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삶/영성

김준곤 목사님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09. 10. 1. 10:15

한국교회를 위해 보내주신 위대한 전도자, 김준곤 목사

2009년 9월 29일 김준곤 목사(1924-2009)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한국교회와 아시아 기독교를 위해 주님이 특별히 불러 사용하신 빛나는 별이었다. 김준곤 목사야말로 이 땅에 한 인물이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 지도자였다. 존 우드브리지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확실히 김준곤은 디 엘 무디, 빌리 선데이, 스펄전, 로이드 존스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는 한국이 낳은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다. 그는 한국교회사적으로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너무도 크고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첫째, 1970년대 한국교회 부흥을 견인한 주인공이었다. 지난 125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를 회고할 때 한국교회에는 몇 차례의 대 부흥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은 가장 대표적인 한국교회 부흥운동이었다. 이 두 부흥은 마치 초대교회 오순절이나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2차 대각성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의 기적을 가능케 만든 영적 원동력이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이 길선주였다면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의 주역은 김준곤이었다. 김준곤은 과거 길선주가 했던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결실로 응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꿈꾸었던 것보다 더 크고 놀랍게 한국교회를 축복하셨다.

둘째,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창설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피 뭍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을 심어주었다. 현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옥한흠, 홍정길, 하용조, 이동원, 김인중이 대변하듯 이 때 그가 외친 비전과 꿈을 먹고 거룩한 대열에 합류했던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기적은 불가능했다. 어디 이들 뿐인가! 그가 이끈 EXPLO '74에 참가해 주님을 영접하고 주의 종으로, 평신도 지도자로 쓰임 받은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셋째, 초교파 선교단체와 교회를 연결시켜 초교파선교단체의 열정을 한국교회에 이식시켜 주었다. CCC의 성경교재 텐 스텝과 전도 소책자 사영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는가! 오늘날 한국교회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사영리를 통해 주님을 만난 이들이었다. 현대 한국교회 성장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제자훈련이 하나의 운동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영적 토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넷째, 한국교회의 근대선교운동을 견인한 주인공이었다. 그는 부흥의 궁극적인 목적이 선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빌 브라이트가 지적한 대로 그는 한국교회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와 금식을 몸소 실천하며 젊은이들의 가슴에 선교의 불을 질렀다. 이들 젊은이들은 불타는 가슴을 안고 오대양 육대주로 달려갔다.

다섯째, 근대 한국의 복음주의운동의 저변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복음주의운동은 1970년대 대중전도운동, 초교파선교단체, 복음주의출판사, 그리고 몇몇 의식 있는 복음주의교회의 태동과 깊은 연계성을 지니며 발전했다. 이 일련의 흐름 속에 김준곤은 언제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미국 빌 브라이트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한국의 초교파선교단체, 대중전도운동이 건강한 신학의 토대 위에 구축할 수 있도록 도전을 주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연합운동에 마음을 열도록 도전을 주었고 진보주의자들에게 성경의 진리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어디 그가 남긴 족적을 위에서 언급한 몇몇 공헌들에만 국한시키겠는가! 먼 훗날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보다 더 클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그가 남긴 유산들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통일의 그날을 앞당기고 그가 미처 다 하지 못한 아시아와 세계선교의 사명을 더욱 충실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오 주여! 한국교회를 축복하시고 영광을 받으소서!



2009년 9월 29일

 

 

 

 

김준곤 한국대학생선교회 총재 85년 삶과 신앙

[2009.09.29 21:59]     


민족을 가슴에 품은 ‘영원한 청년’

29일 85세의 일기로 별세한 한국대학생선교회(한국CCC) 총재 김준곤 목사는 일평생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많은 눈물의 씨앗을 뿌렸다.

1950년 10월 사랑하는 아내와 딸, 부친이 북한 공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에도 그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기보다 혼란한 나라의 모습에 애통해 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특히 62년 2월 서울 삼각산의 민족기도원에서 영하 20도의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무릎 꿇고 기도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 민족이 단 한 번만이라도 뿌리째 복음화를 이룰 수 있도록 눈물로 간구했다.

김 목사의 제자인 두상달(기아대책 이사장) 장로는 “스승 김준곤 목사님은 민족을 위해, 세계 선교를 위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귀하고 큰일을 해내신 분”이라며 “최근 의식이 혼미한 중에도 목사님을 만났을 때마다 손을 꼭 붙잡고 나라와 민족을 염려하셨다”고 안타까워했다.

또한 고인의 삶에 있어 청년·대학생 사역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문준경 전도사로부터 순교자의 신앙을 물려받은 김 목사는 48년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57년 미국 풀러신학교 유학 중 국제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인 빌 브라이트 박사를 만난 고인은 이듬해 11월 한국CCC를 창설했다. 그때 직접 제자 양육에 나설 것을 다짐한 김 목사는 고려대 서울대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개인 전도 사역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하용조(온누리교회) 홍정길(남서울은혜교회) 김인중(안산동산교회) 목사, 윤수길 선교사, 정정섭(기아대책 회장) 주수일(칠성섬유 회장) 박세환(예비역 육군대장) 장로 등 현재 한국교회를 이끄는 수많은 인재들을 키워냈다.

