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삶/영적 리더십

바울의 영성과 생애, 우리는 바울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나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10. 1. 5. 14:49

새해 우리는 바울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나

[2009.12.31 14:37]     


사도 바울의 영성이 절실한 경인년 새해가 밝았다. 세속의 중심에 서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게 하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올바른 영성을 가질 수 있을까. 바울의 영성은 십자가 중심의 성숙한 영성을 의미한다. 바울의 영성엔 떨림과 울림, 어울림이 있다. 떨림의 영성이란 십자가의 복음과 정신이 깔려 있다. 울림의 영성은 떨림의 영성과 함께 삶의 현장으로 드러난다. 바울은 거룩함과 섬김, 절제와 희생으로 표현된 영성을 보여줬다. 또한 공동체의 영성을 의미하는 어울림의 영성을 제시했다. 이 영성은 몸으로 표현된 공동체의 영성으로 덕을 세우고 질서와 화평이 넘친다. 새해를 맞는 우리는 바울에게 무엇을 배워야 하나. 김명혁 한국복음주의협의회장과 강영안 서강대(철학과) 교수, 조갑진 서울신대(신학과) 교수에게 지혜를 구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김명혁 한국복음화주의협의회 회장 “가진 것 다 버리는 용기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

참된 영성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에 미칠 정도로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르던 사람이 스스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부르짖으면서 매일 우는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

바울의 뒤를 따라 조선교회의 아버지들인 길선주 목사도, 이기풍 목사도 평생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지극히 겸손한 사람들이 되었다.

바울은 가문과 학문과 종교성 등을 자랑하던 지극히 자만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는 지극히 가난하고 지극히 약한 사람이 되었다.

약한 것들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자랑하기까지 했다(고후 12:10). 바울의 뒤를 따라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는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고백했다.

바울은 또한 소위 진리의 칼로 모두를 정죄하며 내리치던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모두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에는 당시의 니느웨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까지 가서 로마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위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바울의 뒤를 따라 한경직 목사는 가슴에 긍휼을 지니며 살다가 죽었다.

바울은 또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지극히 배타적이고 지극히 분파적인 사람이었는데 십자가 아래서 모두를 품고 모두와 화해를 이루는 화해와 화목과 연합과 평화의 사도가 되었다. 그는 편지를 쓸 때마다 “하나 되게 한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했다(엡 4:3).

바울은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의 예찬자가 되었다. 신·구약 성경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이고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어도 귀신을 쫓아내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행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했다.

바울의 뒤를 따라 장기려 박사도 사랑을 예찬하며 실천했다. 장 박사는 사랑 없는 모든 것은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과 십자가를 닮는 것보다 세상을 너무 많이 닮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문화와 유행에 너무 집착하고 있으며 세상적인 부귀와 성공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열과 양극화로 너무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예수님 닮고 십자가 닮은 사도 바울의 영성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참회와 겸손의 영성, 가난과 약함의 영성, 긍휼과 희생의 영성, 화해와 하나됨의 영성, 그리고 사랑의 영성이 그리워지고 사모되는 때다.

강영안 서강대 철학과 교수 “중도적 삶·평등·사랑 실천 시대를 초월한 3가지 교훈”

바울은 로마 제국의 힘과 영광, 그와 대조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슬픔을 보았다. 바울은 다양한 문화와 종교, 여러 나라를 체험하였고 여러 나라 언어를 구사하였다. 바울은 유대교의 열성적인 바리새파였다. 그러나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은 제국의 경험도 다문화, 다종교의 경험도, 유대교의 가르침도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다. 이러한 바울에게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나는 적어도 세 가지를 꼽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바울은 로마 제국과 자신의 민족을 보는 관점을 바꾸었다. 기꺼이 바울은 로마 제국의 시민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임도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제국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되, 제국주의와 국가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서 간구하되,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바울이 본 하나님의 나라는 제국의 힘과 영광, 민족의 수호와 투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준 어리석음, 약함과 낮아짐에서 시작한다. 낮아짐, 연약해짐, 비움, 이것들이 기독교 지성과 영성의 출발점임을 우리는 바울에게서 배운다.

다문화, 다종교, 다국가, 다언어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민족에게 언어를 주시고, 경계를 정하시고, 문화와 생활방식을 주셨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차이와 다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 주인과 노예,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다르고 구별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음을 바울은 누누이 강조한다.

한편으로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임을 알고 기뻐하고 누리는 삶이 바울 영성의 두 번째 특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교의 가르침과는 달리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지는 선물임을 바울은 강조한다. 율법의 준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백성이 된 사람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을 지키는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사랑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율법을 완성한다.

