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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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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13일 양화진 문화원에서는 세상에서 소금의 맛을 내고 있는 한국염(국산 소금) 목사를 강사로 세웠다. 한 목사는 '결혼 이주 여성의 한국 가족 통합과 폭력'이라는 주제로 다문화 가정들이 겪고 있는 열악한 문제들을 내놓았다. 제목부터 왠지 가슴 한편이 저려 오며 무언가 부끄러운 우리들의 치부가 드러날 것 같았다. 한국염 목사는 2001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를 설립해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된 이주 여성들의 대모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지극히 작은 체구에 비해 한 목사가 감당하고 있는 사역은 크게만 보였다.
우리 사회 안에서 바라본 이주민의 실태
글로벌 시대에 지구촌이 하나라는 것을 실감하듯이 최근에 한국도 국제 결혼이 날로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이주민 100만 시대를 넘어 드디어 '다문화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 여성과 다문화 가정들이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흡수되기까지 많은 문화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주 여성의 16.9%가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며 비정한 가정 파탄을 겪는 데까지 이어져 국가 신뢰도가 땅에 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현재 세계 인구의 약 3%가 자국을 떠나 개발도상국으로 이주하는 가운데 인종과 문화적인 차이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한다. 그 가운데서 이주 여성들은 열악한 인권 사각지대로 떠밀려 나고 있으니 누군가는 발 벗고 나서야 할 일이다.
대한민국은 OECD 가입 국가로서 높은 경제 성장과 함께 스포츠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초대형 교회가 가장 많은 부강한 국가 서열에 든다. 그러나 진정한 부국은 먼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나라가 아닐까.
현재 이주 노동자들은 한국 경제를 살리고 있는 원동력이지만 그들의 현실은 '3D 업종'(difficult, dangerous, dirty)에서 열악한 노동권 침해를 당하고 있다. 또한 이주 여성들은 심각한 성폭력 앞에서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대부분 가난한 나라에서 신부를 매매혼적 결혼 방식으로 데려오기에 학대와 착취가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인권 문제가 드러나며 비인도적인 '배타주의 차별화'를 법으로 보호해 주어야 할 긴박한 상황에 와 있다 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인 혐오증이 심한 편이다. 아마도 유교 문화와 함께 단일민족이라는 혈통주의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시급히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이방인을 포용하는 우호적인 자세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징기스칸은 "성을 쌓기 시작하는 순간 한 국가의 멸망은 시작 된다"라 했다. 그의 도전 정신과 통합 정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물게 했다. 내 나라, 내 민족만을 외치는 것은 자칫, 고약한 국수주의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에서 세계를 지배한 나라들은 패권을 쥐기 위해 먼저 인종, 종교, 문화와 관습의 벽을 허물어야 했다. 과거 초강대국을 이룬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대몽골 제국, 그리고 대영 제국에 이르기까지 초강대국이 되기 위해 그들은 다문화와 소통하며 꾸준히 이방 민족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비근한 예로 미국은 이민 정책으로 수많은 우수한 민족을 지금도 받아들이고 있다. 이민자들을 통해 다문화를 수용하며 그들의 재능과 활력을 이용해 모든 산업과 IT분야에서 급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 다양하게 융합된 가운데 세계 속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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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화 사회 교육의 대상은 이주민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인을 비롯해 모든 종교인들이어야 할 것이다. 한국염 목사의 강연을 듣고 있는 참석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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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 안에서 바라본 이방인의 실태
언젠가 TV에서 타국인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부강한 선진 사회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 길을 안내하면서, 반면에 개발 도상국인 아시아권 사람들이 길을 물으면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이것은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인종 편견을 여실히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이주 노동자들도 당연히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엄한 형제일 텐데, 과연 종교 안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성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국염 목사는 선교적인 차원에서 룻기를 제시해 주었다. 룻이 시어머니(나오미)와 생계를 위지하기 위해 보아스 밭에서 이삭을 주우며 살았다. 오늘날 한국 땅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가족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한국인들이 외면하는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보아스 밭이 아닌 악덕 업자 그늘에서 대부분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었다.
과연 언제까지 이주 노동자들이 인권의 사각지대로 떠밀려 억압받아야겠는가? 성서는 분명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삭이 되어 주었다. 사실 예수님도 이방인 구원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것 아닌가. 보아스 밭에서 이삭을 줍던 룻도 대표적인 이방인으로 훗날 다윗 자손 대에 이르러 예수님 대까지 이어진다. 이방인의 구원 역사가 얼마나 크고 비밀한 것들을 이루었는지 놀랍기도 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와 다른 그 누군가에게 이삭을 줍게 했을 때 복음은 긍휼의 강줄기를 따라 흘러간다. 마치 이방 여인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했듯이 이 땅에 모든 이방인들이 "여러분의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입니다"라는 이주민들 신앙 고백을 기대한다면, 그들의 삶이 그루터기처럼 자랄 수 있도록 우리는 옥토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직접 가서 전하지는 못해도 가까이 와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가 아닌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했다. 분명 그의 나라와 의는 자신의 부귀영화가 아닌 복음을 아직 알지 못하는 자, 그곳에는 복음이 없는 곳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선민의 기도만을 들어주는 이기적인 하나님으로 가두지는 않았는가. 지금 당장 나만의 기도를 내려놓고 가까운 이방인을 위한 기도로 건너가 보자.
어찌 보면 다문화 사회 교육의 대상은 이주민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인을 비롯해 모든 종교인들이어야 할 것 같다.
인류 모두의 본향은 하늘나라 아버지 집 아닌가. 지금 우리는 매 시간 본향을 향해 모두가 한 걸음씩 더 가까이 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구촌 모두는 나그네와 같은 이주민이며, 또한 지구촌 모든 사람의 이름도 같다. 바로 그 이름은 '이방인'이다.
국인남 / <당당뉴스> 행정실장, <크리스찬이여, 핸들을 꺾어라>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