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삶/생각
전두환-김수환 추기경 화해, 이것이 인생이다.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09. 2. 18. 18:42
전두환-김수환 추기경 화해의 시작?
출처: 2009년 02월 18일 (수) 10:12 헤럴드생생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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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유리관 안에 잠자는 듯 누워있었다. 또 한 사람은 그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처음 만남부터 악연일지도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누워있던 사람은 고 김수환 추기경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를 찾은 전두환(78) 전 대통령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18일 오전 11시께 조문을 위해 서울 명동성당 대성전을 찾았다. 12ㆍ12를 일으키며 권좌에 오른 전 전 대통령이 ‘철권정치’를 펼 때마다 김 추기경은 ‘쓴소리’를 하며 정권에 맞섰다.
▶전두환 전 대통령 “애석하다”=전두환 전 대통령은 검은색 중절모를 쓰고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수행원 10여명과 함께 성당에 도착했다.
방명록에 ‘제12대 대통령 전두환’이라고 짧게 쓴 그는 곧바로 김 추기경의 시신이 유리관 속에 안치된 대성전으로 들어섰고 관 앞에서 눈을 감은 채 합장을 하며 애도를 표했다.
김운회 주교의 안내를 받아 관 옆으로 이동한 전 전 대통령은 김 주교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고 2분 정도의 짧은 조문을 마친 뒤 성당을 빠져나갔다.
이어 몰려든 취재진의 인터뷰에 응한 전 전 대통령은 “김 추기경과 인연이 많지 않느냐”는 질문에 살짝 웃으며 “인연이 깊다”고 대답했다.
전 전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다.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내가 1사단장으로 있을 때 지학순 주교님과 함께 오셔서 사단 내에 성당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해 들어준 적이 있다. 보안사령관을 할 때도 개인적으로 초청해 저녁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초청한 자리에서 김 추기경을 또 만났는데, 교황이 폴란드 사람이고 축구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도 육군 축구선수 출신이라 다정하게 얘기를 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사람이 때가 되면 가는 것이지만 어려울 때 도와주시고 조언을 해주고 가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다”고 심정을 전하기도 했다.
▶얽히고설킨 악연=좋은 인연을 애써 강조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발언과 달리 두 사람의 관계는 악연으로 더 깊게 기억된다. 전 전 대통령은 ‘김 추기경과 악연에 대해 말해 달라’는 등의 질문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두 사람의 ‘악연’은 12ㆍ12로부터 시작됐다. 김 추기경은 쿠데타 성공 뒤 인사차 찾아온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육군 소장)에게 “마치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다”며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지 않느냐”며 일갈했다. 전 전 대통령은 김 추기경의 발언을 듣고 얼굴을 굳힌 채 돌아갔다고 한다.
서슬 퍼런 ‘5공’의 폭압 속에서도 김 추기경은 민주와 인권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광주에 다녀오자마자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광주항쟁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국성명을 발표해 ‘5ㆍ18 민주화운동’ 때 광주의 상황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또 김 추기경은 광주를 위한 ‘특별기도’도 집전했다. 이런 김 추기경의 행보에 전 전 대통령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당연히 더욱 멀어졌다.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며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1987년 일어났다. 당시 김 추기경은 추모강론을 통해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묻고 싶다”며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느냐”며 강하게 비판했다. 김 추기경의 발언에 국민은 들풀처럼 일어섰고, 전 전 대통령의 ‘5공’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6ㆍ10 민주항쟁.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구호가 전국을 메아리쳤다.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은 당시 5공 군사독재 정권의 종지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5공 정권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무시한 채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만 급급했다. 그런 ‘폭압’ 속에서 명동성당은 민중이 피할 수 있는 현대판 ‘소도(蘇塗ㆍ삼한시대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신성(神聖) 지역이라 죄인이 들어와도 잡아갈 수 없었다)’였다. 군사정권은 이 소도마저 들어가 짓밟으려 했다. 김 추기경은 성당을 에워싼 전경 앞에 서서 “나를 밟고 지나가라”며 온몸으로 맞서 경찰의 성당 진입을 막았고, 민주항쟁을 지켜냈다. 결국 6ㆍ10항쟁은 지금의 민주화를 낳은 큰 밑거름이 됐다. 그 중심에 김 추기경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시작된 진정한 화해=두 사람은 이후 자주 만나지 않았다. 당시 절대 권력자에게 당당히 “아니요”를 외칠 수 있었던 김 추기경은 전 전 대통령에게 ‘눈엣가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세월은 지났다. 한 사람은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또 한 사람은 ‘일해(日海)’가 아닌 ‘일몰(日沒)’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전 전 대통령은 관(棺)에 누워있는 김 추기경을 보며 “그때 서로 그렇게 맞서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며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관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화해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신상윤ㆍ백웅기 기자/ken@heralm.com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기사다.
인생은 ?
이런 것이 아닐까?
참 용기있는 걸음 걸음을 옮기신 마지막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도드리며
아름다운 인생을 사신 김수환추기경을
추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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