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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으로 바위 깨다 , 해직 교사 출신으로 교육 의원 된 김형태 선생 인터뷰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10. 6. 25. 14:19

계란으로 바위 깨다 ,
해직 교사 출신으로 교육 의원 된 김형태 선생 인터뷰
입력 : 2010년 06월 18일 (금) 11:11:14 윤희윤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해직 교사'보다 '천상 교사'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김형태 선생. ⓒ뉴스앤조이 윤희윤

 
 
'내부 고발자', '해직 교사'란 수식어에서 느껴지는 '투쟁' 이미지는 없었다. 인상 좋은 옆집 아저씨 같다고나 할까. 말하는 중간 중간 "맞죠", "그죠" 등 추임새를 넣는 말투에는 고등학교 선생님의 향기가 묻어났다. '해직 교사'보다 '천상 교사'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본인도 '교육 의원' 보다 '선생'으로 불리는 것이 좋다 했다. 인터뷰하는 내내 가장 많이 했던 말도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였다.

김형태 선생(46)의 교육 의원 당선은 기적이다. 교육 의원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어서 출마가 늦었다. 조직도 돈도 없었다. 투표지 기재 순서도 일곱 번째. 전교조 출신의 해직 교사라는 낙인만 있었다.

지역구는 강서·양천·영등포. 양천구와 영등포구는 강남 3구와 함께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가 민주당 한명숙 후보를 이긴,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지난 6월 11일 김형태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당선은 기적이 아니라 당연이었다.

0.63% 차이의 박빙이었던 승부를 가른 건 양천구 몰표였다. 2등한 임헌만 후보와 전체 표차가 3,743표인데, 양천구에서 6,195표가 차이 났다. 김형태 선생이 근무했던 양천고가 양천구에 있다. 양천고 졸업생과 학부모들이 움직였다. 지방에 있는 제자들도 서울에 올라와 투표했다. 입원 중에도 투표한 학부모도 있었다. 그가 가르친 적이 없는 학생들도 김형태 선생을 뽑아야 한다고 부모를 설득했다. 양천구 투표율은 56.2%. 서울에서 두 번째로 높았다.

제2강남이라는 양천구에서 '진보'를 내걸고도 당선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목사 꿈 버리고 목사 같은 교사 되다

김형태 선생은 교사가 꿈이 아니었다. 목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어머니가 반대했다. 부모님은 취업하기 쉬운 경상대를 가라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부모님 기대를 거절할 수 없었다. 일반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김형태 선생은 목사를 하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공을 국어로 택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자식을 위해 헌신하던 분이셨다. 가정이 흔들렸다. 어려웠던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 취업을 해야 했다. 당시 국어로 유명했던 한샘출판사에 입사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학원 강사를 시작했다. 잘나갔다. 송파, 청담, 안양 등 학원가에서 그를 부르는 곳이 많았다. 한 달에 500만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아이들과 인격적 관계 없이 강의만 하는 것이 허탈했다. 신앙인으로 돈을 좇아 살 수 없었다. 월급이 적더라도 학교로 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1990년 양천고에 들어갔다.

신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정리가 됐다. 개인 구원뿐 아니라 사회 구원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경험하며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신앙 좋은 평신도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사 하겠다는 마음으로 교사도 하고, 직장도 다녀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목사 같은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신학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예수처럼 사는 것이 중요하다.

   
 
 

▲ 김형태 선생은 예수님이 제자들 발을 씻긴 것처럼 낮아진 자세로 섬기겠다는 의미로 수학여행 가면 아이들과 세족식을 했다. 사진은 한 학생이 김형태 선생 인터넷 카페에 '이런 선생님 없지'란 제목에 '이렇게 씻어 준다고 할 때 재밌었지만 여태까지 이런 선생님 없었을 껄?? ㅋㅋㅋ'란 내용으로 올린 것이다. (사진 제공 김형태)

 
 
예수처럼 사랑하다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안쓰러웠다. 입시 스트레스가 많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나 못하는 아이나 같았다.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권위적으로 아이들을 대하지 않았다. 매를 드는 등 권위적인 방법을 쓰면 아이들을 대하기 쉬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워도 스스로 세운 '교육적으로, 민주적으로, 자율적으로' 3대 원칙을 지켰다.

학원에서는 잘 가르치기만 하면 되지만 학교는 다르다.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아이들은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귀신같이 안다. 김형태 선생은 2월 말 학급 명단을 받으면 3월 2일 아이들을 만날 때까지 이름을 다 외웠다. 그리고 항상 아이들 이름을 불러 줬다.

