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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내겐 너무 특별한 계모임…종류도 애환도 가지가지 , 발레계·명품계·여행계…

이상과 현실 그리고 코람데오 2009. 1. 16. 10:28

[20&30]내겐 너무 특별한 계모임…종류도 애환도 가지가지

발레계·명품계·여행계…

돈도 불리고 친목도 쌓는 계모임이 불황기 각박한 인심을 파고들었다.주식,펀드 수익률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남녀를 불문하고 계를 통한 돈불리기가 유행이다.재테크,맛집 탐방,공동구매에서 해외여행까지 계를 하는 이유도 가지가지.하지만 곗돈을 먼저 타려고 눈치작전을 펴는 건 여전한 풍경이다.계주가 돈을 들고 튀거나 곗돈을 펀드에 넣었다가 수익률이 급락해 인간관계가 헝클어지는 경우도 많다.요즘 젊은 남녀들의 계모임을 들여다봤다.

●‘취미계’ 기쁨 두 배

 영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김모(27)씨는 졸업논문 때문에 눈코뜰새 없지만 취미생활인 발레는 절대 빼먹지 않는다.일주일에 두 번 집에서 한시간 거리인 압구정동까지 꼬박꼬박 출석한다.어렸을 때부터 발레 한 번 배워보는 게 소원이었던 김씨는 1년 전 학원에 등록하며 ‘로망’을 풀었다.

성인발레 전문인 학원에는 김씨같은 여성들이 많았다.깡마른 몸매를 선녀날개같은 발레복으로 감싸고 날렵하게 점프하는 발레공연에 빠져 김씨는 ‘발레계’를 조직했다.괜찮은 콘서트홀에서 발레공연을 보려면 20만원을 훌쩍 넘기 때문이다.“학생신분에 20만원이면 버겁죠.한 달에 5만원씩 넣으면 주요 공연은 다 관람할 수 있어요.”발레리나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은 9월 티켓 오픈 때 인터넷 예매로 사수했다.

 학원 강사 박모(26)씨는 다음달이면 명품 C브랜드의 ‘2.55백(55년 2월 출시)’을 손에 넣을 꿈에 부풀어 있다.박씨는 졸업과 동시에 대학 동기들과 ‘명품계’를 조직했다.명품가방을 구매하기 위해서다.박씨는 대학생 때부터 밥값,차값을 몇달씩 살뜰히 모아 가방 한 점을 장만했던 가방마니아.시즌마다 나오는 ‘신상’을 살 수 있다면 몇 정류장을 걸어다니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뜻맞는 친구들을 물색해 만든 가방계는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모임이었다.

 박씨 일행이 첫 번째 대상으로 택한 가방은 300만원이 훌쩍 넘었다.전세계에서 3초에 한개씩 팔려나간다는 L브랜드의 ‘스피디백’같은 흔한 백은 질렸다.“가격이 비쌌지만 곗돈으로는 과감히 지를 수 있겠더라고요.”누가 가장 먼저 가방을 갖느냐를 두고 친구들끼리 신경전도 일었다.“저는 6명 중에 네 번째예요.다음엔 제가 좋아하는 다른 브랜드로 구매할 거예요.”

 중학교 체육교사 최모(27)씨는 해외여행 한번 못 가본 한을 뒤늦게 풀고 있다.최씨는 학생 시절 겨울방학 때마다 스키강사 아르바이트를 하고 2005년 졸업 직후 스물 넷 어린 나이에 교사로 임용됐다.

 쉼표없이 달려온 최씨 인생에서 ‘여행계’는 숨통 한 자락과 같았다.여행계 멤버는 같은 학교에 발령받은 새내기 교사 권모(29)·이모(27)씨였다.셋은 ‘SES’란 별명까지 얻으면서 학교에서 겪는 고단함부터 남자친구,집안얘기로 끈끈하게 뭉쳤다.3총사의 동료애는 맏언니격인 영어교사 권씨의 주도로 여행계로 거듭났다.일본,유럽,동남아 배낭여행으로 다져진 권씨의 주도로 2006년 3월부터 매달 20만원씩 부었다.여섯달 만인 2006년 8월,각자 120만원씩 쥐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최씨는 “한 번에 120만원을 쓰는 것은 부담스러웠지만 ‘한 번 가는 일본’이란 생각으로 끼니때마다 맛집을 찾아다녔어요.덕분에 모처럼 호사를 누렸죠.”라고 했다.그녀는 “차곡차곡 모은 덕분에 큰 부담없이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며 흡족해했다.

