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가치를 지닌 믿음의 예배를 꿈꾸며
오늘날 우리는 그야말로 ‘예배 전쟁’(worship war)의 시대, 예배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시편 29:2)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고귀한 예배가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변질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21세기 교회의 예배는 외형적으로 더 큰 위기 상황을 맞고 있는데,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해체주의와 상대주의로 인해, 진리이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와 그 사역에 큰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와 같이 ‘떠오르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미리 감지하고, 그 변화의 핵심에 서 있는 ‘떠오르는 세대’에 초점을 맞춘 것이 바로 ‘떠오르는 예배’이다.
이것은 댄 킴벌(Dan Kimball)이라는 사역자가 1980년대 중반부터 실제 사역 현장에서 부딪혀 온 ‘구도자에 민감한 집회’(seeker-senstive service)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을 중심으로, 다른 사역자들과 함께 나누고 연구하며 대안을 찾아나간(지금도 계속 세워나가고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은 많은 미래 학자들과 아울러 관련 사이트를 봐도 알 수 있지만, X세대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 세대에 대한 관심과 함께 청소년 사역뿐 아니라 기존의 구도자에 민감한 집회로 성장한 교회에서도 떠오르는 예배를 도입하고 있다.
이머징 워십과 구도자에 민감한 집회의 경계선에서
최근까지 예배의 형식에서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미국 시카고 시외에 있는 윌로크릭교회와 LA에 있는 새들백교회가 주도적 역할을 했던 구도자에 민감한 집회였다.
한국에선 소위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떠오르는 교회는 구도자에 민감한 집회 이후를 염두에 두고 ‘떠오르는 예배’를 기획하고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다음의 표로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예배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머징 워십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
댄 킴벌 목사는 자신의 책 Emerging Church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음과 같이 비교해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세계관에 대한 변화표로 다시 정리할 수 있다.
이런 가치관의 변화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는 다시금 미국 뉴저지 드류대학의 스탠리 존슨 전도학 석좌 교수이자 교회 미래 학자인 레너드 스윗이 저서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미래 교회」(Postmodern Pilgrims)에서 제시한 포스트모던 시대 목회를 위한 EPIC 모델 - 경험적(Experiential), 참여적(Participa tory), 이미지 중심적(Image-driven), 관계적(Connected) - 과 맞물려 다음과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세대는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저 진리에 대해 알기보다 자신의 것으로 체험하고 싶어하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를 원한다. 또한 그들은 ‘참여’하기를 원하며,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수여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리고 ‘관계성’을 중시하며 ‘이미지 중심적’이다. 즉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말과 글로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이미지나 은유로 표현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권 아래 있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겐 기독교의 종교적 색채가 그들의 관심을 끄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적 배경이 거의 없는 세대이지만, 부모 세대가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이고 따분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영적인 것들을 더욱 추구한다. 따라서 예배 형식에서 ‘떠오르는 교회’는 동방 정교회의 예전이나 관상 기도(Lectio Divina)와 같은 영성 훈련을 도입하고, 이미지를 강조하는 젊은 세대들의 특성에 맞게 많은 시각적 예술물을 사용하거나 교회력에 따라 예배를 드린다.
경건한 예배 분위기를 위해 조명을 낮추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한다. 이젠 더 이상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신앙 고백과 은사로 예배의 과정에 적극 동참하기를 원한다. 이렇게 그들의 예배는 예배자의 참여적 요소를 강조하며 예배가 보다 유기적으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새롭게 떠오르는 교회에서 추구하는 떠오르는 예배의 흐름은 ‘예배의 복고’ 혹은 ‘예배의 전통’으로의 회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레너드 스윗은 앞서 소개한 저서 Postmodern Pilgrims의 부제를 “First Century Passion for the 21st Century World”라고 하면서, 미래 교회는 처음의 근원(source)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1세기 초대 교회의 원칙과 패러다임이 21세기 교회의 패러다임으로 돼야 한다는 것이다. 형식이나 예전에서 2,000년 가까이 전해 내려온 기독교의 전통적 유산을 회복하면서, 21세기 목회는 1세기의 영성과 열정을 회복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떠오르는 교회’는 교회의 시각적, 상징적, 예전적 유산을 찾아내 다시 그 의미를 되살리고 그것을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21세기 상황에서 재해석해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떠오르는 예배에서 고대의 예전, 여러 가지 훈련, 교회력, 유대 전통의 회복 등은 예배 현장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떠오르는 예배를 일컬어 ‘고전적 가치를 지닌 믿음의 예배’(Vintage-Faith Worship)라고 부른다.