아이들에게 사막 같은 학교생활에 오아시스 같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함께 김밥을 만들고 고기도 구워 먹었다. 아이들 생일에는 편지를 써 줬고, 한 달에 한 번 생일 파티도 했다. 장학회를 만들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도왔다. 수학여행 가면 세족식을 했다. 예수님이 제자들 발을 씻긴 것처럼 낮아진 자세로 섬기겠다는 의미였다. 아이들에게 그런 내용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굳이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진심은 통했다.

물론 안 그런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 종아리를 때리라'는 방법도 써 보고 달래기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한 마디면 되는 상황도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런 상황일수록 서운해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에게 뭘 받을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아이들을 위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를 사랑해 준 예수도 그랬다.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도록 학부모와의 소통도 놓치지 않았다. "저희 아이처럼 성심껏 지도하겠습니다." 학기 초 학부모들에게 문자를 보내는 걸 시작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보냈다. 의무감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됐다. 귀찮지 않았다.

친구 같고 삼촌 같은 선생이 되고 싶어 상담을 많이 했다. 아이들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아이들은 김형태 선생에게 학교생활을 하며 느끼는 것들을 숨김없이 말했다. 왜 0교시와 야간 자율 학습을 강제로 해야 하는지, 체육복을 비싸게 학교 체육실에서만 사야 하는지, 교복을 공동 구매하지 않는지, 급식에서 이물질이 계속 나오는데 바꾸지 않는지 궁금해 했다. 아이들의 불만 중 말이 안 되는 것도 있었지만 아이들 말이 대부분 옳았다.
 
"상담하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결하면 좋은지 너희가 먼저 생각해 보고 부모님과도 상의해 보라고 이야기하죠. 하지만 학교 관계자 없이 아이들과 부모님만으론 해결 못해요. 좋은 선생이 되겠다고 하면서 너희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할 수 없었어요."

아이들 위해 투사가 되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 투사가 됐다. 아이들을 생각하니 학교 비리가 자꾸 보였다. 학교는 이사장 운전기사 부인이나 가정부가 급식 업체를 맡아 운영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 김형태 선생은 이런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학교에 개선을 요구했다. 문제만 제기하지 않았다. 인근 학교의 좋은 사례를 찾아 대안도 제시했다. 하지만 학교는 귀를 닫은 채 듣지 않았다. 오히려 학교 명예를 훼손했다며 김형태 선생을 학교 밖으로 내쫓았다.

   
 
 

▲ 해직 후 학생, 학부모, 지역 주민, 시민 단체, 교인, 지인, 문인 등 많은 사람들이 김형태 선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사진 제공 김형태)

 
 
김형태 선생은 늘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해직될 때까지 첫 마음을 잃지 않았다. 아니 해직 후 1년 넘게 1인 시위를 했던 것도 좋은 교사가 되고 싶어서였다. 해직되고 한때 죽고 싶었다. 분노와 저항의 표시로 분신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아이들 때문에 다시 일어났다.

"저를 버티게 한 건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가르친 대로 실천하고, 배운 대로 행동하거든요. 저는 아이들에게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하고, 불의한 건 불의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선생이 학교 비리를 고발하다가 해직됐다고 그냥 사라지면 아이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아, 바른 소리하면 김형태 선생님처럼 되는구나. 불의를 참지 못하면 어려움 당하다 사라지는구나' 하지 않겠어요. 아이들이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게 될까 봐, 아무리 힘들어도 정의와 양심은 반드시 이긴다는 걸 보여 주자 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했다. 좋은 교사가 하나님 주신 소명이라면 가 보겠다 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포기하지 않는 걸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학교 정문에서  피켓을 들었다. 학교에서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1인 시위하며 과로와 스트레스로 팔의 신경 하나가 죽어 수술을 했을 때도 학교 앞으로 출근했다. 학생, 학부모, 지역 주민, 시민 단체, 교인, 지인, 문인 등 많은 사람들이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김형태 선생은 교육 의원에 당선되지 않았다면 아마 가정이 깨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1년 넘게 힘들고 지난한 싸움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채로 교육 의원에 출마하는 것은 가족, 재산, 목숨을 내놓는 행위와 같았다. 시민 단체에서 출마를 권유했지만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몇 날을 장고 끝에 다시 한 번 교육 비리 척결이 자신의 부르심이라면 불속에라도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 돈도 조직도 없어 힘들었던 선거 운동은 그가 해직되었을 때 힘이 됐던 학생, 학부모, 시민 단체, 교회가 다시 힘이 되어 주어 기적같이 끝낼 수 있었다. (사진 제공 김형태)

 
 
선거 운동은 만만하지 않았다. 지역구가 너무 넓었다. 유료 운동원을 많이 둘 형편도 안 됐다. 그가 해직되었을 때 힘이 됐던 학생, 학부모, 시민 단체, 교회가 다시 힘이 돼 줬다. 해직될 때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돕는 사람도 있었다. 선거 운동하면서 당선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김형태가 양천고 해직 교사라는 소리를 들으면 눈빛이 달라졌다. 심지어 한나라당 선거 운동원까지 그에게 격려를 보냈다.