 최씨는 또 다음 시즌 여행 계획에 한껏 들떠 있다.“안 가봤을 땐 잘 몰랐는데 한 번 다녀오니까 또 가고 싶어지더라고요. 돈을 모으면서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까?’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설레요.”

 혼자 돈을 모으면 의지가 약해질 법한데 여럿이 모으니 여행계획도 함께 짜는 가외의 장점도 있었다.두번째부턴 방학 때마다 한 사람에게 360만원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바꿨다.최씨는 이 돈으로 2007년 1월 겨울방학 때 호주로 나홀로 여행을 갔다.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물론,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 경기도 관람했다.

 하지만 2년 6개월여간 꾸려온 계는 내년 1월 끝날 예정이다. 맏언니인 권씨가 이번 달 결혼하기 때문이다.최씨는 부부·애인 동반으로 강원도 여행을 다녀온 뒤 계를 청산하려고 한다.“여행계획 세우면서 깔깔거릴 수 있었는데 끝내려니 아쉽네요.”

●쌓이는 곗돈만큼 돈독해지는 우정

 회사원 이모(26)씨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친구들과 맛난 것 먹으며 수다떨기다.대학교 4학년 때 미드(미국드라마) ‘섹스앤더시티’를 보면서 브런치의 세계에 눈떴다.이씨는 친구 네 명과 당장 ‘브런치계’를 시작했다.‘계’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민망할 정도로 소박한 계였다.매주 금요일마다 3시간을 할애해 서울 시내 맛집을 찾아다녔다.“비싸고 우아한 식사를 한 건 아니었어요.학생이라 주머니 사정이 얄팍하잖아요.하지만 50년 된 김치찌개집에도 가봤고 장충동 족발집,용두동 주꾸미 거리,청진동 해장국 등 유명한 밥집을 두루 다녔죠.”

 졸업 후 취직한 다음부터 모임은 한 달에 한 번,매월 마지막 일요일로 정해졌다.주메뉴도 드라마에 나오는 브런치로 바뀌었다.“업무에 치이다 보면 만나기가 힘들더라고요.그래도 한 달에 한 번 만나 맛있는 것 먹으며 회사 얘기를 하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요.”이씨는 “자주 찾는 삼청동은 이제 번잡해 조용한 우리들만의 아지트를 찾고 있다.”고 했다.

 

 공기업 직원 이모(31)씨는 “잘 키운 계모임,열 친구 안 부럽다.”고 말한다.그는 지난해 1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신도 7명과 함께 ‘결혼계’를 시작했다.매월 3만원씩 모아 웨딩마치를 울리는 계원에게 현금 100만원씩 주는 계다. 지난달 결혼한 이씨는 계원들이 해준 특별 이벤트가 아직도 생생하다.계원들은 교회에서 결혼한 이씨에게 어린이 합창단을 섭외해 축가를 선사했다.곗돈을 보태 신혼여행으로 프랑스를 찍고 왔다.이씨는 파리 에펠탑 전망대에서 계원들에게 사진엽서를 보냈다.신혼집 첫 집들이 손님은 당연히 계원들이었다.회사 동료들이 서운해 했지만 양해를 구했다.이씨는 “언젠가 모두 결혼하게 되면 계는 끝나겠지만 그 땐 또다른 계를 만들어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며 만족해했다.

 홍보대행사에 근무하는 이모(27)씨는 1년 전 적금을 해약하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돈을 모아 해외여행을 갈 요량으로 남자친구,친구 커플과 함께 매달 5만원씩 적금에 넣는 계를 시작했다.통장에 꼬박꼬박 불어나는 숫자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남자친구가 1년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가 있는 동안엔 그의 몫까지 두 배로 적금했다.2년 뒤 목돈을 손에 쥔 이씨,남자친구와 여름휴가 날짜를 맞출 생각에 부풀었다.

하지만 바로 그 즈음 이씨는 남자친구와 결별했다.헤어지고 나니 둘 앞에 남은 건 적금통장뿐.이씨는 적금을 해약하고 남자친구와 친구 커플이 냈던 돈을 돌려보냈다.남자친구 몫까지 대신 냈던 자신에겐 200만원 넘게 돌아왔다.“열심히 모았던 돈을 찾는 보람을 느껴야 할 순간,말할 수 없이 씁쓸했습니다.”

