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화된 기독학생운동, 쇠퇴는 뻔한 일”
기독학생운동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한다(1) - 김인호 목사 [2005-06-2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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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교회 김인호 목사 | |
90년대 들어 침체기에 들어선 기독학생운동을 활성화 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기독학생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고, 시대 정신에 입각한 기독학생운동의 바람직한 방향성을 제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편집자주
추수교회 김인호 목사(50)는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오늘의 캠퍼스 선교 현장을 짚어보며 "태동된지 50년이 지난 복음주의 학생운동 그룹들이 고착화,기구화 되는 과정을 걷고 있다"며 "선교단체의 끊임없는 자기갱신이 없을 시 학생운동은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인호 목사는 과거 80년대 서울대학교내 죠이선교회 첫 캠퍼스 간사로 사역을 했으며 격동의 현장 가운데 복음주의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학생운동가였다.
그는 88년까지 죠이선교회 캠퍼스 간사로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주도했으며 이후 88년 선교한국 대회 준비위원장직을 수행, 연합선교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 과거 80년대 복음주의 학생운동 그룹에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신을 소개해달라.
"79년도 군제대 이후 대학에 복학한 뒤 80년도부터 캠퍼스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서울신학대학교에 재학중이 었으며 80년대 격변의 현장에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특히 그 중심에는 서울대학교가 있었으며 본인은 서울신학대를 졸업한 뒤 죠이선교회 첫 캠퍼스 간사로 서울대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 앞에 있는 대규모 집회장에서 수천명이 매일같이 집회를 하고, 체류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던 때 사역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당시 학생운동가들이 다 겪었던 일이기도 했다.
88년도까지 캠퍼스 간사로 학생운동을 했으며 앞서 86년도 말에 죠이선교회 30주년 기념 선교대회를 준비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본인은 캠퍼스 사역 당시 학생운동의 현장에서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한계를 많이 느끼고 있었던 때였다. 왜냐하면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대부분 현장에 대한 고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복음주의 학생운동이라면 IVF,CCC,죠이선교회,ESF,SFC.UBF,네비게이토 등의 캠퍼스 선교단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복음주의 학생운동 단체들은 대부분 전도와 제자훈련에만 집중한 나머지 단체의 부흥에만 역점을 두고, 사회적 현실을 등한시 여겼으며 시대적 고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복음주의 목회자들이나 사역자들은 아무 영향력이 없었다. 유일하게 김진홍 목사(두레교회) 혼자만 그래도 빈민운동을 통해서 젊은이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던 그런 때였다. 보수교회 복음주의자들은 사회 문제에 관해 보통 정권과 야합하고,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복음주의 학생운동 역시 순수한 복음주의란 기치를 내세워 사회적 현실에 침묵했던 그런 시기였다.
한편 88년도 선교대회 준비를 맡게 되었으며 선교운동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당시 대회 자체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IVF,죠이선교회(JOY), GMF 등의 선교단체 지도자들의 동의로 선교한국 90대회(90년도)의 최고 실무진(상임총무) 연합선교 운동에 봉사할 수 있었다.
특히 선교한국 90대회를 계기로 7개의 캠퍼스 선교단체가 연합하는 등 당시 캠퍼스 선교회간 경쟁 구조가 대폭 완화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96년도에는 후배들에게 선교한국 대회를 인수인계하고, 영국에서 2년 안식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면 선교운동, 청년운동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90년대 중반이후 교회는 침체기를 걷게 되었으며 생명있는 교회가 찾아보기 매우 힘들어졌다. 생명있는 교회가 무엇인가하며 찾다가 영국에서 셀교회 운동을 만나고, 한국에서 셀교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99년부터 5,6년 동안 셀교회 운동의 붐이 일어났는데 본인도 일정부문 기여하게 된 것 같다.