새롭게 떠오르는 이런 교회와 예배는 초대 교회의 예배와 그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예배 회복 운동’(The Liturgical Movement)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새로운 흐름인 떠오르는 예배는 예배 회복 운동이고, 초대 교회의 귀한 유산을 회복하는 운동이며, 뿌리를 되찾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머징 워십의 특징
이머징 워십의 특징을 알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빈티지’(vintage)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빈티지는 원래 ‘수확기의 포도’ 또는 ‘포도주의 숙성’ 등을 의미한다. 잘 숙성된 질 좋은 포도주처럼 ‘오래 된 것의 아름다움’을 뜻한다. 빈티지가 복고와 다른 점은 낡은 것에 새로운 것을 주입해 다른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빈티지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선 두 가지가 전제돼야 한다. 곧 ‘역사’와 ‘독창성’(originality)이다. 먼저 빈티지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 된 것’이어야 하며, 그 속에 역사성을 부여할 때 가치가 더욱 커진다. 따라서 오래 되면 될수록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빈티지는 반드시 진품이어야 하기에 희소성의 가치가 있다. 아무리 오래 된 골동품이라도 내면의 독창성이 없으면 빈티지의 아름다움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따라서 빈티지의 가치는 오래 된 것들 속에서 독창성, 희소성의 가치를 발견해 내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떠오르는 교회는 ‘고전적 가치를 지닌 믿음의 예배’를 추구하며, 초대 교회의 원초적이고 고귀한 예전의 회복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낡고 생명력이 사라진 형식적인 예배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다.자유롭고 개방적인 틀 안에서 전통적 예전과 찬양 등을 도입하고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추구한다.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댄 킴벌은 떠오르는 예배를 ‘구도자에 민감한 집회, 그 후’(Post-Seeker-Sensitive approach)라고 부른다.
특히 21세기에 떠오르는 교회에서 예배란 더 이상 고대 전통을 답습하는 게 아니다. 그 전통을 발전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새로운 시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함께 융합해야 할 실천의 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예배의 열 가지 특징인 핵심 가치에 대해 살펴보자.
1. 떠오르는 예배는 예배를 구경하지 않고 함께 참여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일반적인 교회의 모습은 극장처럼 주보를 받아 자리에 가서 옆 사람과 형식적으로 인사하고 앉아서 ‘쇼’(예배)를 구경하기 위해 기다린다. 쇼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무대를 바라보면서 몇 가지 노래와 함께 1막을 구경한다. 2막에선 예고편 - 교회 광고 등 - 을 하고, 3막에선 주인공인 목사가 등장해 설교한다. 예정된 순서대로 박수 가운데 쇼가 끝나면, 서로 별 이야기도 없이 복도를 빠져나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돌아간다. 어느 누구도 예배를 ‘쇼’라고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떠오르는 교회는 이런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위와 같은 모습과 반대로 회중들의 참석을 충분히 고려해 예배를 기획하며 실천하려고 애쓴다. 이런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worship’이나 ‘service’라는 단어보다 ‘gather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다음과 같은 예배 기획의 가치 전환을 가져왔다.
2. 떠오르는 예배 모임은 유기적 디자인을 갖고 있다
떠오르는 교회의 예배 모임은 미리 짜 놓은 사전 계획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성령님의 역사와 변화에 의해 유기적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유기적이라 함은 예배를 보여주고 공연하는 것과 그 반대로 회중들이 참여하는 만남을 통해 많은 것들이 엮여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회중들은 단순히 앉아 있지 않고 성경 봉독, 나눔, 침묵의 시간, 노래, 메시지, 시각적인 것, 묵상 등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며 예배에 참여한다.
장소도 방에서 기도실로, 그림이나 여행 등으로 옮겨간다. 그렇다고 비조직적이거나 혼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자체 시스템이 정교하게 발달해 있다. 마치 인간의 몸이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엮여 건강하게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3. 예배 모임을 위해 구별된 공간을 만든다
떠오르는 교회의 예배는 시각적인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신비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이로움을 주기 위해 영적 환경의 예배를 추구한다. 주로 고대의 느낌을 주는 십자가를 사용한다. 그 이유는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예배하러 모인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배의 핵심임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특히 예배 공간을 장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초(candle)는 엄숙함과 진지함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예배 장소는 약간 어둡지만, 그런 어둠과 촛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실제 예배를 드리는 거실 분위기는 예배 공간의 중요한 면을 담고 있다. 극장 분위기를 피하고, 가족과 같은 공동체의 느낌을 갖게 하며, 사람들은 무대를 향하지 않고 서로 둘러앉아서 훨씬 더 공동체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색채 이미지를 통한 하나님 보좌의 상징에 대해 균형 있는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지만, 예배 공간에 대한 미적 감각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가치가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4. 예배 모임에 대한 다감각적 접근을 시도한다
다감각적 예배는 보고 들으며, 맛보고 냄새 맡으며, 만지고 경험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노래, 침묵, 설교, 예술, 표현에 대한 훨씬 더 큰 스펙트럼으로의 이동을 포함할 수 있음을 말한다.
