The Fourth Dimension)'는 39개 언어로 번역된 세계적 베스트 셀러입니다. 해외에서 먼저 출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외국에서 그 책은 크리스천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읽히고 있다고 합니다. 4차원 영성의 중심 내용을 소개해 주십시오.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영적 원리인 4차원의 영성을 개발해 창조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속해 있는 3차원 세계는 운명적으로 4차원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4차원의 시공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생각, 믿음, 꿈, 말을 통해 4차원의 영적 세계와 소통하는 라인을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네가지 요소가 긍정적으로, 창조적으로 변할 때 우리의 삶은 바로 그렇게 변하게 됩니다. 이 원리는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성령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성령님이 제게 가르쳐주신 비밀입니다." ―우리 사회는 경제 규모가 크게 커졌지만 부정적인 사고방식은 별로 바뀌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대통령에 대해, 사회에 대해, 이웃에 대해, 교회에 대해 좋은 말을 하기보다는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매스컴은 부정적인 뉴스 일색입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봅니까. "우리가 오랫동안 식민지배를 겪었고, 그 후에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서로 대결하는 문화를 형성해온 것 같습니다.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선 먼저 반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누구라도 국가를 제대로 이끌어가기 어렵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대로, 이명박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대로 위기에 처해지는 구조입니다. 국민들이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화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일류 국가가 되기 어렵습니다. 미국 쇠고기 사태를 보더라도 과학보다 정치적 주장이 앞서고, 여론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근거 없이 극단적인 말을 합니다. 일방적으로 밀고나가는 것이 우리의 습관입니다. 함께 모여 토론하고 합의하면서 장점을 찾아나가는 국민적인 프로세스가 필요합니다." ―1964년 4월 처음 해외 선교를 시작한 이래 2007년까지 지구를 115바퀴나 돌며 72개국에서 385차례 대형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집회는 어떤 것입니까. "브라질 상파울루 군용 비행장에 150만명의 군중이 모인 집회가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브라질 대통령이 마중을 나왔는데 군중 사이로 들어갈 수 없어 헬리콥터를 타고 강단으로 갔습니다." ―해외 선교 초기에 가는 곳마다 어려움을 겪으며 이런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에 커다란 절망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런 부족한 느낌 속에서 세계를 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계 선교 현장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전에 교회가 어려울 때는 혼자 300달러를 갖고 나갔습니다. 타락한 경찰에게 지갑과 여권을 통째로 빼앗겼는가 하면 집회 시간이 임박했는데 뉴욕 지하철에서 길을 잃고 헤맨 적도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에 사로잡힐 때가 많지만 그럴 때마다 손을 내밀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한번은 노숙자들이 모이는 스위스의 한 여관에서 심한 감기몸살로 쓰러졌습니다. 혼자 며칠을 끙끙 앓다 자리에서 일어나 메모지에다 '만일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흐르는 별똥별처럼 죽어도 좋다. 그러나 한번 출발한 길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비장한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한 10년 지났는데 교회로 우편물이 도착했습니다. 여관 주인이 동양인 투숙객이 떠난 다음 방청소를 하다 메모지에 쓴 글을 발견했는데 누군지 몰라 간직해 왔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세계적 목회자라는 것을 알고 주소를 수소문해 보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세계 선교는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참된 길을 가르쳐주라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1978년 4월 독일 칼스루헤 집회 당시 스위스에서 온 말기 유방암 환자, 신장 파열로 죽어가던 네덜란드에서 온 환자 등을 고치는 등 놀라운 신유(神癒)를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런 일들이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집회가 끝나면 무엇을 느낍니까. "아, 하나님은 위대하시구나 하는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극심한 영적 전쟁을 겪은 직후라 그런지 영혼이 고요해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독일에서는 집회 장소에 꼭 의사가 참석합니다. 그때 유방암 수술을 열세번이나 받고 다 죽어가다가 마지막에 기도나 받아보겠다고 온 중환자가 참석한 것을 보고 의사가 나더러 그 환자를 내보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사법 당국에 불려가 국제 문제로 비화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의사에게 환자가 하루만 더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토요일에 안수기도를 해주고 주일 집회에 한 번 더 오라고 했는데 암이 나아서 온 것입니다. 의사가 검사해보니 암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가 자기도 당뇨병이 있다면서 기도를 부탁해 대중 앞에서 안수기도를 해준 적도 있습니다." ―은퇴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 최대 규모의 성도들을 떠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은퇴 이후의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랑과행복나눔재단을 설립, 국내외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제2의 성령 사역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지금까지 많은 자선사업을 했지만 더 본격적이고 조직적으로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운동을 할 생각입니다. 초교파적으로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어려운 사람들에게 의료비를 지원하고, 저소득층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소년소녀가장과 독거노인들을 돌보고…. 여러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평양 대동강 유역에서 '조용기심장전문병원' 착공식이 열렸습니다. 심장전문병원은 한번 건립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꾸준히 큰돈이 들어가는 매우 큰 사업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갈 계획입니까. "북한에서의 일회성 사업은 다른 자선단체에서도 많이 합니다. 우리는 오래 투자하고 공을 들여야 하는 심장전문병원을 세워 운영 방법과 기술을 지원하고 북한과 친교를 나누려 합니다. 이것도 사랑과행복나눔운동의 일환입니다. '조용기심장전문병원'이란 이름은 북측에서 요구한 것인데, 제 이름이 들어가 있어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심장전문병원 착공에 앞서 드린 봉수교회 예배에서 "옛날에는 골수 보수였지만 북쪽의 주민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적극 지원하는 쪽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공산주의에 찬동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사랑을 적극적으로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북한에 복음을 전하라는 뜨거운 감동이 생겨납니다. 