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삶/한국 읽기
캄보디아 18세 신부, 한국인 남편 폭력에 시달리다 살인죄로 교도소에 수감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09. 3. 26. 15:14
사회]‘철창’에 갇힌 18세 신부 코리안 드림
위클리경향 | 입력 2009.03.26 14:04 | 수정 2009.03.26 14:18
캄보디아 여인, 한국인 남편 폭력에 시달리다 살인죄로 교도소에 수감
"한국으로 시집온 것을 후회합니다. 캄보디아로 돌아가고 싶어요."
캄보디아 출신 결혼 이주 여성 츠호은릉엥(18)씨는 후회와 좌절, 참담함에 몸을 떨었다. 국제결혼정보업체의 소개로 지난해 4월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 땅에 정착했지만 1년이 채 안 돼 남편을 살인한 죄로 대구교도소에 갇힌 채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고등학생에 해당하는 어린 나이. 그러나 앳된 그의 얼굴에는 시름과 불안감만 가득하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올 1월 31일 새벽. 츠호은릉엥씨는 술에 취해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우발적으로 칼로 찔러 상해를 입혔고, 남편은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월 3일 잠시 의식을 회복했다가 이튿날 숨지고 말았다. 곧 태어날 아기(츠호은릉엥씨는 임신 4개월이다)와 함께 한국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츠호은릉엥씨의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살인죄로 기소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의 츠호은릉엥씨에게는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던 것일까. 'Weekly경향'은 교도소에 있는 츠호은릉엥씨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의 글을 받았다. 다음은 츠호은릉엥씨와 인터뷰 내용과, 그가 경찰서에서 쓴 진술서, 그리고 주변인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츠호은릉엥씨의 열여덟 삶에 대한 이야기다.
"남편이 술 마시면 맞을까 두려웠다"
1990년 5월생인 츠호은릉엥씨는 캄보디아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츠호은릉엥씨가 11살 되던 해 농사꾼이던 아버지는 바람이 나 가출했다. 이후 츠호은릉엥씨를 포함한 다섯 남매의 생계는 어머니가 짊어졌다. 일당을 받고 다른 집의 농사일을 거들고 라면 등 생필품을 소량으로 팔아 겨우 살아갔다. 형편이 어려워 츠호은릉엥씨도 15살 때부터 일용직 노동자(농사)로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가난으로 학업도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포기해야 했다. 당시 소녀의 꿈은 오직 하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그가 한국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 것도 한국인과 결혼하면 끼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결혼정보업체의 말도 그랬고, 실제 츠호은릉엥씨의 친구 중 한 사람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 잘살고 있었던 것이다.
10여 명의 남자와 맞선을 본 끝에 만난 남편의 첫인상은 선량해 보였다. 또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해(남편은 지체장애 4급이다) 아버지처럼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가족을 등질 것 같지 않았다. 비록 나이가 스무 살이나 위였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 후 남편은 1주일에 3~4일씩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주정이 심했다. 폭력을 휘둘렀고 '바보'라고 부르며 무릎을 꿇게 한 채 새벽까지 잠을 재우지 않았다. 츠호은릉엥씨는 "남편이 술을 마시면 또 맞을까봐 무서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츠호은릉엥씨는 자신이 더 노력하면 남편도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 듯하다. 다행히 시댁 어른은 그에게 잘해줬다. 한국어도 열심히 익혔다. 덕분에 그는 한국에 온 지 1년이 채 안 됐지만 한국말로 의사소통하는 데 거의 문제가 없었다. 힘들어도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의 술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내와 대화도 많지 않았다.