교육 의원으로 포부를 묻자 대단한 건 없다고 했다. 교단에 처음 섰을 때 좋은 선생님이 되기로 했던 것처럼 좋은 교육 의원이 되는 것이다. 김형태 선생은 아이들과 학부모, 교사의 충실한 대변자가 되어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의 공약 '부정부패 없는 학교, 무상 교육 실현, 특권과 차별 없는 교육, 학생 인권 보장' 등은 김형태 선생이 이런 마음이 담겨 있다. 

"경력도 인물도 없는 저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역사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게 가시밭길이라고 해도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인데 할 사람이 없다면 순종해야죠. 교육청에 총대 매고 양천고 비리를 고발할 때도, 교육 의원에 출마할 때도 '하나님, 이 일이 학교를 변하게 하고 아이들을 위한 일이라면 제가 하겠습니다'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제 인생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쓰시더라고요."

학교 비리 폭로부터 해임까지
 

김형태 선생이 2008년 4월 서울시교육청에 고발했던 양천고등학교 비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2009년 국정 감사에서까지 논의될 정도로 많다.

이사장과 교장은 법인카드를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무려 200회에 걸쳐 백화점 쇼핑, 호텔비 지불 등에 1,700만 원을 썼다. 이사장은 학교 돈으로 학교 급식 업체 사장, 직원과 제주도, 중국 등 3차례 여행도 갔다. 보통의 경우라면 급식 업체 사장이 이사장 여행 경비를 지원해 주는데 거꾸로다. 이 급식 업체는 학교와 급식 계약을 체결할 당시 회사 등록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사장은 이사장 운전수의 부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양천고 이사장은 법인이 지불해야 하는 법인 소유의 차량 운영비를 학교 돈으로 지불했다. 또 법인 재산에 부과된 토지세와 종합부동산세, 핸드폰 요금, 이사장이 개인적으로 가입한 단체의 회비도 학교 돈으로 냈다. 이 돈을 합하면 4,000만 원에 이른다. 

하지만 서울시교육청은 양천고 비리를 척결할 의지가 없었다. 이사장이 학교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은 사립학교법 제29조를 위반한 횡령이었음에도 이를 형사 고발하지 않았다. 그냥 갚으라고 했다.

있지도 않은 기간제 교사를 교육청에 등록해 월급을 받아냈다. 수업 시간과 일지를 가짜로 꾸며 교육청에 보고했다. 이사장과 전 교장이 검찰에 고발된 유일한 건이다. 업무상 배임‧사기‧위계에 의한 공무 집행 방해 등의 협의였다. 

서울교육청이 유마무야 넘어간 사안도 여러 가지다. 동창회도 없는데 동창회비를 걷었다. 특정 체육복 업체와 계약해 교내에서만 체육복을 팔았다. 이사장 운전수 부인을 허수아비 사장으로 세워 급식 직영 의혹도 있었다. 하지만 수사권이 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학인하지 않았다. 

교육청의 비호 때문인지 학교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학교 비리를 고발한 김형태 선생을 2009년 3월 6일 파면했다. 교육청은 내부 고발자인 김형태 선생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도록 보호했어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다. 6월 서울시교육청 소청심사위원회에서 김형태 선생님에 대해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징계 무효 판결을 내렸지만 학교는 김형태 선생을 다시 파면했다. 이번엔 절차를 지킨 파면이었기에 소청심사위원회는 파면은 너무 심하니 해임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검찰도 학교 비리에 눈을 감았다. 서울남부지검은 지난해 10월 30일 양천고 이사장에 대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의 고발과 관련해, 횡령 등에 대해서는 무혐의, 사립학교 법 위반에 대해서는 기소 유예 처분을 내렸다.

김형태 선생이 교육 의원에 당선됐지만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 2월 지역 주민 등으로 꾸려진 '양천고 교육 비리 척결 공동 대책위'가 남부지검에 고소한 건과, 교육소청위원회를 상대로 해직 판결에 대한 행정 소송이 아직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