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삶/북한 한민족

北김정일 부인 성혜림의 친구 김영순의 탈북스토리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09. 3. 25. 16:43

  레이디경향 2009년 3월호
北김정일 부인 성혜림의 친구 김영순의 탈북스토리
“성혜림의 친구란 이유로 요덕수용소에서 10년 동안
짐승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북한에서 상위 1%의 초호화 엘리트 생활을 하던 김영순씨. 그녀는 북한을 탈출해, 지난 2003년 11월 25일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엘리트로 살다가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는 요덕수용소에서 10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자유를 얻기 위해 과감히 탈출을 감행한 그가 눈물로 쏟아낸 탈북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한다.


부모는 영양실조로 사망, 아들은 총살당해
김영순씨(73)가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의 땅을 밟은 지 만 5년 3개월이 지났다. 북한에서 상위 1%의 엘리트 계층으로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던 김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온 이유는 바로 ‘자유’를 얻고 싶어서였다.

김영순씨의 친오빠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때문에 김씨 일가족은 상위 1% 계층으로 북한 당국의 보호와 김일성의 배려 등 많은 혜택을 누리면서 살았다. 김씨는 일반 북한 사람은 엄두도 못 내는 밍크코트를 서른 살부터 입기 시작했고, 하루에 2번 이상 옷을 갈아입을 만큼 멋쟁이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게 평탄한 삶을 살던 어느 날, 김씨는 가족들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반동’이라는 죄명을 쓰고 인권유린의 온상이라 불리던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다. 1970년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보위부 312호 예심과(김일성 가계와 관련된 정치범 수사과)로 끌려갔다가, 이유도 모르고 수용소로 갔죠. 연좌제 때문에 부모님과 아이들 4명이 함께 갔어요. 북한에서 정치범은 재판도 없이 바로 수용소로 갑니다. 끌려가는 동안은 마치 환각제를 먹은 사람처럼 멍멍했어요. 흑 같은 새벽, 수용소에 우릴 내려주면서 ‘빨리 빨리 내리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죠. 일을 잘하면 나가고 일을 못하면 영원히 있어야 한다고 했죠. 맨땅 위에 지은 초가집에서 멀건 소금국과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해결해 짐승 같은 생활을 무려 10년이나 했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눈물이 나요.”

요덕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죽도록 일하고 받은 대가는 통강냉이 200g이 전부. 그곳에서는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들쥐를 잡아먹었으나, 나중에는 쥐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 탈출을 시도하다가 총살당하는 사람, 동상 등의 병으로 죽는 사람까지 수용소에서 매일 수십 명씩 죽어나갔다.

김씨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극심한 영양실조로 모두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특히 삶의 희망이었던 큰아들마저 요덕수용소에서 사고로 죽었다. 남편은 그녀가 요덕수용소로 붙잡혀 가기 한 달 전에 실종됐는데, 나중에서야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막내아들도 훗날 탈북을 하려다가 총살을 당했다.

“시체를 너무 많이 봐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큰아들이 죽고, 아버지 어머니를 하늘로 보내고 정말 북한 당국을 용서할 수 없어서 치를 떨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남한 사람들이 조그마한 것에도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거 보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아요.”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1979년 어느 날, 김씨는 요덕수용소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신이 왜 10년 동안 요덕수용소에 갇혀 있었는지를 알게 됐다. 바로 김정일의 부인, 성혜림과의 친분 때문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보위부 직원이 찾아와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이 말을 어디서 들었다고 하거나 유포할 때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간 것이다. 김씨는 이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왜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성혜림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동기동창이며 친구였어요. 성혜림의 남편은 월북작가 이기영의 맏아들 이평이었죠. 영화배우였던 혜림이는 마음씨가 착하고 키도 크고 늘씬했어요. 웃으면 보조개가 쏙 들어가서 예쁘고, 눈웃음이 귀여웠죠.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 ‘나 5호댁(김정일 가계, 김일성은 1호댁이라 불린다)에 시집간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거기 들어가면 이제 못 보겠구나’라며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고, 그게 혜림이를 본 마지막이었어요.”

당시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에게 유부녀였던 성혜림과의 관계를 숨기고, 동거를 시작했다. 때문에 아버지에게 이런 사실이 드러나길 원치 않았던 김정일은 성혜림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사회에서 격리시키거나 제거했다. 김씨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시점은 성혜림 이후, 고영희가 김정일의 부인이 된 시점과 비슷했다.
수용소에서 나온 후 김씨는 요덕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며,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살았다. 급기야 나중에는 문소리만 들려도 놀라고, 공포에 질려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심장 신경증’에 걸렸다. 결국 당국의 감시에 괴로워하다가, 탈북을 결심했다.

1990년이 되면서 북한은 뇌물 문화가 팽배해졌고, 뇌물만 주면 국경도 넘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김씨 역시 뇌물을 이용해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2002년 중국으로 탈북한 김씨는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2003년 11월 25일 대한민국 땅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불바다처럼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가득한 걸 보고 정말 대한민국은 축복받은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십자가가 굉장히 많아서 그랬을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라고 생각했죠. 애국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개무량했죠.”


자유민주주의의 행복을 말하고 싶었다
북한에서도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김씨는 남한에서의 삶에 곧바로 적응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사 먹을 수 있고, 하루 종일 불려 다니면서 북한 당국이 만들어놓은 시스템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됐다.

