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청년 이현세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 명작, 고전을 완역본으로 읽고 싶어요.

저한테는 서재란 보시다시피 요람 같은 거죠. 보물섬 같기도 하구요. 만화책이라든지.. 워낙 그림책도 많으니까. 작업을 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쉬고 자고 또 에너지를 충전하고 생각하고, 정리하는 공간이니까 집보다 여기에서, 어떤 면으로는 더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이 서재의 제일 큰 특징은, 역시 만화책이 절반 이상 메우고 있다는 거죠. 여기 꽂혀있는 책들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조금 차이점이 있다고나 할까요. 아무래도 직업과 관련된, 작업을 하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 정보를 얻기 위해, 영감을 얻기 위해서 책을 구입한 경우가 많아요. 그런 책들을 밑줄을 긋다시피… 책을 넘기면, 아 이거는 남벌이야, 이거는 외인구단이야, 어 이거는 지옥의 링인데 하는…식으로 전달되어 오니까..훨씬 이 서재 자체에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죠. 제가 되돌아보면서 만화를 그리면서 살아온, 많은 이야기들이 책 하나하나에 스며있겠죠.
어릴 때, 포항 시골에 살 때는 책이라는 걸 구경을 못했었고요. 6살인가에 경주로 나와 가지고 처음 책이라는 것을 길거리에서 본거죠. 그 때 처음 본 책이 바로 그림책, 그러니까 만화책이었어요. 그 당시 많았던 것이 역사만화, 과학만화였어요. 김유신, 모세, 십계, 알렉산더 이런 것들 다 만화책으로 알았고, 마이크로, 미사일.. 이런 것들까지 다 만화로 알기 작해서 결국 책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소설 중에는 김내성 선생의 소설을 제일 먼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커스 소녀> <붉은 별>이라든지.. 지금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이외수 작가와 김훈 작가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분들의 색깔 있는 스타일을 좋아해요. 학생들한테도 이 두 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이분들처럼 ‘나는 어떤 작가인가’ 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것, ‘내 문장이란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30대 때는 이외수 선생의 글에서 영향을 좀 많이 받았다고 봐야겠죠. 시적이면서,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설명이 되는 그런 문장을 구사해보려고 노력도 많이 했고, 동경도 했고요. 요즘은 김훈 선생 특유의 단문을 좋아합니다.
(연재중인) <창천수호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런 단문같은 호흡을 연구해 보려고요.
평생 이렇게,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겠죠.
만화가로 산다는 것은 책을 한 권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거에요. 신문연재나 웹툰 연재를 하는 건 전쟁이잖아요. 필요한 정보를 위한 책이 아니면 거의 책을 못 읽어요. 그래서 제가 만약 20대의 청년 이현세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 명작, 고전을 완역본으로 읽고 싶어요.
대부분 우리가 고전을 어릴 때 떼버리잖아요. 다이제스트해서 보는 건데, 이런 작가가 있고, 이런 이야기였다라고 정보로서 받아들이는 건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 작품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면, <아라비안 나이트>있죠? 다들 어릴 때 ‘신밧드’로 보면 끝이잖아요. 하지만 어릴 때 읽었던 이야기하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에요.제가 보기엔 유명한 작품일수록 다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고전일수록 볼 때마다 계속 다른 메시지를 줍니다.
그림형제나 안데르센 동화도 지금 다시 읽으면, 동화 속에서도 다른 걸 찾아낼 수 있죠. 그 당시 중세의 제도적 모순이랄지, 왜 이렇게 씌여졌을지, 자신의 머리로서 분석해보면 아마 상당수의 분들이 중세 유럽의 민담을 접근해 봐야겠다, 싶을 수 있을 거에요. 새로운 세계가 또 그렇게 열리는 거죠.
그래서 창작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일수록 젊었을 때 고전을 더 많이 읽어놔야 해요.
자기가 자기를 알아가는 작업이 곧 삶인 것 같아요. 잘 알고, 그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작가라면 외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60대가 되면 명퇴 이후 외로움, 중년의 갈등을 그리는 것이 절실하고 정확하겠죠. 요즘 고민인데, 70대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70에는 동화를 그리는 할아버지라면 멋있지 않을까요. 그때 되면 수염을 길러도 멋있을 것 같아요. 여전히 욕심히 많죠. 죽을 때까지 작가 생활을 한다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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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튼 동물기
- 어릴 때 나를 성장시킨 책은, 자연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책이었어요. 그 중에서도 <시튼 동물기>의 경우, 나에게 처음으로 동물들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식물과 자연도 행동한다는 걸 알려줬어요. 책에서 사냥꾼들이 ‘나는 얼음이 봄이 되면 왜 내고 우는지 안다. 바람이 대지 위를 쓸고 지나가면, 왜 풀들이 일어 나는지를 안다’ 라고 말해요. 이렇게 식물들도 생각을 하고 식물한테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 시튼 동물기였어요. 동물하고 사람이, 집에서 키우는 토끼하고 내가, 이 세상을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 하게 전달해준 책이었어요. 이 책은 그러니까, 나를 방에 앉아있기 보다는 들로 강으로 뛰어다니기를 더 좋아하는 소년으로 만들어준 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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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점
- 처음에 창작활동을 할 때, 어떤 캐릭터를 잡아야 매력이 있는지 몰랐었어요. 그 때 자기 자신을 가지고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가장 매력이 있다 라고 알려준 소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입니다. 내 자전적인 이야기와 비슷해요. 이 소설은 양자를 데려다 키운 집안의 이야기인데요. 저도 어릴 때 큰집으로 양자를 갔거든요. 빙점의 주인공이 어느 날, 나이 들어서 자신이 양녀로 들어간 것을 알고 갈등하는 이야기인데요. 저도 양자로 들어온 걸 스무살 때 알았습니다. 뜬금없이 멋있는 주인공을 찾아 다니던 그 때, <빙점>을 읽고, ‘이건 내 이야긴데?’ 싶었습니다. 결국 이야기란, 자기가 공감하는 데서 만들어야 재미있어지는 것이고, 매력 있는 캐릭터란 자기가 잘 아는 인물을, 디테일하게 풀어내야 나오는구나 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 <빙점>이라는 소설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 수없이 접했던 책 중에서, 이현세의 까치라는 캐릭터가 만들어 지는데 큰 영향을 준 것이 바로,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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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과 얼음
- 나는 자유로운 의지로 살고 싶다’. 라는 말을 뜻도 잘 모르면서 중학교 때 책상 앞에 붙여놓았던 기억이 나요. 내 맘대로 살겠다는 이 정도로 생각했었겠죠. 그때는 프로스트의 ‘두 갈래 길’(The Road Not Taken) 이런 시를 열심히 외우고 다녔어요. 청년기에는 ‘그야말로 모험, 이 전세계를 다 한번 가고 싶다.’ 와 같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한편, 자기 내면을 잘 표현하고 싶은데 잘 안되는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어요. 프로스트의 시는, 그 시기의 내 고민과 갈등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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