바울이 이해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섬기고 착한 일, 선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이는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 영성의 세 번째 교훈이다.

조갑진 서울신대 신학과 교수 “복음에 충성·기도의 삶 탁월한 인생 경영의 지혜”

바울 사도처럼 인생 경영을 탁월하게 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부터 로마의 지하 감옥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기까지 생을 온전히 주께 쏟아 부어 드린 인물이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맡긴 사명, 곧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목숨을 다해 충성한 인물이었다. 그는 군인정신으로 선한 싸움을 싸웠고, 마라톤 선수의 정신으로 신앙 경주장의 트랙을 완주했으며, 믿음의 투사처럼 거룩한 믿음을 사수했다. 남김 없이 드려서 사명을 완수한 이 멋진 바울에게서 인생 경영의 지혜를 배운다.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상을 받을 것을 확신한 바울처럼 오늘의 신학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 내세의 신앙이 분명해야 한다.

바울에게서의 십자가 사건은 비밀이요 자랑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부활의 빛 아래서 해석하던 그는 거기가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비밀의 자리요 은총의 자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 속에서 자기의 옛 사람을 함께 못 박아 놓으셨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사건은 날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확인해야 하기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현재 능동태 사건으로 표현했다.

사실 예수가 못 박히실 적에 바울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도 거기 못 박혔다. 못 박은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수동태이고 그리스도인 편에서도 적극 동의해 못 박았으므로, 과거에 단번에 못 박은 사건이기에 능동태다.

바울에게서의 이 십자가는 수동태를 통한 능동태로 성결의 모든 기초를 마련해 주신 은총의 자리요 비밀의 자리였다. 그래서 십자가로 자랑의 깃발을 높이 올리며 그 십자가의 은총을 자랑스럽게 전파한 것이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 삶을 경영해 나갔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바울에게서 기도는 방편이 아니고 그 삶의 핵심이었다. 로마 선교도 기도로 묻는 가운데서 성령께서 막고 계심을 알고 순종하는 것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기도가 삶의 중심에 없으며 따라서 성령님의 인도하심도 감지하지 못하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성공적인 인생 경영을 했던 바울에게서 세월을 아끼는 지혜와 더불어서 내세신앙이 분명해야 하고, 십자가의 은총을 증거하며, 기도의 사람이 돼야 함을 배워야겠다. 하나님 앞에서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메워나가면서 향기로운 제물로 살았던 바울의 인생 경영에서 한 해와 일생을 잘 사는 지혜를 배운다.
 
 
 
 
나는 왜 바울 생애를 소설에 담으려하는가

[2009.12.31 14:29]   모바일로 기사 보내기


폭군 네로 황제는 로마시를 불바다로 만들며 광란의 시를 읊다가 방화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워 살육전이 일게 만든다. 로마를 떠났던 베드로가 급히 달려와 성문 앞에 이르렀을 때 불길 속의 아비규환을 차마 보지 못하고 주님을 부른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절규의 기도였다. 그 말은 “주여, 저는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하는 뜻도 들어 있다. 주님은 응답하셨다. “로마로!”

이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가끔 그 자리에 바울이 닥쳤더라면 무슨 기도를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아마도 바울은 주님께 묻기 전에 불에 타는 형제자매들을 구하기 위해 먼저 뛰어들었을 것 같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의 심장 사도 바울은 올해로 탄생 2002년이 된다. 공적 나이로 바울은 예수보다 8세(혹은 11세) 연하이며 공생애 동안 바울은 한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 사울이 바울 되어 핍박을 받은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본 적도 없으면서 사도행세를 한다는 것과 한번 배신한 자(스데반 순교사건)는 또 배신한다며 바울의 회심을 믿지 않으려 했다는 것들이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극적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 후 62세에 순교할 때까지 31년 동안 주님을 증거하며 치열한 복음사역에 신명을 바쳤다. 그의 옥중 서신과 기타 저작을 합치면 신약 27권 중 13권을 저술했으니 전체의 절반 분량이다. 사도 바울을 떠올리면 ‘치열’이란 단어가 클로즈업된다. 바울처럼 치열한 인생을 산 성직자가 없다. 인간의 밑바닥 심연까지 내려갔다.

그런가 하면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역시 이것이 바로 ‘참신앙’이라고 할 만큼 치열하고 정직하여 깊고 깊은 심연까지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말씀을 읽노라면 우리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읽을 수 없고 나도 모르게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읽어야 하는 경외감에 사로잡힌다.

