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야 “일기장은 ‘감성의 카메라’예요”
2008년 12월 29일(월) 오후 5:40 [경향신문]
ㆍ“희미한 연필의 기록이 또렷한 기억보다 나아”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 한비야씨(50)가 매년 12월31일이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꼭 하는 일이 있다. 그 해에 썼던 일기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것이다.
![]() |
“저는 또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자국이 낫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그 날 그 날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제가 뭘해왔는지 뭘 해야할 것인지를 되새겨보죠.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써온 것이 지금의 저를 만든 좋은 습관이었습니다.”한씨는 일기장을 ‘감성의 카메라’라고 설명했다. 기억이란 지나고 나면 사건의 골자, 즉 뼈만 남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록은 감정까지 담는다. 그래서 살도 붙어 있다.
“아프리카 긴급구호현장에서 오토바이가 먼지를 일으키고 지나갔을 때 그게 다 밀가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만약 그런 느낌을 일기장에 기록하지 않았다면 당시의 감정은 사라지고 언제 어디서 구호활동을 했다는 일지만 남았겠지요.”한씨의 베스트셀러 <지도밖으로 행군하라>도 그러고보면 일기장 덕이다. 이 책은 121쇄 75만부가 나갔다. <바람의 딸> 시리즈까지 합치면 250만부가 판매됐다. 일기장의 기록들이 밑천이 돼 책으로 나왔다.
“제 책을 읽은 독자들은 마치 일기를 읽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때 그때 기록을 해놓지 않았더라면 생생한 느낌을 책에 담지 못했을 거예요. 독자들도 그런 느낌이 그냥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죠.”한씨는 또 일기장을 ‘사회적 유전자지도’라고 설명했다.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어떤 책을 읽었는지 개개인의 역사가 다 일기 속에 담겨있다는 것이다.
![]() |
한씨가 일기장을 써온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아이들은 그림일기를 쓰게 마련이지만 그림에 소질이 없었던 터라 글에 정성을 쏟았다. 이를테면 비가 온다고 하지 않고 ‘비가 통통통 유리창에 부딪혔다’고 썼단다. 부모와 선생님은 많은 칭찬을 해줬고 그때문에 일기쓰기가 생활이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사를 자주 다녀 초등·중학교 일기장은 앨범과 함께 모두 잃어버리고 지금은 고교 때부터 쓴 일기장 60여권이 남아있다.
“당시 일기장을 들춰보면 지금도 내 자신이 대단해요. 학창시절 일기장에는 이런 대목도 있거든요. ‘지금 잘 견디면 나는 더 잘될 것’이라고요. 이런 일기를 보면서 제 자신이 성숙해지고 클 수 있었던 것 같아요.”과거엔 대학노트에도 썼지만 요즘은 기자수첩 같이 그때 그때 적기 좋은 작은 일기장을 들고 수시로 메모한다. 한씨는 일기야말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인생의 거울’이라고 했다.
<글 최병준기자·사진 월드비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