사랑의 실천은 국경, 제도, 정치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조건을 붙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북한에 갔을 때 북한 당국자들이 '지금까지 조 목사의 경력을 보면 국가보안법 찬성의 선봉장이었고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주의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골수 보수임은 틀림없다. 지금도 그렇다. 그렇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념과 제도를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여기에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여기서 다른 얘기는 하지 말고 예수 사랑 이야기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주목하는 한국 교회의 후배 목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제 개발연대의 시대는 지나고 문화·복지문화 시대가 왔습니다. 우리의 후배들은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성장해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사역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터전을 닦아야 했기 때문에 요즘 비판을 많이 하는 교회 성장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흘러가는 세대가 다음 세대에 의해 비판을 받고 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후배들은 성장한 경제, 지어놓은 교회, 모아놓은 성도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에 호응해야 합니다. 훌륭한 인재들이 한국 교회에 참으로 많습니다. 사역하는 것이 우리보다 조직적이고 훌륭합니다." -앞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이끌어가게 될 후임 이영훈 목사에게 주는 말은 어떤 것입니까. "이영훈 목사는 내 영적인 아들과 같습니다. 교회학교 시절부터 우리 교회에서 제자교육을 받았습니다. 이 목사의 부친은 장로였고 어머니는 전도사였습니다. 교회에서 큰 역할을 하며 자란 아들입니다. 미국 템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수재로 성격도 온화하고 능력이 많은 종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뽑았고 당회에서 만장일치로 동의했습니다. 전체 성도의 지지를 받는 훌륭한 목회자로 교회를 잘 이끌어갈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영훈 목사에게 당부할 말을 해 주십시오. "당부할 말은 없습니다. 잘하고 있으니 지금처럼 하면 될 것입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뒤에 오는 세대가 더 잘합니다." -국민일보의 사시는 '진실 사랑 인간'인데 언론에서의 '진실'은 실천적인 면에서 상당히 어려운 개념이라고 생각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얘기가 나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한 여자에 대해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다'면서 예수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시험을 합니다. 이때 예수는 땅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씁니다. 여자가 음행한 것은 드러난 사실이었지만 예수는 돌로 치지 못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감추고 있는 음행의 또 다른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드러나 있는 사실에 다른 편의 사실을 보태면 진실에 가까워집니다. 바로 이것이 언론이 추구해야 할 사실보도, 즉 진실에 가까운 보도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문은 일방적인 하나의 사실만을 보도하거나 폭로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런 보도는 기독교 정신과 어긋날 때가 많기 때문에 국민일보는 사람을 살리는 신문이 됐으면 합니다."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 대형 교회에 대한 비판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그 비판을 어떻게 보십니까. "인류 역사는 항상 부정과 긍정이 충돌해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나오는 쪽으로 전개돼 왔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장을 지향하는 시각과 비판하는 시각이 모두 필요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방향이 모색됩니다. 저는 한국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 존재의 위상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대에는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 수를 늘려나가는 것보다 중요한 게 없었습니다. 이제 문화·복지 시대를 맞아 한국 교회가 교회 성장의 와중에 발생하는 문제를 극복하고 세계 교회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교회로 발전해나가기를 기대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어느 것입니까. "요한삼서 1장 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저는 매일 그 말씀을 묵상하며 지냅니다. 예수를 믿어 영혼이 잘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범사가 잘되는 삶을 살며, 구원받은 성도가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돼 강건하게 되는 '삼중축복'의 요체가 바로 이 말씀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모든 게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국민일보에 대한 걱정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국민일보가 국민문화재단 소속으로 전환됐고 지면도 날로 좋아지고 있어 기대가 큽니다. 삶은 끊임없는 장애물 경주와 같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어려움을 이길 용기를 갖게 해달라고 간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성령 사역을 하며 여생을 보내겠습니다." |
교회성장과 리더십 전문가 홍영기 목사의 『리더십의 비밀』. 한국에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룬 조용기 목사의 10가지 리더십의 비밀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교회성장연구소의 15주년을 기념하여 창립자인 조용기 목사에게 헌정하는 것이다. 저자가 조용기 목사를 가까이에서 접하면서 관찰하고 연구한 리더십의 원리를 성경적으로 정리한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간의 노력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조용기 목사와 만날 수 있다.
목차
인사말
Prologue
PART 1. 4차원의 영성
Secret 1. 고난과 눈물의 광야학교에서 공부하라
Secret 2.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꿈을 가지라
Secret 3. 분명한 목회철학과 사명감을 가지라
Secret 4. 마음을 움직이는 희망의 메신저가 되라
PART 2. 자기개발
Secret 5. 자신과 공동체의 영적 전압을 높이는데 성공하라
Secret 6. 항상 배우고 공부하는 열정의 지도자가 되라
PART 3. 파트너십
Secret 7. 다른 사람들과 동역하고 그들을 세워주라
Secret 8.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이루라
PART 4. 성령사역
Secret 9.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라
Secret 10. 늘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하라
조용기 목사와의 특별 인터뷰
미주
참고문헌
Epilogue
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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