개인 기도와 묵상은 예배 모임에서 특별하게 기획된다. 스크린에 교훈이나 성구를 띄워 마음을 고요케 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읽을 수도 있으며, 설교나 찬양 시간에 이런 기도를 계속할 수 있고, 침묵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주어지거나 소그룹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도 있다. 또한 기도는 설교 전후에 덧붙이지 않고 예배 시간 내내 이어진다.
그리고 식사도 이 예배의 공동체 특성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떠오르는 교회의 예배는 가정 식사와 비슷한 식사 시간을 높이 평가한다. 실제로 떠오르는 예배에서 교회력에 따라 유월절 식사를 재현하기도 한다. 예배 찬양은 함께 참여하는 공동의 것이며, 누구나 동등하게 찬양에 유기적으로 참여한다. 이 예배의 초점은 예수님과 예배 자체에 있고, 싱어나 밴드에 조명을 맞춰 그들로 하여금 예배 중에 직접 회중의 관심을 끌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음악 예배 스타일도 기독교 팝을 넘어 고대 음악, 팝 리듬, 글로벌 뮤직 등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감싸 안는 음악 형태로 이동한다.
디자인이나 인테리어의 이미지도 초월적 하나님을 만나러 이 자리에 와 있음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한편 설교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는 것이다. 예배에서 ‘들음’은 중요한 부분이다. 어떤 형태의 설교를 하느냐는 것은 회중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예배에선 설교가 없을 수도 있고 아주 짧은 설교나 가르치는 시간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이것은 설교의 가치를 폄하해서가 아니라 다른 환경(수업, 가정, 토론 그룹)에서 더 많이 상호 작용하는 방법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두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자신을 회중과 함께 여행을 하는 동반자로 봐야 한다. 설교는 더 이상 성경의 가르침을 권위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살아 있는 영성, 살아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을 함께 나누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5. 예배 안에 있는 움직임의 자유를 존중한다
대부분의 떠오르는 교회의 예배에서 회중들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끝나는 대로 나가 버리지 않는다. 마치 ‘테제’ 공동체의 예배처럼 흘러나오는 고대 기독교 음악을 들으면서 몇 마디로 계속 읊조리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며 그 음성을 듣는다. 이런 묵상의 시간을 위해 때로 자리를 떠나 기도실로 가서 설교 중에 가르침을 받은 것과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는 다양한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음악 예배가 20~30분 동안 지속되는 중에는 자리를 떠나 움직이는 것이 보통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 자리에서 성령님께서 그 삶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따라 움직일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6. 한 사람이 아닌 공동체에 대한 초점을 중요시 한다
설교를 어떻게 행하든지 한 두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설교 장소도 회중의 규모에 따라 다양해질 수 있고, 성경을 읽고 시를 나누며, 그 밖의 방법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매우 다양하다.
핵심은 언제나 한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각적 방법으로 의사 소통하는 것이 예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과거에 회당이나 가정에서 예배를 보면 서로의 책임이 나뉘어져 있었다.
예수님과 바울도 여러 도시에서 손님으로 초대되었고, 설교자는 회중들 ‘가운데’ 있었다. 수백 명이 모이는 곳에서도 설교자는 회중으로부터 분리돼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게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었다. 이런 예배 모임에서 가르침이나 설교는 공동체에서 나온다.
7. 예전, 고대 훈련, 교회력, 유대 전통을 반영한다.
떠오르는 교회에선 아이러니하게도 고대를 추구하려는 열망이 있다. 2,000년 교회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예전은 종종 말씀과 관련된 향이나 다른 의식을 사용하는 것 그 이상이다. ‘예전’이라는 말은 원래 ‘대중의 일’, ‘회중의 이름’, ‘회중을 위한 섬김’을 뜻하며 기독교 전통에선 ‘하나님의 행하심’에 그분의 백성들이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의 말대로, 예배를 ‘예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배가 모든 예배자들로 하여금 예배드리는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고안되었음을 암시한다. 점점 더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대강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고난 주간, 부활절, 오순절을 중심으로 구성된 교회력에 초점을 맞춰 예배드리는 것이 떠오르는 교회의 예배에서 생겨나고 있다.