폭행당하다 엉겹결에 칼로 찔러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날도 남편은 만취해 있었다. 남편은 츠호은릉엥씨를 동반해 친구들과 술자리를 했다. 남편이 담배를 피우자 츠호은릉엥씨는 태아에게 담배 연기가 좋지 않으니 피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남편은 손을 들어 때릴 듯이 츠호은릉엥씨를 위협했다. 남편 친구들이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자 화가 난 남편은 말리던 친구와 싸움을 벌였다. 술집에서 나온 츠호은릉엥씨 부부는 다시 남편 친구 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남편은 계속 술을 마셨다. 집주인인 친구가 다른 친구의 연락을 받고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가자 남편은 화를 냈다. 속이 상한 츠호은릉엥씨가 남편 친구의 집 방 한구석에서 울고 있자, 남편은 츠호은릉엥씨가 운다고 손찌검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욕을 하면서 츠호은릉엥씨의 얼굴과 머리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또 술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츠호은릉엥씨는 아파트 경비실에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밤이 늦었으니 참고 자라"며 전화를 끊었다.
남편은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시어머니에게 고자질을 했다며 츠호은릉엥씨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겁이 난 츠호은릉엥씨는 더 이상 때리지 말라는 의미로 부엌으로 가서 칼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격분한 남편은 츠호은릉엥씨에게 더욱 다가왔고 츠호은릉엥씨는 엉겹결에 칼로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다. 당황한 츠호은릉엥씨는 혼비백산한 상태로 택시를 타고 남편 친구의 집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원으로 옮겨진 남편은 닷새 만에 숨을 거두었다. 공포심에 저지른 한순간의 우발적 행위로 츠호은릉엥씨는 남편을 살해했다는 평생 씻을 수 없는 낙인을 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츠호은릉엥씨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교사나 그와 함께 공부를 한 친구들은 츠호은릉엥씨가 매우 성실했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으며 남편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오히려 남편이 조금이라도 잘 대해준 게 있으면 그것을 자랑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다만 절친한 캄보디아 친구에게만 가끔 "남편이 나를 때린다. 술을 너무 자주 마신다. 그럴 때마다 너무 무서운 사람이 된다"고 토로했다는 것이다.
츠호은릉엥씨에 대해 70여 개 시민단체가 구명운동에 나서고 있다. 남편에게 허구한 날 맞고 살아온 츠호은릉엥씨는 가해자인 동시에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이유에서다.
70여 개 시민단체서 구명운동 나서
한국에는 현재 15만 명에 달하는 결혼 이주 여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2005년 보건복지부 통계와 2007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20% 내외). 물리적 폭력과 심리적 위협, 언어폭력, 알코올중독에 의한 괴롭힘, 내쫓김, 방임 등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 6월 충남 천안 지하 전셋방에서 술 취한 남편에 의해 갈비뼈 18개가 부러진 상태로 죽임을 당한 베트남 신부 후안마이(19)씨나 같은 해 3월 남편이 문을 잠근 아파트에서 탈출하다 베란다에서 떨어져 사망한 또 다른 베트남 신부 레티김동(22)씨, 그리고 지난해 1월 결혼 한 달 만에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된 베트남 신부 쩐타이란(22)씨 등은 모두 가정폭력의 희생자였다.
츠호은릉엥씨는 외국인 신부를 맞은 한국 남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외국인 신부들은 고향도 멀고 아는 사람도 없고 어디 갈 곳도 없으니 남편들이 많이 예뻐해주고 행복하게 잘 대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시집온 것을 후회합니다. 캄보디아로 돌아가고 싶어요."
캄보디아 출신 결혼 이주 여성 츠호은릉엥(18)씨는 후회와 좌절, 참담함에 몸을 떨었다. 국제결혼정보업체의 소개로 지난해 4월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 땅에 정착했지만 1년이 채 안 돼 남편을 살인한 죄로 대구교도소에 갇힌 채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고등학생에 해당하는 어린 나이. 그러나 앳된 그의 얼굴에는 시름과 불안감만 가득하다.
살인죄로 기소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열여덟 꽃다운 나이의 츠호은릉엥씨에게는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던 것일까. 'Weekly경향'은 교도소에 있는 츠호은릉엥씨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그의 글을 받았다. 다음은 츠호은릉엥씨와 인터뷰 내용과, 그가 경찰서에서 쓴 진술서, 그리고 주변인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츠호은릉엥씨의 열여덟 삶에 대한 이야기다.
