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테크노 미니스트리(techno-ministry) 현상을 바라보며
미국의 테크노 미니스트리(techno-ministry) 현상을 바라보며
이해동 기자 googood@googood.com
펠로우십 우드랜드 교회
주일 예배를 영화관에서, 신학관련 토론회는 근처 술집에서?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한국교회 문화에서는 쉽게 용납되기 힘든 모습임에 분명하다. 물론 이 불경스러운(?)이야기는 미국의 한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사정은 이렇다.
한참 성장 중인 이 교회가 자랑하는 최신식 하이테크 장비들이 고장이 나는 바람에 예배시간에 교회 중앙의 대형스크린에 비추어져야 할 성경 구절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고, 젊은이들이 준비한 예술 공연과 배경으로 깔려야 할 음악이 갑자기 끊기는 등 예배에 어려움을 겪게되자 담임목사는 장비가 정상가동 될 때 까지 인근의 한 영화관을 임대해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첨단 멀티미디어가 만들어내는 특수효과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를 활용할 수 있는 예배가 가능한 교회의 시설에 비하면 임시로 임대한 시설이 열악하다는 생각에 담임목사는 성도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영화관 예배를 시작했다.
작은 소그룹 모임과 세미나는 근처의 술집을 사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존 칼빈을 영적인 선구자로 삼고 있는 개혁교단에 속한 교회로서 테크놀로지야 말로 이 교회에서 활력의 근원이 되고 있다.
예배 시작 30분전 극장안, 예배준비를 위해 전자 장비로 가득 찬 영사실에서는 자원봉사자가 자신의 아이팟(iPod)을 교회 행사에 적합하게 디자인된 소프트웨어를 입력하고 튜닝을 하는 동안, 또 다른 봉사자는 대형스크린 위에 장엄한 일출 장면과 안개 낀 항구의 모습 그리고 파도가 부서지는 바닷가의 아름다운 성 등의 이미지를 투사하면서 미디어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대형스크린에 비춰지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신앙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선별한 것들이다. 하지만 대형스크린을 타고 흘러내리는 멋진 이미지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황폐한 사막의 모습 그리고 동물들이 뛰노는 장면들로 자극된 인간의 감정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잘 들어날 수 있겠냐며 이미지 프레젠테이션을 비판하는 부정적인 견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키보드연주자는 전자스크린을 통해 악보를 보며 연주하고 T셔츠 차림의 십대 젊은이들이 예배 전에 악기를 조율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다. 그들은 테크놀로지가 회중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예배나 집회에 참석하는 대개의 청년이나 어린이들은 테크놀로지가 그들을 좀 더 편안하게 한다는 데 동의 한다. 성인들 중에는 교회의 딱딱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데 테크놀로지가 도움이 되며 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에는 진부한 것이며 전통적이고 낡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테그놀로지를 이용한 소위 테크노 미니스트리(techno-ministry)를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사람들 중에는 예배를 상연(上演)하는데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해당 주일의 영적 주제를 나타낼 수 있는 전자 이미지를 선별하는 데 집중한다. 찬송을 선곡한다든지 하는 일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이같은 멀티미디어 활용의 경험은 테크노-미니스트리를 하는 사역자들에게 예배의 목적과 의도에 더 고민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가령 ‘생명의 양식’에 대한 찬송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들은 회중들에게 ‘빵’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보다는 ‘배고픔’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수많은 복잡하고 정교한 정보기술(formation technology)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대개 고도의 성장을 이루고 있는 집단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교계에도 잘 알려있는 윌로우크릭교회(Willow Creek Community)의 경우 수많은 교인들이 넘쳐나는 육중한 교회 건물 안에서, 교회학교로 들어가려는 학생들은 우선 지문인식 센서에서 신분을 확인받은 후에야 통과 할 수 있다.
교회학교에 있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부모들은 자신의 신분증명카드를 디지털 카드인식기가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상황에서 3,0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안전을 보호 하고 혼란을 막기 위해 신속하고 정확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정보기술을 담당하는 마이크 골드(Mike Gold)는 설명한다.
7,095명을 수용하는 강당 어디에서든지 대형스크린을 통해 빌 하이벨스 목사의 설교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다. 목사의 설교를 듣지 못했다면 나중에 교회의 웹사이트에서 스트리밍 비디오(streaming video)로 다시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연간 2,700만 달러의 예산 중 백만 달러를 이같은 기술을 위한 예산으로 책정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교회생활에 필요한 정보는 교회 블로그를 통해 얻을 수 있다.
