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삶/영성

루터의 종교 개혁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그 결과 (개신교)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10. 5. 15. 10:34

루터의 종교개혁은 절박한 신앙의 실제적 필요성, 즉 자기 영혼의 구원에 대한 압도적 긴박성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가 중세의 참회제도와 수도원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를 훈련했지만, 그 고행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노력을 쌓을수록 더 절망을 느꼈다. 그러다가 그는 로마서를 읽을 때 깨달음을 얻었고, 결국 시편, 로마서 그리고 동료 수도사를 통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종교개혁의 혼이었다. 종교개혁은 루터의 체험적이고 영적인 용기로 말미암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루터는 로마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발행의 비리에 대해 95개 논제를 발표했다. 그 논제에서 회개와 사죄에 관한 견해들, 연옥에 관련된 견해들과 면죄부에 대해 로마 교회를 반박했다. 그 효과는 대 선풍을 일으키며 전파되었고, 독일인들의 민족적인 지지를 얻었다. 존 에크와 라이프지히 신학 논쟁 이후 독일의 젊은 인문주의자들이 루터에게 집결하게 되었고, 독일인에 의한 독일 건설의 주장이 수락되었다. 루터는 개혁을 차근히 추진해 나가면서, 설교와 책 들를 통해 독일 전역으로 내보냈다. 루터는 “기독인의 자유”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관해” 이 세 권의 논문에서 자신의 영적 체험과 신앙적 확신을 모두 기록하였다. 챨스 5세가 개최한 보름스(Worms) 의회에서 루터는 그의 저서와 그 내용을 취소하도록 강요당했지만, 그는 성경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성의 증언에 의해 본인이 틀렸다고 증명되지 않는 한 취소할 수 없다고 말했다. 루터는 이단으로 처형될 운명이었지만, 삭소니의 선제후는 루터를 자신의 성()으로 피신시켰다. 그 후에 루터의 원리들이 여러 교단의 수도사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의 메시지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가르쳤는데, 이러한 사상은 1525년 농민전쟁을 일으키는 계기(契機)가 되었다. 루터는 초기에는 농민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에 대한 압제와 지주들의 탐욕을 비난했다. 그러나 루터는 무장반란은 유익이 없다고 주장하고,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제후들에게 봉기를 섬멸하라고 강하게 호소했다. 결국 농민전쟁은 진압되고 농민들에 대한 압박은 가중되었다. 이때부터 종교개혁의 주도권은 복음적 제후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개혁된 독일국가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농민전쟁은 독일의 종교개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친 로마적 일부 제후들은 반루터적 입장을 더 굳히게 되어 로마 카톨릭 연맹을 지지하는 제후의 수가 증가했다.

 

1526년 스파이어 의회는 대다수의 루터 지지자들이었다. 그것은 지역 체제와 종교개혁의 승리를 의미했고 아우구스부르그(1555)의 영구적 신앙의 자유를 예고했다. 그러나 1529년 스파이어 의회는 카톨릭측은 교황과 황제가 굳게 단결한 반면 루터파는 지리멸렬되었고, 루터파 교회 설립 가능성을 완전 무산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개신교측의 항거를 초래하여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루터파와 쯔빙글리파를 합치기 위해서, 헤세의 필립은 신앙협의회를 준비했으나, 상대의 취약점을 공격함으로서 대담은 실패했다. 헤세는 또 다른 협의회를 준비했으나 루터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무산되었다. 이로서 독일 개신교 연합과 스위스 개신교와의 연합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챨스 5세는 1530년 무역의 중심지인 아우구스부르그에서 제국 내의 모든 선제후들, 제후들, 의 회원들을 소집하고 협상을 통해 종교적 평화를 이루려고 시도했다. 개신교들은 그들의 견해와 차이점을 황제에게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터의 제자인 멜랑크톤이 제출한 문서에서 루터파와 카톨릭의 차이는 극소화하고 루터파와 쯔빙글리파와의 차이는 과장되어 있다. 그러나 만인 사제 설이 분명히 나타나 있으므로 카톨릭의 입장과는 합치될 수 없었다.

 

루터의 일생 중 1519-1524년은 가장 영광스러운 기간이었다. 그의 꿈은 독일이 연합해서 로마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공중 예배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루터가 사망할 무렵 루터주의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루터 사후 스페인 황제가 독일의 선제후들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음으로 독일 전체가 황제의 발아래 놓이게 되었다. 황제는 로마교회의 화체설, 칠성례전, 동정녀 마리아, 등의 중세적 관행을 보전하고 교황을 교회의 머리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 독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개신교 제후들이 Naumburg에서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을 견지하고 루터파를 독일의 합법적인 신앙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지역의 종교는 지역에 따른다는 원리를 적용키로 한 것이다. 백성이 통치자와 다른 신앙을 고백하면 그의 재산은 몰수당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신앙의 자유를 향한 승리의 첫 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