"남편이 술 마시면 맞을까 두려웠다"
1990년 5월생인 츠호은릉엥씨는 캄보디아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다. 츠호은릉엥씨가 11살 되던 해 농사꾼이던 아버지는 바람이 나 가출했다. 이후 츠호은릉엥씨를 포함한 다섯 남매의 생계는 어머니가 짊어졌다. 일당을 받고 다른 집의 농사일을 거들고 라면 등 생필품을 소량으로 팔아 겨우 살아갔다. 형편이 어려워 츠호은릉엥씨도 15살 때부터 일용직 노동자(농사)로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가난으로 학업도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 포기해야 했다. 당시 소녀의 꿈은 오직 하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그가 한국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 것도 한국인과 결혼하면 끼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결혼정보업체의 말도 그랬고, 실제 츠호은릉엥씨의 친구 중 한 사람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 잘살고 있었던 것이다.
10여 명의 남자와 맞선을 본 끝에 만난 남편의 첫인상은 선량해 보였다. 또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해(남편은 지체장애 4급이다) 아버지처럼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가족을 등질 것 같지 않았다. 비록 나이가 스무 살이나 위였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 후 남편은 1주일에 3~4일씩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주정이 심했다. 폭력을 휘둘렀고 '바보'라고 부르며 무릎을 꿇게 한 채 새벽까지 잠을 재우지 않았다. 츠호은릉엥씨는 "남편이 술을 마시면 또 맞을까봐 무서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츠호은릉엥씨는 자신이 더 노력하면 남편도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 듯하다. 다행히 시댁 어른은 그에게 잘해줬다. 한국어도 열심히 익혔다. 덕분에 그는 한국에 온 지 1년이 채 안 됐지만 한국말로 의사소통하는 데 거의 문제가 없었다. 힘들어도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의 술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아내와 대화도 많지 않았다.
폭행당하다 엉겹결에 칼로 찔러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날도 남편은 만취해 있었다. 남편은 츠호은릉엥씨를 동반해 친구들과 술자리를 했다. 남편이 담배를 피우자 츠호은릉엥씨는 태아에게 담배 연기가 좋지 않으니 피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남편은 손을 들어 때릴 듯이 츠호은릉엥씨를 위협했다. 남편 친구들이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자 화가 난 남편은 말리던 친구와 싸움을 벌였다. 술집에서 나온 츠호은릉엥씨 부부는 다시 남편 친구 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남편은 계속 술을 마셨다. 집주인인 친구가 다른 친구의 연락을 받고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나가자 남편은 화를 냈다. 속이 상한 츠호은릉엥씨가 남편 친구의 집 방 한구석에서 울고 있자, 남편은 츠호은릉엥씨가 운다고 손찌검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욕을 하면서 츠호은릉엥씨의 얼굴과 머리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은 또 술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츠호은릉엥씨는 아파트 경비실에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밤이 늦었으니 참고 자라"며 전화를 끊었다.
남편은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시어머니에게 고자질을 했다며 츠호은릉엥씨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겁이 난 츠호은릉엥씨는 더 이상 때리지 말라는 의미로 부엌으로 가서 칼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격분한 남편은 츠호은릉엥씨에게 더욱 다가왔고 츠호은릉엥씨는 엉겹결에 칼로 남편의 옆구리를 찔렀다. 당황한 츠호은릉엥씨는 혼비백산한 상태로 택시를 타고 남편 친구의 집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병원으로 옮겨진 남편은 닷새 만에 숨을 거두었다. 공포심에 저지른 한순간의 우발적 행위로 츠호은릉엥씨는 남편을 살해했다는 평생 씻을 수 없는 낙인을 안고 살아가게 된 것이다. 츠호은릉엥씨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교사나 그와 함께 공부를 한 친구들은 츠호은릉엥씨가 매우 성실했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으며 남편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오히려 남편이 조금이라도 잘 대해준 게 있으면 그것을 자랑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다만 절친한 캄보디아 친구에게만 가끔 "남편이 나를 때린다. 술을 너무 자주 마신다. 그럴 때마다 너무 무서운 사람이 된다"고 토로했다는 것이다.
