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을 합시다
절친한 부부들끼리 회식 자리. 남 보기도 좋게 고등어찜 한 점을 아내의 밥그릇 위에 덜렁 얹어놓았다.
남편:당신도 좀 배워요 배워. 진호 엄마의 요리솜씨를 좀 배우라고! 고등어찜은 이렇게 하는 거야.(모든 사람들은 웃었다. 웬걸 아내 눈치를 보니까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다.)
아내:진호 엄마하고 사시구려.(또 한바탕 웃고 말았으나 문제는 집에 돌아와서)
남편:냉수 한 잔 마십시다.
아내:진호 엄마한테 말씀하세요.
남편:거기에 왜 죄없는 진호 엄마가 들어가나?
아내:고등어찜엔 당신의 마누라는 왜 들어가죠?
남편:말을 쑥떡같이 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야!
아내:흥, 서당 훈장님이 한 분 부족하다 했더니 우리 집에 떡 버티고 앉아 계셨구만요.
남편:닥치지 못해!
‘부부싸움을 합시다’고 하는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 한 토막이다. 부부싸움은 그 형태가 하도 다양해 이제껏 인류가 개발해놓은 발명품의 수를 능가할 정도다. 가정 안에도 포성 없는 전쟁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10명중 1명꼴로 발생하는 피해자. 하루에 45명 정도가 가정폭력 사범으로 검거되고 있다는 통계수치는 이제 더 이상 화제도 아니다. 여기에 잠재적인 피해자까지 합친다면 그 피해 건수는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형태도 매우 다양해 아동학대에다 노인학대, 심지어는 근친상간에다 존속살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중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까이 있는 셈이다. 국가간 분쟁은 시간이 지나면 포성이 멈추어지고 복구작업이 이어지는데 가정 안의 고부전쟁은 수천년이 흐른 지금도 멈출 줄 모른다. 정부는 이 폭력을 추방해보기 위해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1998)까지 제정했지만 별무신통이다.
종종 ‘평화’가 ‘전쟁’의 반대 개념으로 이해되는 때가 있다. 즉,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큼 큰 모순이 없다. 평화의 진정한 개념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육체의 각 기관 사이의 건전한 조화와 통일(시38:3), 번영과 형통(신23:6,욥15:21), 계획의 완성(삿18:5), 조화 있는 공동체(삼하17:3,출18:23,시125:5) 등을 의미한다.
똑같은 맥락에서 가정생활에서도 ‘불충실’이 ‘충실’의 반대가 아닌 것과 같다. 종종 사람들은 항변한다. 내가 외도한 일도 없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무엇이 불충실이냐고. 하지만 불충실이란 가정 밖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도 일어난다. 즉, 남편과 아내로서 의무 불이행이나 부모 역할 유기가 정서폭력에 해당하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가정의 평화란 갈등이 없고 부부 싸움이 없는 그런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보다 적극적으로 용서와 화해, 치유와 회복,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찬 가정천국을 이루어내는데 평화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한 기자가 물었다. “세계 평화를 위하여 가장 긴급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테레사 수녀는 답했다. “기자선생께서 빨리 집에 돌아가셔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왜 테레사 수녀는 세계 평화를 위한 우선 순위를 가정에 두었을까? 가정이 모든 배움의 출발지이자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가수이자 작가였던 에른슈타인 슈만하인크 여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우리 모두의 심금을 울렸다. “가정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최초의 학교이자 교회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악인지 가정에서 배웁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예절 바른 행동이고 어떤 것이 무례한 행동인지도 가정에서 배웁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존경받는 가정,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곳은 바로 그런 공간입니다. 돈보다 애정이 더 중요한 곳, 행복의 주전자가 노래하는 곳이 가정입니다. 여러분에게 신의 은총이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