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 목사가 훗날 제자훈련과 관련된 목회 철학을 수립하는 분기점은 성도교회 대학부를 맡으면서 찾아왔다. 전도사 시절에 감당한 은평교회 사역이 그에게 구령의 열정과 목회자로서의 가능성을 심어 준 기간이었다면, 성도교회 대학부 사역은 그에게 제자훈련에 눈을 뜨게 만들어준 기간이었다. 성도교회 부임 후 6개월 간, 그는 주일학교를 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김희보 담임목사가 젊은이 사역에 은사가 있는 것 같다며 그를 대학부 사역자로 임명했다. 그때 대학부 출석인원은 단 한 명이었다. 그가 바로 방선기(이랜드 사목, 직장사역연구소장) 목사다. 옥 목사는 방선기에게 대학부 사역의 협조를 구했고, 방선기는 기꺼이 협력하겠노라며 약속했다.
단 한 명으로 시작된 성도교회 대학부 그때 방선기는 서울대 학생 선교단체인 네비게이토(Navigator)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방선기는 네비게이토에 들어가 훈련을 받겠다고 했고, 옥 목사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가 허락한 이유는 단순하다. 거기에는 스스로 풀 수 없는 절박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단체(Parachurch)는 부흥하는데 왜 기성교회 대학부 사역은 사양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옥 목사는 이런 고민 끝에 선교단체에 좋은 점이 있다면, 당연히 배워서 교회 젊은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을 갖고 있었다.
옥 목사는 네비게이토 훈련과정과 교재들을 통해 기성교회가 갖지 못한 세 가지 장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복음’과 ‘양육’ 그리고 ‘비전’이었다. 이를 간파한 옥 목사는 ‘Parachurch의 Church화’를 위해 밤낮없이 매달렸다. 이를 위해, 방선기가 데려온 다섯 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제자훈련에 돌입했다. 나중에 12명까지 늘어난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학교 가는 날 이외의 시간은 모든 사생활이 중단되다시피 했다. 툭하면 기도원에 올라 기도하고, 성경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방학이면 일주일씩 합숙했다.
또한, 전 과목에서 B학점 이상이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옥 목사의 엄포에 그들은 학업에도 진력했다. 이때 만들어진 제자들은 한국교회와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박용규,『한국교회를 깨운다』, p.33).
옥 목사는 성도교회 대학부에서 미친 사람처럼 몰입했다. 주일 집회는 무려 5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시간 동안 리더를 중심으로 복음송 부르기, 모르는 사람 찾아 짝지어 기도하기, 도시락 먹기, 그룹 성경공부, 간증, 캠퍼스별 전도전략 모임, 새 가족 소개와 5분 메시지 그리고 마무리 기도로 진행됐다. 대예배가 끝나는 12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당시 유래가 없는 집회로 대학부를 이끌어 갔지만, 이렇게 긴 집회 시간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왜? 제자훈련의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옥 목사는 5년 동안 매주 토요일에 제자훈련을 했다. 방학 동안에는 여름과 겨울에 걸쳐 두 차례 수련회를 혼자서 진행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제자훈련 광인론(狂人論)’의 탄생 배경이다. 옥 목사는 제자훈련에 관한 ‘광인 공식’(a Crazy Man's Formula)을 만들어 냈다. “광인공식 C(Crazy for Christ)= B(Belief․신념)+E(Enthusiasm․열정)+V(Vision․비전)”
홀로 유학길에 오르다 신학생 시절, 옥한흠 전도사를 잘 아는 은사들은 교수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옥 전도사는 고집스럽게도 목회가 주님의 뜻이라고 여겼다. 그는 장학금을 받고 2년 동안, 미국 미시간 주 그랜드래피즈(Grand Rapids)의 칼빈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슬하에 3형제를 둔 자녀들 중 첫째와 둘째는 초등학교 1, 2학년이요, 막내는 돌이 갓 안 된 상태였다. 당시, 옥 목사는 경남 충무의 지교회로 가는 길과 유학의 갈림길에서 가족들을 한국에 두고 홀로 해외로 공부하는 쪽을 택했다.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리자, 부인 김영순 사모는 기가 막힐 지경이라고 했다(“나의 남편 옥한흠- 김영순 사모와의 인터뷰,”『빛과소금』 통권 163호(1998. 10), p.76). 그리고 옥 목사가 미국 유학을 떠나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친정어머니의 운수업을 도와 드린다는 명목으로 친정에서 생활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칼빈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본래 계획했던 대로 옥 목사는 3년 중 남은 1년 동안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로 옮겨 공부했다. 그는 한국 학생으로는 처음으로 목회학 박사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학문적으로 제자훈련을 체계화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진학했지만, 의외로 웨스트민스터는 실천신학 분야에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한스 큉의『교회론』과의 만남 고민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그에게, 구내서점에서 결정적인 전기를 가져다 준 사건이 발생했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의『교회론』(the Church)을 발견한 것이다. 비록 그의 신학사상에는 동조하지 않지만, 교회의 본질 중 사도성이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옥한흠,『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p.98).