90년대 초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초대 이사장을 맡아 나눔과 헌신의 삶을 살아온 고인은 각막을 기증하며 마지막 길을 떠났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아온 김 목사. 2005년에도 민족 복음화를 위한 구체적인 전략서를 펴내면서 그는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민족 복음화와 10만명 선교사 파송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날까지 쓰임 받고 싶다”고 고백했다. 이제 고인의 뜻은 온전히 제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그들은 ‘영원한 청년’ 김 목사를 추모하며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고 있다.

한편 발인예배는 한국기독교회장으로 10월2일 오전 9시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린다. 공동장례위원장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엄신형 목사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 김삼환 목사가, 장례집행위원장은 한국CCC 이종석 목사가 각각 맡는다(02-2227-7550).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고 김준곤 목사 주요 사역들

[2009.09.29 21:52]     


국내·외 전도훈련 초석

대학생 단기선교 길 터

전국 성시화운동 점화

김준곤 목사는 평생을 대학생 선교와 민족 복음화를 위해 헌신해왔다. 그가 일궈온 복음 사역들을 정리해 봤다.

국회조찬기도회의 시작(1965년 2월 27일)

1964년 미국 국제기독교지도자협의회 로빈슨 총무와 하버슨 국제 CCC 이사로부터 한국에서도 국회조찬기도회를 시작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이듬해 2월 당시 김영삼 민중당 원내총무, 김종필 공화당 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등 20명의 크리스천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조찬기도회의 취지를 설명했다. 당시 이들의 만남은 한국의 여야 국회의원들이 복음 안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 최초의 모임이었습니다. 이는 이듬해 3월8일 제1회 국가조찬기도회 개최로까지 이어졌다.

엑스플로’74대회(1974년 8월 13~18일)

당시 300만명으로 추산되는 크리스천들이 서울 여의도광장에 모여 기도했다. 5박6일 동안 철야기도를 하고, 낮에는 전도 훈련을 받았다. 당시 숙박시설이 부족해 서울 시내 5000개의 학교 교실에서 참석자들이 잠을 잤다. 이 대회는 한국교회 성장의 기폭제였다. 교회들을 무작위로 정해 주보에 실린 성도 등록 현황을 분석한 결과,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33%가 성장했다.

한·일 목회자 전도 훈련(1985년 5월 20~24일)

60년대 초부터 일본 선교에 관심을 갖고 국제 CCC 설립자 빌 브라이트 박사와 함께 일본의 주요 대학을 순회하며 강연을 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목회자 300명씩을 초청해 서울 부암동 CCC 본부에서 전도 훈련을 실시했다. 또 개인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자매결연을 맺어 한·일 협력 선교의 계기를 마련했다.

뉴 라이프 마닐라 2000(1990년 7월 6일~8월 13일)

필리핀 마닐라에 3000여명의 대학생 단기 선교팀을 파송했다. 이는 한국교회 최초의 단기 선교이자, 공식적으로 대학생과 평신도 단기 선교사의 시대를 열었다. 한국 CCC는 매년 10여개국에 대학생들이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해 단기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99한국교회 원단비상구국금식기도성회(1998년 12월 30일~99년 1월 2일)

외환위기 이후 나라가 어려워지자 전국 331개 대학에서 한국 CCC 회원 1만2000여명이 서울 여의도 에어돔(중소기업전시관)에 모여 민족의 위기 극복과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이 성회에서 대학생 등이 헌금한 1억원을 불우 이웃을 섬기는 10개 단체에 기탁했다.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2000년 7월 6일)

전국 350여 대학에서 1만여명의 대학생들이 굶주림에 처한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한 젖염소보내기운동을 결의하고 1만342마리(32억원)를 작정했다. 이후 매년 젖염소를 보내고 있으며 2005년 4월까지 21억원이 모금되어 2000여 마리의 젖염소와 착유 설비 등을 북한에 보냈다. 2006년 5월 황해북도 봉산군 은정리에 ‘CCC은정젖염소목장’을 짓기도 했다.

성시화운동 세계총재로 사역(2005년 6월부터 지금까지)

2005년 6월 성시화 운동 총재를 맡아 지금껏 ‘전 교회가 전 복음을 전 시민에게 전하자’는 ‘3전전략’ 운동을 펼쳐왔다. 특히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들을 살리는 일에 큰 관심을 갖고 성시화 운동을 전개했다. 교회가 가진 인적 자원과 재정 자원으로 미자립 교회와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것이다. “교회는 물탱크가 아닌 파이프라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내내 강조했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선한 싸움을 마치시고
떠나신
김준곤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