 주부 강모(32)씨는 매월 곗날이 되면 기분이 나빠진다.다름아닌 자신의 운 때문이다.2년 전 친구 6명과 모여 친목계를 시작하면서 재미를 더하려고 뽑기식으로 했다.곗날 돈받을 사람을 제비뽑기로 정해 이번 달에 받았으면 다음 달엔 제외하는 방식이었다.그런데 강씨는 번번이 뽑기에서 기회를 놓쳤다.강씨는 2년간 2번이나 꼴찌로 곗돈을 탔다.“평소에는 경품 응모하면 작은 거라도 꼭 당첨되는데 하필 곗돈 순번은 꼭 밀리더라고요.다른 계처럼 순번대로 타면 목돈쓸 때 미리 준비할 수 있을 텐데요.”그녀는 이제 와서 방식을 바꾸자고 하기도 난감하다고 했다.

 직장인 최모(28)씨도 계라면 손사래를 친다.종종 계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아도 “잘못하면 친구만 잃는다.”며 한사코 거절한다.

 최씨에겐 10여년 전 계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당시 고3이었던 최씨는 친구 6명과 휴대전화를 사기 위한 계를 만들었다.수능이 끝나면 곗돈으로 다함께 구입하기로 했다.단짝친구인 계주에게 매일 1000원씩 냈고 1년 가까이 모인 돈은 어느새 200만원에 달했다.그런데 수능 뒤 계주는 곗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어느날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담임 선생님은 친구가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갔다고 했다.그는 전화 연락 한 통 없었고 집으로 찾아가도 절대 나오지 않았다.최씨는 몇 년 전 그 친구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다.친구는 “당시 곗돈을 여자친구와 놀다 마음대로 써버렸다.”면서 “면목이 없다.”고 사과했다.최씨는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커서 그 이후로 계모임엔 절대로 가입하지 않는다.”고 했다.

 

●곗돈 펀드로 날리자 우정도 날아가

곗돈을 펀드에 넣다가 우애가 틀어진 경우도 있다.회사원 고모(32)씨는 요즈음 출근하기가 고역이다.지난해 초 입사동기 4명이 모여 ‘펀드계’를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20만원씩 갹출해 차이나펀드에 ‘몰빵’했다.올해 초까지만 해도 증권사에선 ‘조정기를 거친 뒤 베이징 올림픽이 끝나면 주가가 반등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최근 주가폭락으로 돈을 뺄 시점을 놓쳐버렸다.가입한 펀드 수익률은 -60%까지 내려갔다.아내에게도 비밀로 하고 용돈,차량지원비를 아껴서 모은 피같은 돈이었다.이달 초 술자리에서 격해진 나머지 고씨는 동기들과 주먹다짐까지 했다.급기야 술집 주인이 지구대 경찰을 불렀다.고씨는 “다 함께 돈을 잃었는데 나한테 따지다니 억울하다.회사에서 얼굴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분개했다.

 대구에서 액세서리 상점을 하는 최모(32)씨는 최근 1년간 부은 곗돈을 타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지난해 말 주변 상인들과 함께 계를 들 때만 해도 가족들에게 ‘계를 왜 하느냐.’는 핀잔을 들었다.너도나도 주식,펀드로 대박이 터지던 시기였던 탓이다.하지만 올해 들어 세계경기가 급속히 악화되고 주가,펀드 수익률이 곤두박질치자 상황이 역전됐다.이자까지 받으려고 곗돈 타는 순서를 맨 뒤로 미룬 최씨는 은근히 들떴다.

 하지만 기대도 잠시 강남의 다복회 계주가 돈을 떼먹었다는 뉴스가 나오자 마음이 급해졌다.“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계원들한테 전화도 돌리고 괜히 옆가게만 오락가락했죠.”좌불안석 열흘이 지나 결국 곗돈을 손에 쥔 최씨는 비로소 두 발을 뻗고 잘 수 있었다.최씨는 “역시 쉽게 돈 버는 일은 없더라.”며 그간 마음 졸였던 소회를 드러냈다.

이재연 김민희 장형우기자 oscal@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