특히, “모든 평신도는 사도의 계승자로서 예외 없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예수의 제자요, 소명자”라는 인식에 큰 감동을 얻었다. 그리하여 왜 그토록 평신도를 깨워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야 하며, 이를 목회철학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해답을 얻게 된 것이다.
한스 큉의『교회론』을 접하고, 옥 목사는 연구과정을 어렵지 않게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1년쯤 학교에 더 머물다가 아예 졸업논문까지 써서 학위를 받고 귀국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졸업 과정이 매우 까다로웠다. 논문 자체만으로는 안 되고, 현장에서 3년 간 사역하면서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이것이 새로운 갈등을 일으켰다.
이런 조건은, 제자훈련이라는 묘목을 가꾸는 데 척박한 한국교회의 토양을 감안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목회자의 길을 갈 바에는 학문연구에 시간을 더 보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결국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느 일터로 주님이 인도하실지 전혀 알 수 없었다. 4-500명이 모이는 서울의 모 교회에서 청빙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편지가 왔지만 마음이 없었다. 오직 개척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사랑의교회를 개척하다 그 무렵, 서울 불광동 소재 은평교회를 담임하던 배기주 목사로부터 편지가 왔다. 내용은 귀국해서 개척할 의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배 목사가 섬기는 은평교회 교인 중 몇 가정이 한창 개발 중인 강남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리가 멀어 본 교회 참석이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옥 목사는 이 징표가 자신이 드린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명령이라고 받아들였다. 주님의 인도가 무엇이라는 것을 발견한 이상, 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그해 6월에 귀국했고, 한 달 뒤에 사랑의교회를 창립했다(“사랑의교회 개척 이야기,”『목회와신학』, 통권 113호, p.51).
교회 창립 3년 후, 어떨 결에 지은 교회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배기주 목사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을 계기로 교회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고심 끝에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용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다. 은혜, 소망, 복음, 믿음 등의 이름들이 옥 목사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이런 이름을 가진 교회들은 이미 여러 곳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랑’이란 말을 이름으로 내건 교회는 거의 없었다.
‘사랑교회’는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말이 좋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귀한 하나님의 사랑보다 속되고 저질적인 사랑을 먼저 떠올리는 일이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 문득 ‘사랑의교회’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소유격 ‘의’를 넣어서 불러본 이름이 어감이 좋게 느껴졌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는 말씀을 통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갖고 600여명의 교인들에게 이 이름을 내놓고 의견을 물었다. 놀랍게도 단 한 사람도 반대 없이 찬성이 나왔다. 이렇게 해서 강남은평교회는 사랑의교회로 다시 태어났다.
사랑의교회 되어가기 초창기 사랑의교회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사랑의교회 개척 이야기,”『목회와신학』, p.51-52). 첫째, 형식적인 틀을 벗어난 예배 형태였다. 창립 첫 주부터, 옥한흠 목사는 강단에서 내려와 교우들을 바라보면서 소그룹처럼 예배를 드렸다. 나아가 주일예배만큼은 약간의 형식을 유지했지만 가스펠송, 회중 찬양, 간증 같은 순서를 포함시켜 평신도들과의 접촉점을 찾았다.
둘째, 옥 목사의 메시지는 직설적이었다. 설교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원고를 완전히 준비하지 않고 메모만 갖고 설교했다. 이는 형식적인 틀을 넘어 청중들과 복음적인 접촉점을 갖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간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라” 등 원색적이고 직접적인 표현을 구사했다.
셋째, 평신도들을 깨우는 작업을 이미 초창기 설교와 예배를 통해서 진행했다. 예수 믿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소명자라고 전했다. 이는 그의 신학적 확신 때문이었다. 따라서 목회자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불어 넣었다. 이처럼 옥한흠 목사는 파격적인 예배 스타일, 접촉점을 찾는 복음전달 형식,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설교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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