학생운동에서 연합선교 운동으로 그리고 셀 교회 운동으로 이 정도로 본인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좌우 스펙트럼을 넘어선 새로운 기독학생운동의 장(場)을 열었다고 평할 수 있는데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태동된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초기 배제학당에서 있었던 운동도 복음주의로 볼 것이냐 말 것이냐에 따라 그 역사가 1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단 50년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초기 배제학당에서 아펜젤러, 언더우드를 주축으로 학생운동이 시작됐고, YMCA가 시작됐기 때문에 초기 YMCA 운동을 복음주의로 볼 것이냐? 진보주의를 볼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본인은 YMCA가 학생운동의 시초라고 보고 있으며 YMCA가 초기에는 비교적 복음주의였다고 본다. 언더우드, 아펜젤러는 진보주의자들이 아닌 복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보통 말하는 복음주의 단체들의 태동시기가 언제부터인가. 1950년대 말에 보통 시작됐다고 보여진다. IVF,CCC,죠이선교회 등은 1958년도에 시작했다. 대부분 외국의 선교단체가 한국에 진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25이후 미국에 유학했던 기독 지성인들이 그곳에서 만났던 학생운동을 한국에 시작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반면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서 태어난 자생적 선교 단체도 있다. UBF,네비게이토 등의 선교단체가 그렇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너무 가난했고, 젊은이들은 희망이 없었다. 외국 사람들의 앞선 성경공부, 전도 이것이 상당히 젊은이들에게 어필을 했다고 평가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부흥했냐? 그렇지는 않았다. 선교단체의 부흥기는 70년대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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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목사는 1950년대 말 외국 선교단체의 국내 진출로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 |
"선교단체 내부에서도 흐름이 다르다. 그 분의 주장대로라면 현재 IVF는 복음주의 학생운동이라 말 할 수 없다. 철저하게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사역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말에 IVF에 적극적인 사회참여 움직임이 있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적극적인 사회 참여 움직임이 있었으며 그 중심에 고직한 선교사가 있었다.
당시 '복음과 상황'이란 잡지도 출간됐으며 복음주의 학생·청년운동, 공정선거감시 등의 그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IVF의 이사회 및 선배들의 견제가 심했으며 끝내 역풍을 받아 고직한 선교사는 총무직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IVF는 다시 보수주의로 완전히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 사회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결국 단체가 분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5개 단체 지부가 탈퇴한 것이다.
조 박사가 말하는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그 시기에만 국한된 것이다. 80년대 말로 끝난 것이다.
본인은 한국교회 대부분이 보수 복음주의라고 생각한다. 전도와 제자훈련에 집중하나 사회에도 소극적이나마 참여하는 입장을 가진 그룹들을 말하는데 현 복음주의 학생운동 단체들도 이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 80년대 민주화를 거쳐 진보기독학생운동은 사회 주도권을 상실하고, 전반적으로 침체기를 걷게 되었는데 그 원인을 진단해 본다면.
"군사독재 시절 기독학생운동은 분명한 존립 목적이 있었다. '민주화' 당시 진보기독학생들이 피할 곳이라면 교회가 전부였다. 교회가 그나마 그들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고, 동부권이 무너지자 그들 중 일부는 북한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으며 또한 민주화가 이뤄지니 그들의 공공의 적이 사라지게 되었다.
상황적으로 그들의 공공의 적이 없어지니 그 만큼 이슈가 많이 상실됐으며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진보 기독학생운동 존립자체가 어려워진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진보기독학생 단체들은 조직만 남아있지 활동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진보 기독학생들이 캠퍼스내 시대적 고찰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90년대는 개인주의와 물질주의 등으로 학생들의 생활문화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다. 그러나 진보기독학생들은 70,80년대 시대의 역할 이후 90년대 새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결국 시대적 과제 설정에 실패하고, 사회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 진보기독학생들이 처음에는 복음과 사회적 현실을 둘다 불들었는데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다 보니 복음을 상실하고 말았다. 복음에 대한 정의 자체가 달라졌다. 빈민들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음이며, 도시산업선교 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한다. 기독성이 사라진 것이다. 성경을 보는 관점에 다르다. 이들은 특히 인간의 죄성에 대한 고민은 없고, 현상에만 집착하는데 변화가 일어날 수가 없다. 복음성을 잃어 버렸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복음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이들의 사회적 역할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나마 복음주의 그룹이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아직까지 존립하고 있는 것은 복음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성을 갖고 있으니 연약하지만 그래도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동시기 복음주의 그룹은 어땠는가?
"민주화를 거치는 과정을 통해서 복음주의 학생운동 그룹에 속한 이들이 1985년도 공정선거감시단을 조직하며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시도하기도 했다.