교회의 자금관리최고책임자(CFO)는 교인들의 정확하고 편리한 실입조를 위해 웹상에서 단 몇 분 만에 처리할 수 있도록 금융결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텍사스 휴스턴 소재한 미국 최대 교회인 레이크우드교회(Lakewood Church) 경우 매주 40,000명이 예배에 참석한다. 교회는 이 예배를 위해 컴팩 센터(Compaq Center)를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한 때 프로 농구단의 홈 경기장이기도 했다. 예배 시 담임목사의 모습을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3개의 대형 비디오 디스플레이 스크린을 사용한다. 여기에 특수 제작된 조명은 차별화된 조명 효과를 만들어 내고 400만 달러이상의 비용을 들여 구입 한 교회 음향 ․ 영상기기들은 예배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고 한다.
첨단 장비= 첨단 사역(?)
이 교회처럼 최첨단 기기로 무장한 사역에 교인들의 참여가 점차 증가 하면서 미국 내에서는 실험적인 회중뿐만아니라 주류교단의 교회까지 이러한 경향이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미국의 교회 관련 조사연구기관인 바나그룹의 조사에 따르면 2000년에서 2005년까지 개신교단에서 대형스크린 프로젝트를 사용하는 비율이 39%에서 62%로 증가한 것으로 나나타고 있다. 조사 대상의 절반이상이 웹사이트를 가지고 있으며 대상자들에게 대량 이메일을 발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예배 시에 필요한 영상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순절계통의 교회 에서는 거대한 모니터를 사용해 예배 또는 집회 중에 손을 흔들거나 기도에 열중하는 모습이나 성령에 의해 신자가 뒤로 넘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이러한 영상들은 사람들의 심리나 감성을 움직여 일정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테크노 미니스트리(techno-ministry)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형 스크린을 비롯해 웹사이트, 멀티기능을 장착한 비디오 등을 무기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이 시대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다가서려고 하고 있다. 사실 디지털 사역에 필요한 장비들이 과거에는 너무나 고가여서 경제적으로 빠듯한 교회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가격이 떨어지면서 작은 교회들도 고급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 이를 기반으로 한 사역이 확산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교회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데 사용되는 비디오의 이미지들이 자칫 교회가 갖고 있는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위 ‘테크노-워십’의 경향이 무르익으면서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러한 경향이 교회의 더 심오한 목적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러한 시도가 주변에 머물러 있는 방관자들을 교회 안에서의 활동적인 참여자로 바뀌게하며 사람들이 주위에 자신의 감격적인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데 힘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테크놀로지는 일반사회 뿐 만 아니라 교회에까지 깊이 만연되어가고 있다.
아직까지 모든 사람들이 디지털 사역 또는 디지털 예배에 빠져 있지는 않지만 미국에서는 테크놀로지를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라고 까지 추켜세우는 우상화의 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미시건 주 칼빈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있는 퀜틴 슐츠(Quentin Schultze)교수는 자신의 저서(High-Tech Worship? Using Presentation Technologies Wisely 하이테크-워십? 프레젠테이션 테크놀로지를 지혜롭게 사용하기) 를 통해 예배에서 테크놀로지를 사용함에 있어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임시변통으로라도 빠른 효과를 보고자 하는 우리시대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혹자들은 교회가 예배 시에 새로운 미디어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전문가들은 교회에서 사용되는 테크놀로지가 유효성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원칙을 언급한다. 듀부크 신학대학(University of Dubuque Theological Seminary)의 존 쥬웰 주니어(John Jewell Jr.)교수는 첨단 기기들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때 교회 안에서 훌륭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교인들이 가정에서 만들어온 이미지나 회중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음향을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내용 면에서도 교회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서 공동체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그는 조언한다.