“정말 황홀한 거예요. 자유가 있잖아요. 누군가의 감시를 받지 않는다는 게 말이죠. TV도 마음대로 볼 수 있고요. 게다가 이곳은 기회가 있는 나라잖아요. 자유와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곳이라는 게 얼마나 좋아요. 북한 사람들은 다음날 자기 스케줄을 모르고 살아요. 하지만 여기는 하루 24시간이 전부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잖아요.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요. 정말 행복한 곳이죠. 북한은 지옥이고, 여기는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김씨는 어떻게 보면, 요덕에 갔다 왔기 때문에 인생의 참맛을 느낄 줄 알게 됐다고 말한다.

북한 당국이 정해주는 대로 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비전과 꿈을 갖고 삶을 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지난 5년은 북한에서 살았던 68년 인생과 바꿔도 전혀 아깝지 않아요. 만약 제가 요덕에 가지 않았으면, 평양이 좋은 줄 알고 그 곳에서 열심히 살았겠죠.”

북한종합예술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한국 춤의 대가인 최승희에게서 춤을 사사했다. 2006년 그 능력을 살려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안무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 일본, 스위스, 영국, 벨기에 등 세계를 돌아다니며 인권 활동을 했다. 세계를 돌아다닐수록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60년 동안 북한 사람들을 기근과 가난으로 허덕이게 만들고, 열등 민족으로 만든 북한 당국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죠. 먹이지도 않고, 입히지도 않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을 우상숭배하게 만들죠.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 세상을 볼 수 없게 TV와 컴퓨터가 차단되고, 극도로 폐쇄된 삶을 살고 있죠. 북한 사람들은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도 모르죠. 그러니까 그 체제에서 행복한 줄 알고 사는 거죠. 거기서 70평생을 살았다는 게, 그리고 한창 젊은 시절을 요덕수용소에서 보냈다는 게 너무 속상해서 잠도 못 잘 정도예요.”

북한에서는 지금까지 굶어 죽은 사람의 숫자만 3백만 명이 넘고, 요즘에도 배고픔을 못 이겨 탈북을 시도하고 있다. 북한 군인들도 못 먹고 살기는 마찬가지. 서로의 안부 인사가 ‘강영실 안 걸렸나’다. 강영실이란, 강한 영양실조의 약자다. 북한 국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다.

하지만 김씨는 북한은 절대 ‘통일’이나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먹이고 입히지 않아도 잘 따르는 국민이 있는데, 왜 통일을 하느냐는 것. 영원히 인민들을 다스리면서 수령 제일주의, 인간 우상숭배를 원할 것이라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전 세계가 북한을 욕하지만, 정작 북한의 모든 국민들은 세뇌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상황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분배 원칙을 주장하잖아요. 북한 사회주의 경제는 부의 창출이 없기 때문에 게으름뱅이 양성소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결국 망한 거죠. 빈부격차와 사상 대립은 인간이 생존하는 한 영원한 거예요. 평화 속에서 경제가 발전해야죠. 인간은 무한한 창조력을 지녔잖아요.”

김씨는 김정일이 최근 후계자를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3남 김정운으로 지정한 것을 두고, 아직 김정일 본인이 10년 이상은 정권을 유지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거라고 설명했다. 스물다섯 살의 김정운이 정권을 잡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정권을 잡는 사람이 아들로 바뀐다고 해도 북한의 개혁과 개방은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무희, 최승희 춤을 전수시키고 싶어
최근 김씨는 북한 요덕수용소에서의 생활을 포함한 자전 수기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를 책으로 써냈다. 김씨는 대한민국에 오는 순간부터, 자전 수기를 쓰려고 마음먹었다. 북한에서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제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차이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해주고 싶었죠.”

김씨도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살았다면 그토록 좋아한 춤을 가르치며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북한종합예술학교 무용학부 1기생으로 최승희 선생으로부터 스파르타 교육을 받은 김씨. 평소 제자 훈련이 엄격했던 최승희 선생 덕분에 김씨는 여전히 최승희의 아름다운 춤가락으로 춤을 출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저에게 작은 공간이 생긴다면, 제자들을 키워서 최승희 선생님의 춤사위를 가르치는 게 소원이에요. 최승희 선생님은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인 무희잖아요. 그분의 춤이 후세에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앞으로 80세까지는 거뜬히 춤을 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김씨는 조그마한 연습실 빌릴 돈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 월 40만원가량이었던 정부 정착금 지원은 5년이 지난 지금 끝이 났고, 현재는 생활 기초 보장금으로 근근이 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장은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그래도 북한에 비하면, 밥은 먹고 사니까 불평은 하지 않는다. 다만,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자유롭게 살았다면 다른 남한 사람들처럼 부를 축적하고 창출하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김씨는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북한 문제에 대해 좀 더 알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 “대한민국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부강해져야 북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남한에 온 탈북자들이 지금까지 1만5천 명 정도 되는데, 그들이 이곳에 정착해서 잘 살 수 있게 도와준 국민들께 감사드려요. 앞으로 탈북자들이 비전을 갖고 대한민국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씨의 또 다른 꿈은 바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가 해체되는 것이다. 과거 김씨가 겪었던 요덕에서의 처절했던 삶을 공개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북한 국민들이 자유를 갖도록 도와주고 싶은 게 생의 마지막 바람이다. 때문에 김씨는 여전히 세계 인권 단체들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내가 가진 자유를 지금도 북한에서 고통받고 있는 국민들도 함께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제가 죽는 날까지 노력하겠습니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