특히 70년대 로잔언약을 재평가하며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양자의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자생적인 로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사회참여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기윤실, 경실련쪽으로 기독 청년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그 중간에 88년도에 선교한국이 시작됐고, 91년도에는 학원복음화협의회가 시작이 되면서, 그 당시 복음주의 학생운동권에서는 연합운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또 굉장히 중요한 흐름이었다. 민주화와 번영화 그 이후에 연합운동이 시작됐다는 것. 본인은 그것을 연합운동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차원의 학생운동이라고 평가한다. 당시 선교단체들이 모두 개인주의적이었다는 면에서 볼 때 새로운 흐름이었다. 당시 복음주의 학생운동 단체들이 '해외선교'란 연합에 대한 대 명제가 생겨났기 때문에 연합운동이 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한국교회사 뿐 아니라 기독학생운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해가 88년도라고 본다. 6.29선언이 있었으며 민주화, 개방화가 되었다. 즉, 단기선교 붐이 일어난 것. 수많은 선교사들이 배출되고, 해외선교를 주제로 각 선교단체의 연합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어떤 단체든 고착화되면 쇠퇴기를 걷게 되기 마련인데, 현재의 기독학생운동을 진단해 본다면.
"학생운동이 침체되었다. 연합운동 역시 선교한국이나 학복협 자체도 침체기에 들어선지 꽤 됐다. 90년대 후반부터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이제 관성에 의해서 흘러가고 있다고 본다. 모든 무브먼트는 30년 생명주기가 있다. 초기 창립자의 헌신과 열정과 비전에 의해 강력하게 일어나 30년이 지나면 수명이 다 된다. 개척기에 비전, 헌신, 눈물, 씨 뿌림이 있으나 20,30년이 되면 열매가 생긴다. 바로 사람, 돈, 건물 등이 생기면서 기구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모든 갱신운동은 기구화가 되고, 고착화가 되기 마련이다. 선교단체도 예외일 수 없다. 한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50년을 향해서 가고 있다. 벌써 기구화가 되었다는 말이다. 어느 단체든 겪게 되는 과정이다.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끝없는 갈망을 기초로 한 개척정신일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선교단체는 교회가 하지 못하는 어느 특수한 사역을 해왔으나 이제 특수한 교회가 많이 나타나 선교단체의 역할론이 새롭게 대두될 시점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불신자 전도 운동, 이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캠퍼스 선교단체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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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목사는 태동된지 50년이 지난 복음주의 학생운동 그룹들이 고착화,기구화 되는 과정을 걷고있다며 선교단체의 끊임없는 자기갱신이 없을 시 학생운동은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송경호 기자 | |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본인도 기독학생 연합운동을 일으켰던 사람이다. 그러나 연합운동이 패권주의 운동으로 전락했다. 찬송가공회, 기독교 방송, 기독TV, KNCC, 한기총 그런 연합운동단체가 있지만 연합운동이 단지 연합운동을 위해 존재하면 안 된다.
캠퍼스 학생운동할때는 연합으로 하는 것이 좋다. 선교적 지향점이 유사한 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러나 요즘 연합운동이 패권적인 연합운동이 되는것 같아 문제다. 연합은 예수님 말씀의 중요 주제였다. 주님과의 연합 자체가 결국 전도와 선교를 위함이다. 오늘의 교회는 그러한 연합에는 관심도 없고 관계하지도 않는다.
-'인터처치'라는 지역교회와 캠퍼스 선교회의 중재전문사역기관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순수하게 연합운동을 할 수 있으면 좋다. 그러나 연합사역은 인내와 수고가 필요하다. 연합할 때 자신의 단체만 유일한 정통 보수이고, 진정한 학생기독단체라고 주장하면 연합이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선교한국대회 진행할 때 IVF, CCC, 예수전도단, SFC, 기다렸다는 듯 환영하고 네비게이토도 참여했는데 이러한 연합사역에 자신의 이익을 따지면 안된다. 마음으로 섬김의 사역을 통해 하나되어야 할 것이다.
- 21세기 진보,보수를 넘어 탈이데올기를 지향하는 새로운 기독학생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하는가?
현재 선교적 사명인식을 가진 단체들은 갱신해 나가며 그렇지 않은 단체는 조직화, 기구화되어 소멸되는 상황을 겪게 될 것이다. 이 시대 필요한 사람은 진보나 보수, 기득권나 비기득권이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성경적 하나님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철저히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그리고 실험정신을 기반으로 교회가 하지 못하는 특수한 사역을 펼치는 등 선교단체의 특성화 전략도 필요할 것이다.
김진한 기자 jhkim@ch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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