교회들은 점차 미디어가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사실이며 이것이 바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설교를 듣는 것에 익숙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조명과 음향이 큰 예배당을 보다 친숙한 모습으로 바꾸어 설교자들이 교인들과 보다 잘 소통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말하는 기술자들이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교회는 예배 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자가 필요하게 되었고 멀티미디어와 관련된 교회의 지출이 교인을 모은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교회가 사용하는 첨단 테크놀로지를 장착한 멀티미디어 장비들을 판매하는 기업들이 교회를 잠재력인 있는 시장으로 보고 앞 다투어 뛰어 들고 있는 실정이다. 애플 컴퓨터의 스티브 잡스는 최근 성직자들이 이미지 확대 시스템과 대형 스크린 비디오 디스플레이 장치 등을 종교 활동에 적극 활용함으로써 비디오 게임, 인터넷 등에 빼앗긴 사람들의 관심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며 관심을 보였다.
기우(杞憂) 하나
어쩌면 우리는 미디어가 이끄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에는 교회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멀티미디어는 문자, 음성, 영상 등을 융합시킨 정보전달 매체를 지적하는 단어이지만 이는 기술적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현란함 이면에 멀티미디어가 갖는 사람들 사이의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미치는 영향력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멀티미디어를 비롯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감각기관 및 두뇌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사람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변화는 컴퓨터가 갖는 능력의 진보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멀티미디어의 진화가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람들과 하나님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일어날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은 그의 저서〈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Understading Media: The Extensions of Man)〉에서 매체는 환경을 바꿈으로써 우리의 지각작용에 독특한 비율을 가져오며 이런 비율이 변화되면 사람도 변화시킨다고 주장하면서 그 유명한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사회 조직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유형의 결속을 창조하며, 새로운 형태의 지식을 개발하고, 권력의 중심부를 변화시킨다. 또한 미디어는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아니라 우리 감각을 외부로 끌어낸 인간 능력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동차의 바퀴는 발의 확장이며, 또 서적은 눈의 확장이며, 의복은 피부의 확장이고, 전자회로는 중추신경 체계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 감각의 확장인 미디어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유형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디어의 영향이 사람들 간은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 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미디어가 인간의 감각이 확장된 형태라면 첨단 테크놀로지의 미디어가 종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것일까? 아직 과학기술의 진보를 정확히 내다 볼 수 없는 우리에게 첨단 테크놀로지 미디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심리와 정서의 자극을 통해 얻어지는 영적 고양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신앙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또한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영적 경험을 하는 시대-물질적 현상계와 정신적 영성계가 융합되는-가 도래 한다면 이는 전통적인 방식의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 엄청난 도전이 될 것은 물론 교회 전반의 모습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 형태와 구조 [제1회 구굿포럼] 류장현 논설위원/ 한신대 겸임교수 1) 교회의 본질과 통전적 선교 근대정신을 대변하는 교회론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형성되었고 전통적인 교회론으로 발전되어 온 의인론적 교회론이다. 루터에 의하면 교회는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어지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행되는 곳이다. 여기서 말씀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죄의 용서로 이해된 복음의 선포를 의미하며, 성례전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도구이다. 교회의 선교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교인으로 만들어 그들을 양육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본질을 “성도들의 모임”(루터) 혹은 “선택받은 사람들의 무리”(칼빈)로 정의하였다. 즉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모임이다. 이러한 의인론적 교회론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교회론으로서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성령론적인 성격을 상실하였다. 또한 의인론은 죄인이 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 죄인이 된 인간은 하나님과 실존적으로 마주 서 있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독립적 주체로서의 개별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의인론적 교회론은 개인주의적 신앙을 강조하여 교회의 공동체성을 파괴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개인의 영혼구원으로 축소하였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저 세상의 희망으로 변질시켰다. 또한 의인론적 교회론은 하나님과 인간, 영원과 시간,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철저하게 분리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봉건주의 사회에서 초기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신흥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보편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는 의인론적 교회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교회여야 한다. 첫째,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는 근대의 개인주의적 신앙을 극복하여 공동체적인 신앙과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함께 시작되었고(마16:18)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태동된 종말론적 은사공동체이다(행2:42-47).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회상하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일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즉 교회는 자신의 본질과 사명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는 자신의 본질을 전통적 교회론처럼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마16:16)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찾아야 한다(마16:18). 예수 그리스도는 선포와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일했으며 자신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였다(마10:5-8, 마9:35-38, 눅4:18-19). 