생선 가시로 자신의 피를 찍어내어 평생 성경을 필사하다가 죽은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평생 그는 낙인처럼 찍힌 2개의 십자가를 안고 살았다. 하나는 스데반의 죽음이었다. 스데반이 죽을 때 바울은 돌을 던지는 자들이 벗어놓은 옷을 지켰고 증인이 되기 위해 스데반의 피 묻은 옷을 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참 목자로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으로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신약의 절반을 저술할 만큼 자신의 진실한 믿음을 내보이려 한 게 아닐까. 모든 색이 합쳐지면 무색인 흰색이 된다. 마침내 바울은 흰색으로 승화되어 모든 것을 초월하고 가장 주님과 닮은 제자가 되고 주님의 생각을 하고 주님의 심장을 가진 성자가 되었다. 또 한 개의 십자가인 평생 가지고 산 지병(持病)도 원망하지 않고 사랑했다. 결핵이란 사람도 있고 가벼운 간질이란 이들도 있다. 화가이며 의사였던 누가가 돌보았다. 바울은 자기의 지병마저도 겸손하라, 자계(自戒)하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감사히 받아들인다.

한편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을 보면 베드로에 대한 책망 사건이 나온다. “야고보에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그걸 보고 바울은 베드로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율법주의자로 돌아간 듯한)에 화가 나 나무란 것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를 범세계적인 종교로, 범인류의 구원의 종교로 그 문을 활짝 연 사도는 바울이었고 이방인들도 할례나 율법에 관계없이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 복음을 기독교의 근본교리로 확정한 사도가 바울이었다.

내가 사도 바울의 일대기를 소설로 써보겠다는 이유도 명분도 목적도 바로 거기에 있다.

유현종 소설가

<약력>

중앙대 국문과 겸임교수. 방송위 심의위원장. 강남 임마누엘교회 장로

대표작 ‘대조영’ ‘연개소문’ ‘임꺽정’ ‘천추태후’ ‘들불’ 외 다수

 

 

 

바울이 가르쳐 준 진리의 길

[2009.12.31 14:26]   모바일로 기사 보내기


10여명의 저자가 기록한 27권의 신약성경은 모두 260장 7959절로 돼 있다. 그 중 사도 바울이 쓴 편지(사도서신)는 13권 87장 2032절이다. 전도를 통해 세워진 교회와 제자들을 향한 권면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구절마다 바울의 생생한 예수 체험과 절절한 신앙고백이 묻어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직전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앞에서 한 눈물의 고별설교다. 바울은 환대가 아닌 감옥과 핍박이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명, 즉 복음 증거를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것은 생명의 무가치성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고귀성 때문이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위대한 사도의 너무나 인간적인 고백이다. 선한 일을 해보려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 속 악한 동기 때문에 바울은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이것은 사도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됐다. 자기 자신에 대한 파산선언이지만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승리의 찬가이기도 하다(롬 8:1).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들을 심하게 꾸짖었다. 부자이면서 교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원인이기도 했다. 바울은 이들에게 가난과 겸손, 핍박으로 점철된 복음전도자, 곧 자신의 삶을 본받으라고 한다. 그릇된 길로 가는 자식을 강하게 꾸짖을 사람은 부모밖엔 없다. 바울은 그 부모의 마음으로 평생 목회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율법에 열심이었던 바울. 그랬기에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핍박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극적인 회심을 했을 때 바울은 이제 극악한 핍박자에서 위대한 사도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자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가 살고 자신은 죽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바울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4)

연합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인에겐 주(예수)도 아버지(하나님)도 한 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헐어버리셨다. 예수를 통해 누구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도록 길을 트신 것이다. 교회의 진정한 연합(통일)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교회를 넘어 모든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여기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가 기쁨과 기도, 감사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바울은 약한 자를 돕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등 그리스도인이기에 감내해야 할 숱한 삶의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빛이 있어야 어둠은 존재를 드러낸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람은 비로소 죄를 깨닫는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나서 자신을 핍박자, 훼방자, 폭력자로 인식했다. 그리고 죄인 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그런 바울을 참고 사랑하신 예수님이 품지 못할 죄인이 어디 있겠는가. 바울의 선언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사형을 앞두고 쓴 마지막 옥중서신에서 한 바울의 고백이다. 여기엔 어떤 두려움이나 회의도 찾아볼 수가 없다. 눈앞에서 천국을 보듯 그는 너무나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구원과 영광을 말하고 있다. 이 믿음의 선배의 길을 따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믿음의 길을 달려가고 있다.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