츠호은릉엥씨에 대해 70여 개 시민단체가 구명운동에 나서고 있다. 남편에게 허구한 날 맞고 살아온 츠호은릉엥씨는 가해자인 동시에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이유에서다.
70여 개 시민단체서 구명운동 나서
한국에는 현재 15만 명에 달하는 결혼 이주 여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2005년 보건복지부 통계와 2007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20% 내외). 물리적 폭력과 심리적 위협, 언어폭력, 알코올중독에 의한 괴롭힘, 내쫓김, 방임 등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 6월 충남 천안 지하 전셋방에서 술 취한 남편에 의해 갈비뼈 18개가 부러진 상태로 죽임을 당한 베트남 신부 후안마이(19)씨나 같은 해 3월 남편이 문을 잠근 아파트에서 탈출하다 베란다에서 떨어져 사망한 또 다른 베트남 신부 레티김동(22)씨, 그리고 지난해 1월 결혼 한 달 만에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된 베트남 신부 쩐타이란(22)씨 등은 모두 가정폭력의 희생자였다.
츠호은릉엥씨는 외국인 신부를 맞은 한국 남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외국인 신부들은 고향도 멀고 아는 사람도 없고 어디 갈 곳도 없으니 남편들이 많이 예뻐해주고 행복하게 잘 대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츠호은릉엥씨 변호인 박준혁 변호사 "고의성이 없는 사고였고 정당방위다" 이 사건의 변론을 맡게 된 경위는. "이주여성센터에서 민변 측에 도움을 요청했다. 내부적으로 논의를 거쳐 나와 박경로 변호사 두 사람이 이 사건을 맡기로 했다." 츠호은릉엥씨와 뱃속 아기의 현재 상태는 어떤가. "2월에 처음 접견할 때는 임산부여서 그런지 잠이 자주 쏟아지고 춥다고 호소했다. 다행히 교도소 측이 배려해 지금은 난방이 잘 되는 환경에서 잠도 충분히 자고 있다. 의사에게 정기적으로 검진받는데 아기는 건강하다. 처음에 츠호은릉엥씨는 아이를 낳아 직접 키우겠다는 의지가 강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심적으로 많이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가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자신이 과연 아기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 같다." 캄보디아 정부와 가족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알고 있다. 주한캄보디아대사관에서는 대사관이 공식적으로 개입하기는 곤란하지만 잘 해결되면 좋겠다는 입장을 전달해왔다. 츠호은릉엥씨는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가족은 하루 벌어 하루 간신히 먹고사는 형편이기 때문에 한국에 오고 가는 경비나 체류비를 감당할 상황이 못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어떤 판결을 기대하나. "무죄 판결을 원한다. 검찰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고의성이 전혀 없는 사고였고 정당방위다." 이번 사건을 보며 느낀 점은. "국제결혼이 당사자 사이의 신뢰관계나 열린 정보 자체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 신부가 단순한 상상만 가진 채 오고 있다. 츠호은릉엥씨 역시 남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단지 한국은 캄보디아보다 잘사는 나라니까 한국에 오면 행복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이런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엄청나다. 하지만 그 괴리감을 좁혀줄 수 있는 단체나 기관도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외국인 신부들은 당장 좌절을 느끼게 되는데 돌파구가 없는 상태에서 남편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많은 신부가 그것을 고스란히 감내한다. 만성화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계기가 생기면 이번 사건과 같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
<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
죽은 사람을 비난하거나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똑바로 살아야 한다.
한국, 한국인
그 이름이 아깝다.
가난하고 연약하다고 함부로 사람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은 아니다.
이 사회에 팽배한 양육강식의 모습과
힘있는 자 앞에서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 강한 어둠은 걷혀야 할 것이다.
안타까운 사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