교회의 본질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근거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며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서 “선택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것을 위해 세상에서 일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종말론적이며 은사적인 교회 이해는 모더니즘의 역사적 낙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적 비관주의를 동시에 극복한다. 둘째, 종말론적 은사공동체의 형태는 이미 설명한 자신의 본질을 출발점과 목표로 해야 한다. 만일 교회의 형태가 자신의 본질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행의 추종이요 시세의 편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형태는 자신의 본질로 되돌아가기 위한 부단한 자기갱신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교회의 형태는 교회와 세상의 근원과 목표가 되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장소인 세상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그것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여 구원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성직자 중심의 제도적인 교회, 교회와 세상을 근접시켜서 세상의 권력을 탐내는 세속화된 교회,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서 분리되어 은둔주의로 빠진 탈역사적인 교회를 해체하며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재연하는 “생활종교”이다. 그것은 하나의 교회로서의 친교를 상실하는 교파주의, 하나님 말씀을 사상 체계에 고정시키는 신학주의,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교회주의와 성령의 활동을 저해하는 신조주의에 빠져서 생명력을 상실한 교회의 극복으로서 백성의 고난과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신을 제단에 바치는 거룩한 대속애를 실천하는 교회, 인간의 일상생활에 의미와 격려와 소망을 주는 교회,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웃종교와 대화하며 협력하는 열린 교회이다. 셋째, 교회의 선교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완성하는 일이다(마6:33). 그것은 “앓는 사람을 고쳐 주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내쫓아라”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마10:7). 그 실천 방법은 문화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전통적인 고전적 선교 방법과 산업화 시대에 형성된 하나님의 선교 방법을 넘어서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알맞은 새로운 선교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고전적 선교가 복음화를 통한 이교도의 개종과 개인 구원, 교회의 확장을 강조한다면,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화를 통한 사회구조악의 제거와 사회 구원, 하나님의 샬롬의 실현에 관심을 가진다. 이러한 상반된 선교 방법은 복음화냐 인간화냐, 영혼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양적 성장이냐 질적 성숙이냐 등 교회에서 진보와 보수 논쟁을 일으켜 교회의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단편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포스트모던 시대의 선교 방법으로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고전적 선교는 인간의 실존적 문제와 영적 변화에 관심을 가지며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하여 그것을 탈역사화 혹은 심령화시키며, 반대로 하나님의 선교는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악과 사회개혁에 관심을 가지며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을 강조하여 그것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킬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선교는 고전적 선교 방법과 하나님의 선교 방법을 창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한다. 그것은 두 선교 방법의 장점만을 단순히 취합하거나 인간 구원과 사회복지사업을 종합한 “전인적 선교”가 아니라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물론 질병과 운명으로부터의 해방, 자연의 해방,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를 제한하는 종교(혹은 교리와 신학)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한 “우주적 해방”을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 혹은 통전적인 선교를 의미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는 총체적 해방, 곧 “범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를 목표로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는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넷째, 평신도는 탈근대사회에서 선교의 주역이다. 문화의 다양성과 상대성이 강조되는 탈근대 사회에서 목회자는 근대 사회에서처럼 팔방미인이 되어 모든 선교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양한 전문성을 지닌 평신도들의 은사를 개발하고 체계적인 양육과 훈련을 통하여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평신도를 잘 양육하여 “목사급 평신도”를 만들어 목회자의 사역을 돕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와 평신도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함께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세례를 통해서 안수 받은 제사장들로서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신분의 차이가 아니라 직무의 구별만이 있다(WA 6, 407). 목회자와 평신도는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동역자이다. 목회자는 평신도를 통제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동역자로 이해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도와주는 '돕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는 자신의 소명과 직무가 목회자와 다르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직무의 차이를 신분의 차이로 오해해서는 안 되며 교회의 질서와 덕을 세우기 위하여 목회자에게 위임한 권한을 존경하는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목회자와 평신도는 동역자와 협력자로서 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며 지역적(local truth)이라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보편적 진리를 강요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며 억압이 된다. 이러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에 상충되는 측면이 있지만 교회의 독선과 오만을 극복할 수 있는 관용의 자세를 제공한다. 참된 진리는 열려있는 신비이다. 그것은 항상 성령에 의한 자기초월체험을 통해서 체득되며 모든 생명체의 구원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참된 교회는 신학과 교리체계, 제도와 조직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통하여 인간과 사회를 변화시켜 생명을 풍성하게 만드는 교회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는 ‘교회간 대화’와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하여 인류의 행복 증진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위하여 협력하며 대화하는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구굿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