8. 기도에 대해 강조한다
기도에 대한 강조는 떠오르는 교회의 예배에서 잘 만들어진 또 하나의 공통된 주제다.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양한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많이 주어진다. 설교 후에 급히 돌아가기보다 성령님께서 마음에 확신을 주고 격려해 주시도록 하며, 타인을 위해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9. 예배의 중심으로서 성찬식을 거행한다
성찬식은 떠오르는 교회의 예배에서 중심 부분을 차지한다. 사실 종교 개혁 이전에 예배의 중심은 성찬식이었지만, 현대 교회에선 성찬식이 너무 습관적으로 변해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고 예배의 경이로움과 예수님의 행하심을 기억하는 것이 사라져 버린 경향이 있다. 그러나 떠오르는 교회와 세대 중에 다시 한번 주의 만찬을 예배의 중심으로 되게 하자는 열망이 강하게 일고 있다.
10. 예배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님께 맞춰져 있다
가장 크게 살아 있어야 할 가치인데,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실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많은 현대 교회의 예배는 기독론적이기보다 인간 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부르긴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에 대한 기본적 원리를 배우는 참된 핵심에서 예수님은 거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실정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예수님만이 예배의 핵심이다. 이것은 기도, 십자가의 상징, 설교자나 찬양 예배의 리더가 강조되거나 드러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살아 있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는 설교를 할 때 언제나 염두에 둬야 할 중요한 사항이기도 하다.
평가
지금 일부 교회에선 이런 시대의 도전 앞에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예배의 전통을 서슴지 않고 내려놓고 시대와 문화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이어스(Byars)의 표현을 빌리면, 예배의 방향이 ‘점진적 개혁의 형태’(evolutionary pattern)를 따르지 않고 ‘혁명적 개혁의 형태’(revolutionary pattern)를 따르고 있다.
여기에 많은 혼란과 부작용이 따를 수 있고,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예배 현장에도 이런 혼란이 가증되고 있으며, 이것을 우리는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더 큰 문제는 예배를 수단시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만 있다면 어떤 형식이든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모방하는 한국 교회의 무감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고전적 가치를 지닌 믿음의 예배’는 21세기 한국 교회예배의 한 방향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예배는 소위 ‘떠오르는 교회’를 중심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며, 예배 형식에선 초대 교회의 원초적 예배의 재현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이해 ‘떠오르는 교회’는 1세기의 영성으로 되돌아가 기독교의 원초적 뿌리를 찾고자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1세기의 예배 영성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육으로, 혼으로 예배하기보다 영으로 예배하는 영성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길 소망한다(요 4:24). 앞으로 계속 주의 깊게 ‘이머징 교회들’과 ‘이머징 워십’의 흐름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사회에 접한 한국 교회의 예배가 나아갈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고대 예배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된 촛불이나 중세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대로 설치하거나 예전의 회복을 위해 성만찬의 횟수를 늘리는 것이 21세기 한국 교회의 예배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은 아니다. 여기에는 참여의 영성을 개발하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경험)를 강조하는 영성 있는 예배, 공동체 영성을 지향하는 예배, 이미지와 상징을 추구하는 예배, 생활 양식으로서 영성을 회복하는 예배, 성례전을 통한 기쁨과 잔치의 영성을 회복하는 예배, 교회력과 성경 일과를 통한 영성 훈련이 있는 예배, 전통과 현대 문화의 조화를 추구하는 예배 등을 위해 우리가 계속 심사숙고하고 적용해야 할 것들이다.
지금 우리 앞에도 ‘구도자에 민감한 집회, 그 후’ 즉 ‘열린 예배, 그 후’(Post-Open-Worship)가 다가오고 있다. 레너드 스윗은 자신의 책에서 포스트모던 문화에 대해 ‘위기의 문화’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위기는 기회라는 것이다. 위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마쉬-버’(mash-ber)는 고대에 산모가 출산할 때 앉았던 의자를 가리킨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진리 체계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 사회를 위기라고 생각하지만,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창조의 순간처럼 새로운 예배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의 창조를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광휘에 잠기는 예배의 회복을 위해 고귀한 시간의 소비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주승중 _ 장로회신학대학교 예배설교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